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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7-25 17:01:38

유사룡

劉士龍
(? ~ 612)

1. 개요2. 생애

1. 개요

중국 수나라의 장수.

2. 생애

612년에 상서우승을 지내면서 수양제의 명으로 위문승과 함께 요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고 10년의 부세를 면제하면서 군현을 설치하고 관할했으며, 고구려를 공격할 때 상서좌승이 되어 수나라의 별동대에서 위무사를 지냈다.

수나라의 고구려 2차 원정 때 을지문덕이 수나라의 군영에 파견되어 그 군영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을 하면서 허실을 보려고 했다. 이때 우중문은 수양제로부터 고원이나 을지문덕이 와서 만나게 되면 반드시 그들을 생포하라는 밀명을 받았으며, 우중문은 이로 인해 을지문덕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유사룡은 이를 굳게 말려 중지시켜버렸다. 이로 인해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의 허실을 알아보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으며,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놓아준 것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어 을지문덕을 속여서 다시 오게 하려고 했지만, 을지문덕이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를 건너가면서 완전히 놓치게 되었다.

황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독단적으로 풀어준 인물에게 국가의 정예병을 몽땅 잡아먹혔으니 이게 다 유사룡 때문이다로 몰리기 좋았으며, 결국 고구려 원정이 실패한 후에는 참수당했다. 수나라는 그 목을 통해 천하 사람들에게 사죄했다고 한다. 후대에도 유사룡은 복권되지 못했는데 이 인물은 죽을 짓을 해서 죽은 거지 양광의 폭정으로 인한 희생양이 아니다는 인식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접대의 관습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유사룡의 주장이 마냥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만약 을지문덕을 붙잡거나 죽였다면 전쟁의 판도는 어떨지 몰라도 항복하러 온 사람을 붙잡거나 죽였다면 이후 수나라의 외교 신뢰도는 크게 하락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수나라군의 허실을 탐문하고 돌아가 전쟁의 승리에 기여를 한 건 맞지만 설령 그를 붙잡거나 죽였다고 해도 이미 수나라군은 보급도 엉망이고 고구려군의 게릴라에 시달리는 등 열세였고 고구려군은 승전에 가까운 시점이었기 때문에 붙잡았다해도 과정만 약간 달라질 뿐 수나라의 패배는 변함이 없었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 단, 수양제는 접대의 관습에 매달리는 유사룡과는 성격부터가 상극이었을 것이며 황제인 자신의 말조차 듣지 않고 냅다 놓아줘버린 유사룡이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다.수양제는 진왕 시절부터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태자와 황제가 되기 위해 자신의 형이자 태자였던 양용을 온갖 모략질을 일삼아서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부모에게 착한 아들인 것처럼 연기하고 수문제가 자신의 실체를 알아내자 가차없이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다.

파일:좆두족두.png
드라마 연개소문 에서는 배우 이용진이 연기했다. 양제가 패전 직후 돌아온 이들을 꾸짖다가 유사룡을 본 후 눈이 뒤집어 지면서 이놈이 어찌 살아있냐면서 나는 분명히 을지문덕, 강이식, 고건무 등을 보면 무조건 잡아두라고 하지 않았냐며 이놈을 당장 참수하라고 하자 자신이 한 행동은 대국의 채신을 위한 거였고 어느 전장터에서도 항복하러온 사신을 죽이는 법은 없다며 나름대로 자신이 을지문덕을 놓아주자 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해보지만 양제는 이곳은 피튀기는 살육의 현장이고 결과적으론 니가 놓아주자고 한 덕분에 을지문덕이 수나라군의 전략과 정보를 모두 다 알고 돌아가서 공격하는 바람에 30만 5천이라는 대군이 몰살당했는데 국가의 채신 같은 걸 운운할 수 있냐고 일갈한다. 이후 참수하고 목을 군문에 걸라는 말에 "통촉하시옵소서!" 라며 애원하지만 양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결국 참수당하면서 등장 종료.

직후 내호아도 끌려나와서 몽둥이 찜질을 당한후 처형될 위기에 처하는데 곡사정이랑 배구가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장수들을 다 죽여버리면 더 큰 손실을 자초하는 거라며 유사룡을 죽이는 건 어쩔수 없다 쳐도 나머지 장수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간청하는데 이는 장수들이나 대신들 사이에서도 유사룡의 행동은 감싸주기엔 선을 한참 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