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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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b8,#191919><colcolor=#fff> 유다 𐤉𐤄𐤃𐤄 | Kingdom of Judah | |
■ 유다 왕국의 영토 | |
아람 문자 | 𐤉𐤄𐤃𐤄 (유다) |
현대 표기 | מַמְלֶכֶת יְהוּדָה (유다 왕국) |
존속 기간 | 기원전 931년 ~ 기원전 586년 |
위치 | 가나안 |
수도 | 헤브론, 예루살렘 |
정치 체제 | 군주제 |
국가원수 | 왕 |
주요 군주 | 르호보암 (17년) 아사 (41년) 여호사밧 (25년) 아달리야 (6년) 요아스 (40년) 아마샤 (29년) 웃시야 (52년) 요담 (16년) 아하스 (16년) 히스기야 (29년) 므낫세 (55년) 요시야 (31년) 시드기야 (11년) |
언어 | 고대 히브리어 |
종교 | 야훼 신앙 원시 유대교 가나안 다신교 |
종족 | 히브리인 |
이전 | 이스라엘 왕국 |
이후 | 신바빌로니아 |
현재 국가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팔레스타인|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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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기 시대에 유대 지역에 들어선 왕국. 성경에 따르면 히브리인의 12지파 중 유다 지파와 소수가 된 벤야민 지파를 중심으로 건국되었다고 한다. 남유다 왕국이라고도 부른다.2. 역사
솔로몬 사후 12지파 중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제외하고 나머지 10지파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10지파는 여로보암을 지지하여 그를 이스라엘 왕국의 국왕으로 받들었고, 르호보암의 통치 아래에 있었던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중심으로 유다 왕국이 건국되었다.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만의 왕국이나 다름없어서[1] 다윗의 언약을 명분으로 왕권 강화와 세습을 이어갔기에 왕권이 안정되어 있었다.[2] 반면 이스라엘 왕국은 10지파의 연합체여서 과거 판관들처럼 지파별로 돌아가면서 왕이 선택되었다.
이 시기쯤에 히브리인의 종교 역시도 격변하는데, 주변의 다신교 주민들과 교류하고 병존하며 다소 느슨하게 유일신 개념을 믿던[3][4] 히브리인들은 이 시기를 겪으며 우리가 아는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열왕기에 따르면 오랜 시간동안 북이스라엘 왕국이 더 강성했지만 초기에는 오히려 유다 왕국이 더 안정적이었다고 한다. 이는 안정적인 왕위세습으로 큰 혼란이 없던 유다와는 달리 북이스라엘 왕국은 초기 왕위계승에서의 혼란으로 보이며 여로보암 1세, 바아사가 유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영 아니올시다였다. 허나 여호사밧 시기에 약체화가 되고 심지어 오므리 왕조에게 찬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는 북이스라엘이 오므리 왕조-예후 왕조로 이어지는 안정기에 접어들었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 진행된 여러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국초부터 북이스라엘 왕국의 속국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사실 열왕기의 기록에서부터도 의문점이 있다. 첫번째는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왕국이 북이스라엘, 남유다로 분열했다는건데 문제는 순서가 솔로몬 사망-르호보암 즉위-선왕때 너무 고달팠으니 좀 살살 다스려달라고 함-르호보암이 거절-격분한 10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하여 독립이라는 르호보암 즉위 후 분열의 과정이다. 즉 어디까지나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인 상태로 분단이 일어났다는 얘기인데 이런 경우 본래 왕으로 있던 나라의 국호는 그대로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스라엘은 떨어져 나간 쪽이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를 유지하고 있고 오히려 원래 있던 쪽이 유다라는 새로운 나라 이름을 택했다. 두번째는 나라 이름인데 이스라엘은 이미 사울 왕 시기부터 쓰던 이름이지만 유다는 어디까지나 12지파의 하나인 유다 지파의 이름일 뿐이다. 앞서 말한 이유와 합쳐서 보면 떨어져나간쪽은 통일시대 이름을 쓰고 본래 있던 쪽은 격이 더 낮은 수준의 국호를 택했다는 것인데 이것도 문제가 있다. 세번째는 예루살렘,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들은 하나같이 악했다고 평가받는데 이는 예루살렘이라는 종교적 중심지가 남유다에 있어서다. 그래서 종교적 권위를 따로 확립하고자 우상숭배를 행해 악하다 평가받은 것인데 정작 예루살렘이 없는 북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이스라엘 발굴조사, 이집트 기록 등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초기 이스라엘의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애초부터 사마리아였다는 주장이 나오는데[5] 이 말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없는 북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이어받은게 합당하다.
물론 이 내용에도 반론이 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12지파의 연합왕국이었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은것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고 나서 그를 따르던 지파들이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부터다. 12지파중 10지파라는 과반을 훌쩍 뛰어넘는 숫자의 독립은 10지파의 독립인 동시에 10지파의 유다, 베냐민 지파 축출이기도 했던 것인 만큼, 유다지파가 연합왕국의 명칭인 이스라엘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한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일단 성경에서는 야훼가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을 넘겨줬다고 하니 성경 기록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북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신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한 이후 유다 왕국은 이집트를 동맹으로 삼아 아시리아를 견제한 히스기야, 아시리아의 전성기에 친아시리아 정책을 편 므낫세 및 아시리아가 쇠퇴하자 유다의 중흥과 야훼 신앙 진흥[6]을 꾀했던 요시야 같은 중흥 군주도 있었지만,[7] 요시야가 이집트 왕 네코 2세에게 살해되자 이집트의 괴뢰국으로 종속되었고,[8] 마지막 시드기야 때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침략에서 이집트가 유다 왕국의 원군 요청을 무시해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는 등 수도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멸망했고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러한 바빌론 유수 과정에서 유다 왕국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언어인 아람어를 익히게 되었다.
3. 역대 국왕
자세한 내용은 유다 왕국/역대 국왕 문서 참고하십시오.[1]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자 벤야민 지파 출신인 사울도 자신은 보잘것없는 족속 출신이라고 왕이 되길 두려워했으며, 벤야민 지파는 12지파간의 내분으로 인해 멸망 직전까지 가는 등 상당한 약소 지파였다. 물론 벤야민 지파가 원래부터 약소 지파였던건 아니다. 원래는 다른 11지파 못지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11지파와 맞짱을 뜨다가 600명만 남고 다 죽어서 약소 지파가 된 것이다.[2] 중간에 오므리 왕조에게 찬탈당했으나 1대에 그쳤다. 그런데 이렇게 찬탈 후 전 왕조로 돌아간 것은 통일시대, 북이스라엘, 남유다 셋 중에서 남유다가 유일한데 그만큼 남유다에서는 왕은 다윗 왕가에서라는 의식이 뿌리박혔음을 알 수 있다.[3] 다소 느슨하다고는 했지만 나름 부패한 상태였다. 제사장들이 성경 작성자와 선지자들에게 까일 정도였고, 성소 안에서 금지된 행위를 일삼은 적도 있었다.[4] 그리고 때때로는 유일신 개념이 아니기도 해서 때로는 야훼를 주신으로 하는 다신교 개념의 신앙을 믿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아예 이민족 신을 숭배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왕들은 열왕기에서 가장 극렬하게 까인다.[5] 예를 들어 성서에서는 유다 왕국의 르호보암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약탈했다고 나오는 이집트 제22왕조 파라오인 셰숑크 1세의 이집트 쪽 가나안 정벌 기록에는 가나안에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가 있었다고 한다.[6] 그래서 요시야는 열왕가와 역대기 저자에게 다윗과 같다고 칭송받는다. 하지만 요시야의 할아버지인 므낫세는 아시리아에 예물을 바치고 친 아시리아 정책을 폈다며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모두 평가가 나쁘며,(기록대로라면 유다 왕국의 멸망의 원흉 수준이다. 기록에서는 므낫세의 행보가 야훼의 진노를 사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기로 결정내려지게 했고 그나마 요시야가 야훼 신앙 진흥을 꾀했기에 요시야 대에서는 멸망하지 않았다고...) 그나마 역대기의 평가가 조금 나은데 두 책의 저자 성향을 고려해야 한다.[7] 물론 마냥 안정적으로 중흥기를 구가한 것은 아니다. 히즈키야의 경우 아시리아와 전쟁을 했다가 나라를 말아먹을 뻔했고, 아몬은 얼마 안가 폐위당하는 등 불안한 요소도 있었다.[8] 요시야 사후 23년 더 나라가 유지되었는데 그 사이에 4명의 왕이 있었으며 여호아하즈는 이집트에게 살해당했고, 여호야김은 이집트 눈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