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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18:50

윌리엄 부르시에

성명 윌리엄 부르시에
William Bourchier
출생 1374년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리틀 이스턴
사망 1420년 5월 28일
프랑스 왕국 트루아
아버지 윌리엄 부르시에
어머니 엘레노어 드 루베인
아내 글로스터의 앤
자녀 헨리, 토머스, 윌리엄, 존, 엘레노어
직위 외 백작, 런던 탑 순경, 에식스 의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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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다.

2. 생애

1374년경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리틀 이스턴에서 기사 윌리엄 부르시에와 기사 존 드 루베인의 딸이자 상속녀인 엘레노어 드 루베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조부 로버트 부르시에는 평신도 최초로 잉글랜드 총리에 올랐고 백년전쟁에서 외교 및 군사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이 덕분에 에드워드 3세의 총애를 각별히 받았고, 1342년 초대 부르시에 남작 칭호를 받았다. 아버지 윌리엄 부르시에는 잉글랜드 총리 로버트 부르시에의 차남이었다.

1살 때인 1375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에드워드 3세의 막내 아들인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의 후견을 받았고, 에식스의 플레시 성에 있는 공작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392년, 당시 18세였던 그는 아일랜드 총독으로 선임된 글로스터 공작과 함께 아일랜드로 떠나려 했지만, 글로스터 공작이 공직에서 해임되었기 때문에 아일랜드로 갈 계획을 취소했다. 1394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동행했고, 그곳에서 왕에게 좋은 인상을 줄 정도로 활약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96년, 글로스터 공작은 그에게 연간 36파운드 이상의 수입을 할당했다.

1397년, 리처드 2세는 지난날 자신의 총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자신까지 위협했던 청원파 인사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때 글로스터 공작도 긴급 체포된 뒤 칼레로 보내졌다가 감옥 안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에식스와 하트퍼드셔에서 글로스터 공작의 추종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왕실 위원회에 활동했지만, 이와 동시에 글로스터 공작 계열 사람들과도 긴밀히 접촉했다. 그 중 한 명이 제4대 피츠월터 남작 월터 피츠월터였다. 1398년 아일랜드로 파견되어 공무를 수행했다.

1399년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헨리 4세는 400년 3월에 지난날 글로스터 공작이 윌리엄에게 부과한 연금을 웨스트민스터의 왕실 재무부에서 직접 지불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리처드 2세의 장남인 몬머스의 헨리는 그를 높이 평가했고, 1401년에 자신을 섬기는 기사들과 동일한 연금을 할당했다. 이후 부르시에는 덴마크 국왕 에리크와 왕실 결혼 문제를 협상하는 임무를 맡았고, 1403년 봄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1403년 7월 21일, 헨리 4세의 군대는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가 이끄는 반란군을 격파했다. 이때 전사한 왕실군 측 인사들 중에는 글로스터 공작의 유일한 상속녀인 글로스터의 앤의 남편이었던 제5대 스태퍼드 백작 에드먼드 스태퍼드도 있었다. 글로스터의 앤은 영지에서 2,200파운드가 넘는 연간 수입을 받았고, 이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당시 그녀는 약 20세였고, 아들 험프리와 딸 앤을 두고 있었다. 게다가 에드워드 3세의 손녀이기도 했기에 그녀와 결혼할 남자는 막대한 부 외에도 왕실과 밀접한 인맥을 맺을 수 있었다.

얼마 후 오와인 글린두르가 이끄는 웨일스 반군이 스태퍼드 백작이 지키고 있던 웨일스-잉글랜드 국경 지대의 성채 하나를 공략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헨리 4세는 윌리엄에게 성채를 지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후 윌리엄은 헤리퍼드셔의 헌팅턴 성에서 글로스터의 앤과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이 스태퍼드 백작이 사망한 지 몇 주 후에 비밀 결혼을 맺은 곳도 바로 이곳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이 발각되자, 윌리엄은 헨리 4세 앞에서 솔직히 인정하고 큰 벌금을 지불했다. 하지만 헨리 4세는 윌리엄의 군사, 행정 능력과 랭커스터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고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해줬다.

윌리엄은 앤의 영지를 지키고 관리하는 임무 외에도 몬머스의 헨리 왕자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헨리의 웨일스 원정은 오와인 글린두르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험난했지만, 1407년 긴 공방전 끝에 오와인 글린두르를 지원하는 반군의 거점인 애버리스트위스를 공략했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 정부가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에 동참한 인사들로부터 압수한 에식스와 노퍽의 토지를 임대하면서 재산을 지속적으로 늘렸고, 에식스의 순회판사로서 7년간 재직하면서 에식스에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다졌다.

1413년, 몬머스의 헨리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로 등극했다. 그 후 윌리엄은 국왕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가 되었고, 1414년 프랑스에서 백년전쟁 재개에 앞서 외교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파리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사절들과 몇 주간 긴밀한 논의를 했다. 공개적으로는 평화를 확립하겠다고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프랑스 측의 군사 기밀을 빼돌리고 잉글랜드군이 상륙할 노르망디의 방비 상태를 염탐했다. 1415년 3월 윌리엄이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때, 헨리 5세는 이미 노르망디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있었다.

1415년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한 윌리엄은 90명의 기마 궁수와 29명의 중무장한 기병을 끌고 왔다. 헨리 5세는 6월에 출항하기 위해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여기엔 자신이 죽으면 자신에게 속한 말 한 마리를 윌리엄에게 주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윌리엄은 1415년 10월 25일에 일어난 아쟁쿠르 전투에 참가해 102명의 병사를 지휘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최선두에 서서 용맹을 떨쳤고, 여러 명의 고귀한 적 장수들을 생포하는 공적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런던 탑 순경을 맡고 있던 노리치의 에드워드가 전사하자, 헨리 5세는 1415년 11월에 윌리엄을 새로운 순경으로 임명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아 탑에 갇힌 포로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왕실 사냥개를 책임지는 직위를 맡았으며, 의붓아들인 험프리 스태퍼드를 양육하고 스태퍼드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며, 여러 왕실 재산 중 일부를 관리하는 권리도 부여받았다.

1417년 헨리 5세의 2번째 프랑스 원정에 기마 장창병 39명을 포함한 164명의 개인 수행원과 함께 참여한 윌리엄은 2차 캉 공방전에 참여한 뒤 '황금 사자'로 알려진 캉의 큰 저택에 대한 관리권을 수여받았다. 1418년 루비에 공방전과 루앙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419년 2월 디에프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뒤 디에프의 대장에 선임되었다. 디에프는 노르망디의 주요 항구도시였기에,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에서 작전을 수행할 때 필요한 물자 수송을 위해 꼭 지켜야 할 곳이었다. 또한 윌리엄은 망테라졸리와 물롱의 총독에 선임되어 헨리 5세에게 물자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영토에서 잉글랜드 왕국에 충성하는 현지 관리들을 선발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1419년 6월 외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420년 5월 28일 트루아에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와 헨리 5세의 결혼 협상을 진행하던 중 중병에 걸려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잉글랜드로 보내진 후 글로스터셔의 란토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