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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5 21:28:48

윌리엄 라티머(제2대 라티머 남작)

성명 윌리엄 라티머
William Latimer
생몰년도 1276년 ~ 1327년 2월 27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라티머 남작령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기스버러
아버지 윌리엄 라티머
어머니 앨리스 레데트
형제 니콜라스, 토머스, 조앤
배우자 루시 트윙, 시빌 드 푸르노
자녀 윌리엄, 토머스, 크리스티나
직위 제2대 코르비의 라티머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으며, 디스펜서 전쟁에서 에드워드 2세 편에 섰다.

2. 생애

1276년생으로, 초대 코르비의 라티머 남작 윌리엄 라티머기사 월터 레데트의 딸 앨리스의 장남이다. 형제로 기사를 맡은 니콜라스와 토머스, 알렉산더 코민의 부인이 된 조앤이 있었다. 1294년 웨일스 반란을 진압하는 군대에 복무한 뒤 기사 작위를 받았다. 1296년 가스코뉴에서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고, 1297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스코틀랜드 반군과 대적했다. 1299년 2월 6일 영주로서 의회에 소환되었다. 130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제2대 코르비의 라티머 남작이 되었으며, 요크셔, 켄트, 베드퍼드셔, 서리에 위치한 모든 가족 영지를 물려받았다.

1307년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의 지휘하에 로버트 1세를 상대한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1310년에는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도 참전했지만, 스코틀랜드군에게 생포된 뒤 8개월간 억류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한편, 그는 대귀족들과 피어스 개버스턴 간의 대립이 벌어졌을 때 피어스를 옹호한 에드워드 2세를 지지했고, 그 보상으로 노샘프턴셔의 로킹엄 성 보안관과 왕립 삼림 관리인의 직위를 받았다. 1312년 피어스가 대귀족들에게 살해되었을 때도 에드워드 2세를 지지했다.

1319년, 에드워드 2세에게 사사건건 맞서던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거래했다. 이 거래에 따르면, 그는 토머스로부터 링컨셔에 있는 영지를 받았고, 헌팅던셔와 노샘프턴셔에 있는 3개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도 받았다. 그 대가로, 그는 왕실과 토머스 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토머스에게 기사 단원 한 명과 일반 기사 10명, 그리고 기병 40명을 포함한 분견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 계약에 따라 토머스가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상실한 베릭 요새를 탈환하기 위한 에드워드 2세의 원정에 동행했을 때 분견대를 이끌고 가담했고, 그 보상으로 250파운드를 받아냈다.

그러나 1321년 토머스가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부자를 타도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을 때 토머스를 지원하길 거부했고, 1322년 초 에드워드 2세가 반기를 일으킨 랭커스터 백작을 무찌르러 출진할 때 즉시 왕에게 가담했다. 1322년 3월 16일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반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왕실군 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랭커스터 백작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그는 요크의 수호자라는 직위를 얻었다. 1324년 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국왕의 수행원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고, 1325년 4월 11일 뷰리외에서 발행된 왕실 헌장의 증인으로 언급되었다. 1327년 2월 27일에 요크셔의 기스버러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