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월터 피츠월터 Walter FitzWalter | |
생몰년도 | 1345년 5월 31일 ~ 1386년 9월 26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핸햄 | |
사망지 | 카스티야 왕국 갈리시아 오렌세 앞바다 | |
아버지 | 존 피츠월터 | |
어머니 | 엘레노어 퍼시 | |
아내 | 엘레노어 다그워스, 필리파 모훈 | |
자녀 | 로버트 피츠월터, 월터 피츠월터 | |
직위 | 피츠월터 남작 |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했다.2. 생애
1345년 5월 31일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핸햄에서 제2대 피츠월터 남작 존 피츠월터와 제2대 퍼시 남작 핸리 퍼시의 딸 엘레노어 퍼시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존 피츠월터는 1338년 프랑스 원정군이 집결한 입스위치로 소환된 44명의 에식스 기사 중 일원으로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윌리엄 드 보훈 휘하 군대에서 여러 전투에 기사로 참여했고, 1차 칼레 공방전에서도 용맹을 떨쳤다. 그 덕분에 에식스 대표로 왕실 의회에 자주 출석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많은 지역 귀족과 종자들을 포섭해 갱단을 결성한 뒤 에식스 일대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강도를 일삼고 이웃 영주의 재산을 강탈했으며, 여행객들에게 통행료를 강제로 뜯어냈다.그러다 콜체스터 마을에 있던 자신의 영지에 콜체스터 당국이 세금을 부과할 권리를 거부하고, 마을 주민들이 자신의 토지 옆에 있는 물레방아에 가는 것마저 허용하지 않자, 콜체스터 주민들이 분노해 그의 영지에 침입해 월터 피츠월터의 하인들과 유혈 충돌을 벌이고 사냥, 낚시, 벌목을 벌였다. 존 피츠월터는 이에 분개해 주민들을 고발했지만 조사 위원회가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지 않자, 부하들을 시켜 위원회에 참여한 배심원들을 찾아내 폭행을 가했다. 그러다가 1342년 5월 20일에 사병대를 동원해 콜체스터를 포위해 7월 22일 40파운드의 보상금을 받을 때까지 도시를 봉쇄했고, 1343년 4월 7일에 다시 콜체스터를 포위해 40파운드를 추가로 받아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이같은 횡포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프랑스에서 용맹을 떨친 그를 처벌하고 싶지 않아서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거느린 갱단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져 에식스 지역 경제가 무너질 위기에 몰리자, 에드워드 3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351년 에식스에 왕실 조사단을 파견했다. 이후 존 피츠월터는 강탈, 세금 납부 거부, 왕권 침해, 살인, 강도, 강간, 방화 및 납치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위원회의 소환령을 무시했지만, 나중에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가서 왕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런던 탑으로 보내졌고,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다. 그를 추종했던 하인 중 상당수도 투옥되고 벌금이 부과되었으며, 그중 한 명인 윌리엄 드 와이본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존 피츠월터는 1352년 6월에 풀려났지만, 847파운드 이상에 달하는 벌금을 10년간 분할 납부해야 했으며, 어떤 직책도 맡지 못한 채 쓸쓸히 지내다 1361년 10월 18일에 사망했다.
이렇듯 과거에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다가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피츠월터 남작이 된 월터 피츠월터는 5년간 어머니의 섭정을 받다가 1366년 10월 성인이 되면서 상속 재산을 받았다. 1370년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6,000 원정군에 가담해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위협했지만, 수비대가 야전에 응하지 않고 철저히 농성하면서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겨울 숙영지를 어느 곳에 놓을지를 놓고 놀스와 대립했다. 놀스는 프랑스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브르타뉴 서부로 철수한 뒤 고지대에 숙영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월터 등 다른 장군들은 척박한 브르타뉴 서부에서 약탈할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여기에 머물면서 주변 마을을 계속해서 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공격해오더라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놀스는 이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끝내 설득에 실패하자 2,000명을 이끌고 브르타뉴 서부로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남은 4,000명은 3개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토머스 그랜디슨과 휴 칼블리의 이중 지휘를 받았고, 나머지 두 부대는 월터 피츠월터와 존 민스터워스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진군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12월 3일, 토머스 그랜디슨의 600~1200명은 퐁발랭에 주둔했고, 월터 피츠월터의 부대는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져 있었다. 존 민스터워스의 부대가 어디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적이 멀리 분산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프랑스 무관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이 호기를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12월 4일, 게클랭은 토머스 그랜디슨의 부대를 퐁발랭에서 기습 공격해 궤멸시켰다. 뒤이어 퐁발랭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던 피츠월터로 향했고, 일부 병력에겐 로버트 놀스의 잉글랜드군의 행방을 수색하게 했다. 피츠월터는 아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스 수도원 내로 피신한 뒤 그곳을 요새화하여 버텨보려 했다. 그러나 루이 드 상세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츠월터의 잉글랜드군과 거의 동시에 수도원에 도착했고, 수비대는 상세르의 즉각적인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적절한 방어를 조직할 수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압도되었고, 게클랭이 뒤이어 도착한 뒤 패주하는 잉글랜드군을 대거 사로잡았다. 피츠월터를 비롯한 몇몇 고위급 장교들이 생포되었고, 대부분의 잉글랜드 장병은 섬멸되었다.
퐁발랭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월터 피츠월터는 아버지의 막대한 벌금을 납부하느라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걸린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에드워드 3세의 정부로서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앨리스 페러즈에게 돈을 빌려야 했고, 그 대가로 에그레몬트 마을과 성을 그녀에게 넘겼다. 1386년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르기 위한 원정에 가담했으나, 그해 9월 26일 갈리시아 오렌세 앞바다에서 해상사고로 사망했다.
3. 가족
- 엘레노어 다그워스: 백년전쟁 초기에 브르타뉴에서 활약한 공으로 초대 다그워스 남작에 선임된 기사 토머스 다그워스의 딸.
- 로버트 피츠월터: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함.
- 월터 피츠월터(1368 ~ 1406): 제4대 피츠월터 남작.
- 필리파 모훈(1367 ~ 1431): 제2대 모훈 남작 존 드 모훈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