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루이 드 상세르 Louis de Sancerre | |
생몰년도 | 1341년 ~ 1402년 2월 6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상세르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 |
아버지 | 루이 2세 드 상세르 | |
어머니 | 베아트리스 드 루시 | |
형제자매 | 장 3세, 로베르, 티보, 에티엔, 마르그리트, 이자벨 | |
자녀 | 루이(사생아), 자네트(사생아) | |
직위 | 프랑스 원수, 기옌의 프랑스군 사령관, 랑그독 세네샬, 프랑스 무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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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섰다. '상세르 원수'라는 명칭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2. 생애
1341년경 프랑스 왕국 상세르에서 상세르 백작 루이 2세 드 상세르와 루시 백작 장 5세 드 루시의 딸인 베아트리스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장 3세, 로베르, 티보[1], 에티엔[2], 마르그리트[3], 이자벨[4]이 있었다.1346년 크레시 전투 때 아버지가 전사했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명령에 따라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계승자인 장 왕자의 자녀들과 함께 자라면서 샤를 왕자와 친분을 두텁게 다졌다. 1359년 6월 18일 17세의 나이에 멜룬 공방전에 참여하면서 전장에 처음으로 섰다. 이때 탁월한 용맹을 선보이면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눈길을 끌었고, 이때부터 게클랭과 친분을 맺었다. 1364년 용병대장 존 아이메리가 이끄는 용병대가 자신의 고향인 상세르를 침략하자 이를 격퇴해 명성을 떨쳤다.
1368년 6월 20일 샤를 5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이자 기옌 방면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잉글랜드군으로부터 파리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때부터 상세르 원수로 일컬어졌다. 1369년 12월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가 잉글랜드군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앙주를 공격해 푸이레논 일대를 약탈하자, 프랑스군 600명을 이끌고 매복 공격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 100명이 죽거나 사로잡혔으며, 모든 보급품, 말, 전리품을 상실했다. 존 헤이스팅스는 마을 가장자리에 있는 기사단 소유의 집으로 후퇴해 돌담을 주변에 쌓고 농성하다가 존 챈더스가 이끄는 구원군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었다.
1370년 로버트 놀스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6,000명이 칼레에서 출발해 파리로 진군하면서 여러 도시와 마을을 약탈 및 파괴하자, 샤를 5세는 그해 10월 2일에 게클랭을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해 이들을 요격하게 했다. 게클랭은 즉시 전국에 전령을 보내 소집령을 내렸고, 11월 6일 캉에서 집결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이때 루이 드 상세르는 샤텔로에서 1,200명을 규합한 뒤 게클랭과 합세했다. 1370년 12월 4일, 상세르 원수는 게클랭은 트머스 그랜디슨이 이끄는 잉글랜드군 분견대를 퐁발랭에서 궤멸시키는 데 기여했다.
게클랭은 적군을 섬멸한 뒤 퐁발랭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던 피츠월터로 향했고, 일부 병력에겐 로버트 놀스의 잉글랜드군의 행방을 수색하게 했다. 월터 피츠월터가 이끄는 또다른 잉글랜드군 분견대는 아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스 수도원 내로 피신한 뒤 그곳을 요새화하여 버텨보려 했다. 하지만 상세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츠월터의 잉글랜드군과 거의 동시에 수도원에 도착했고, 수비대는 상세르의 즉각적인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적절한 방어를 조직할 수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압도되었고, 게클랭이 뒤이어 도착한 뒤 패주하는 잉글랜드군을 대거 사로잡았다. 피츠월터를 비롯한 몇몇 고위급 장교들이 생포되었고, 대부분의 잉글랜드 장병은 섬멸되었다.
그 후 게클랭과 상세르는 놀스가 약탈 행진 동안 점령했던 모든 마을과 성들을 탈환한 뒤 놀스와 존 민스터워스의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놀스와 민스터워스는 곧 합세한 뒤 1371년 초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퇴각하기로 했다. 그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고, 병사들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집단 탈영하기 일쑤였다. 마침내 푸앵트 생마티외 항구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이용 가능한 배는 단 2척 뿐이어서 당시 수백명으로 줄어든 잉글랜드군을 수송할 수 없었다. 결국 놀스, 민스터워스를 비롯한 간부들만 배를 타고 탈출했고, 남은 이들은 그들을 따라잡은 프랑스군에게 학살되었다.
1371년 9월 5일 투르에서 기사 21명과 58명의 종자를 이끌고 푸아투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해 게클랭이 푸아투 전역을 장악하는 데 일조했으며, 1372년 리무쟁, 기옌, 랑그독에서 잉글랜드군을 물리쳐 프랑스의 영역에 귀속시키는 데 일조했다. 1372년 7월 게클랭과 함께 생세베르 공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1375년 노르망디의 생 소뵈르 르 비콩트를 공략했으며, 1376년 그리뇰 성을 공략했고, 그해 9월 8일에 페리그를 탈환했다. 그해 12월 5일 앙굴렘의 대의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잉글랜드인의 추방을 완료하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더 필요하니 돈을 모아달라고 요청했다.
1377년 7월과 8월 앙주 공작 루이 1세와 함께 기엔에서 새로운 원정을 벌여 134개의 도시 및 됴새를 점령했다. 7월 말 2,000명 이상의 부대를 푸아티에에서 집결한 뒤 8월에 출발해 논트론, 브랑몽, 부르데유, 페리그, 베르주라크 일대를 공략했다. 뒤이어 뒤라스를 공략하고 그곳의 영주 갈하드 드 듀퐁을 생포했으며, 로잔, 장삭, 블레냑 일대의 영주이며 푸아티에 전투 때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생포하는 데 기여했던 기욤-아라몽 드 마다이얀을 생포했다.
1379년 4월, 상세르 원수는 페리고르의 상원의원 피에르 드 모르니와 함께 샤를라에 주둔했다. 그러던 중 비트락, 몽발렌, 밀락, 파루엘 등지의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잉글랜드 수비대가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한 뒤 자신들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피에르 드 모르니와 함께 샤를라 인근에 매복하고 있다가 습격을 가해 격파했다. 그 결과 몇몇 도시에 잉글랜드군 수비대가 사라지면서, 프랑스의 영토로 자연스럽게 돌아올 수 있었다.
1380년 7월, 샤토뇌프 드 랑동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게클랭을 도왔다. 랑동 수비대가 항복을 결정할 무렵, 게클랭은 중병을 앓은 끝에 사망했다. 이후 지휘권을 인수한 그는 포위된 요새의 도랑 가장자리로 전진하고 수비대장을 불러 항복하라고 요청했다. 수비대장이 게클랭에게만 항복할 것이라고 대답하자, 상세르는 게클랭이 방금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에 수비대장은 랑동의 열쇠를 게클랭의 시신이 담긴 관에 올린 뒤 정식으로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게클랭의 장례식을 집전한 그는 기옌으로 진군하여 몽귀용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1380년 11월 4일 랭스 대성당에서 열린 샤를 6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에 참석했다. 1381년 오베르뉴 보안관을 맡았으며, 1382년 7월 29일에 클레르몽 지방에서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요새들을 탈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382년 퐁 드 코밍스 전투에서 소규모 프랑스 기병대를 이끌고 대규모의 플란데런 민병대를 격파했으며, 그해 11월 27일 루즈베케 전투에서 플란데런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반란군 지도자 필립 반 아르테벨데를 사살했다. 1383년과 1385년에 기옌에서 잉글랜드 용병대를 물리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384년 마르세유와 프랑스의 몇몇 지역을 재정복했다.
1386년 리무쟁, 마르쉐, 생통주, 앙굴램, 피에고르와 도르도뉴 강 너머의 기옌 전역의 왕실 보안관이 되었으며, 그 자격으로 부트빌 성을 공략했다. 1387년 라 로찬드리 성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퇴했다. 또한 앙굴램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던 자유 용병대를 몰아냈으며, 자르낙, 부르 샤랑트, 메르핀 성을 공략했다. 같은 해에 왕실로부터 수리에스부아 일대의 영주에 선임되었다.
1389년 5월 18일 랑그독 보안관에 선임되었고, 1390년 12월 10일 랑그독 세네샬에 선임되어 1401년까지 역임했다. 또한 아라곤 왕국의 국왕 추안 1세의 딸 비올란테와 샤를 6세의 약혼을 성사시켜 아라곤과 프랑스의 동맹을 이루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1397년 7월 26일에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었고, 1398년 카스티용 자작이자 푸아 백작위를 계승한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가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길 거부하자, 샤를 6세의 지시에 따라 군대를 일으켜 아르샹보가 다스리고 있던 대부분의 영토를 점거해, 아르샹보가 1399년 5월 10일에 타르브에서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겠다고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이 무렵 샤를 6세가 광기에 시달리자, 상세르 원수는 2명의 은둔 의사를 왕의 병상으로 보내 치료받도록 했다. 1399년 오순절 무렵, 샤를 6세는 당시 툴루즈에 있던 상세르 원수에게 카두앵의 성스러운 수의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지만, 상세르는 이를 따르지 못했다. 1401년 질병에 걸려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고, 1402년 2월 6일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생 드니 교회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임종이 임박하자 게클랭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검을 가져오게 한 뒤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왕에게 돌려줄 것이다. 나는 그의 기도에 내 영혼을 맡기며, 내가 항상 특별한 신심으로 간직해온 생 드니 교회에 안장되기를 간청한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당시 무덤이 파괴되었고, 시신은 도난당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고, 사생아로 루이, 자네트만 두었다. 루이는 발루, 라 페리에르, 베루의 영주가 되었고, 자네트는 샤를 6세의 고문인 장 드 라 테이유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