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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3:51:38

장 3세 드 상세르

성명 장 3세 드 상세르
Jean III de Sancerre
생몰년도 1334년 ~ 1402년 3월
출생지 프랑스 왕국 상세르
사망지 프랑스 왕국 상세르
아버지 루이 2세 드 상세르
어머니 베아트리스 드 루시
형제자매 루이, 로베르, 티보, 에티엔, 마르그리트, 이자벨
아내 마르망의 마르그리트, 콘스탕스 드 살루초
자녀 마르그리트, 잔
직위 상세르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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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섰다.

2. 생애

1334년경 프랑스 왕국 상세르에서 상세르 백작 루이 2세 드 상세르와 루시 백작 장 5세 드 루시의 딸인 베아트리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루이 드 상세르, 로베르, 티보[1], 에티엔[2], 마르그리트[3], 이자벨[4]이 있었다.

1346년 아버지 루이 2세 드 상세르가 크레시 전투에서 사망한 뒤 12세의 나이로 상세르 백작이 되었다. 1351년 4월 22명의 종자와 함께 생장당젤리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했다가 생포되었다. 1360년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평화 협약인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될 때 런던에 억류된 인질 중 한 명이 되었고, 나중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364년, 잉글랜드 용병대장 존 아이메리가 상세르 기사들에게 체포되어 3,000파운드를 지불한 후에 풀려났다. 그는 복수를 위해 라 샤레테쉬르루아르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상세르를 침략하려 했다. 생티보 수도사로부터 경고를 받은 장 3세는 베리와 부르봉 영주들에게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400명의 맨앳암즈가 주축이 된 군대를 결성한 뒤 남동생 루이와 함께 군대를 지휘했다. 이후 그는 라 가르고드 인근에 상륙하여 상세르를 침략하려는 대규모 잉글랜드군을 격파했고, 존 아이메리는 치명상을 입고 겨우 빠져나온 뒤 곧 사망했다. 이후 샤리테와 주변의 모든 잉글랜드 수비대가 장 3세에게 항복했다.

1369년 10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푸아투와 투렌 국경지대에서 지난해에 잉글랜드에 협력하여 그의 요새를 공략했던 기욤 뒤 플레시, 피에르 드 라 브로슈 등 20명의 영주 및 기사로부터 영지를 탈취한 뒤 장 3세에게 돌려줬다. 1370년 6명의 기사로 구성된 부대와 함께 생테냥에서 프랑스 국왕을 알현했다. 1371년 9월 5일 기사 3명과 종자 21명을 거느리고 동생 루이와 함께 투르에서 왕실군과 합세한 뒤 푸아투로의 원정에 참여했다.

1382년부터 1385년까지 27명의 기사와 150명의 종자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플란데런 반란군과의 전쟁에 참여했으며, 프랑스의 새 국왕 샤를 6세의 고문이자 시종장이 되었다. 1386년부터 1387년까지 50에이커의 포도원을 경작하고자 2900여 명에 달하는 인력을 동원했다. 138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과 함께 샤를 6세와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딸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결혼 계약에 대한 증인이 되었다.

1390년 여름, 형제 에티엔과 함께 제노바 공화국의 무어인 해적 토벌 원정에 참여했지만 60여 일 동안 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에티엔의 전사를 목도해야 했다. 이후 조국으로 돌아왔고, 1398년 5월 6일에 사촌인 장 4세 드 피에르퐁과 프랑스의 그랜드 마스터 장 드 몽터규의 딸인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1402년 3월에 사망했다.

3. 가족



[1] ? ~ 1402, 기사[2] ? ~ 1390, 바이쉬르소드르의 영주. 1390년 제노바 공화국의 무어인 해적 토벌 원정에 참여했다가 튀니지 마니아 섬 공방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다.[3] 8 ~ 9세에 사망해 노트르담 드 상세르 교구 교회에 안장되었다.[4] 1342 ~ 1373/1375, 라 페르테생토뱅, 리슬, 클레리, 바우존의 영주 피에르 드 그라세이와 초혼, 제리니, 트레토 영주인 기샤르 1세 도팽과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