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시대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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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온트위드 성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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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정부시대 시기인 1138년 5월 ~ 11월,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다비드 1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한 스티븐 왕을 축출하고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침공하면서 벌어진 공방전.2. 상세
헨리 1세 시기,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헨리 1세는 1100년 스코틀랜드의 마틸다[1]를 왕비로 삼았고, 마틸다의 형제인 알락산다르 1세와 데이비드 1세를 초빙해 런던에서 공부하도록 했으며, 잉글랜드 귀족 가문 여식을 아내로 삼도록 했다. 이 기간 동안 앵글로-노르만족의 영향력이 스코틀랜드에 적극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특히 1124년 집권한 데이비드 1세는 수많은 앵글로-노르만 기사들을 자신의 나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땅을 부여하고 스코틀랜드의 국가 및 사회 시스템을 잉글랜드 봉건제로 개편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데이비드 1세는 노르망디 전선에 직접 가서 헨리 1세를 도왔으며, 그의 아내인 헌팅던의 마틸다의 권리로 잉글랜드에서 광범위한 토지를 보유하고 헌팅던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 1127년 헨리 1세가 딸 마틸다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 세우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외조카인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군림하도록 전적으로 돕겠다고 맹세했다.그러던 1135년 12월 1일, 헨리 1세가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마틸다는 남편 조프루아 5세와 함께 앙주에 있었으며, 3남 기욤을 임신 중이었기에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게 지체되었다. 그러는 사이, 블루아 가문 출신이며 헨리 1세의 조카인 에티엔이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영국 해협을 건넌 뒤 런던에 입성했고, 1135년 12월 22일 윈체스터 주교인 남동생 앙리 드 블루아와 노퍽 백작 휴 드 비고의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의 스티븐 왕으로 즉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다비드 1세는 스티븐 왕의 즉위를 찬탈로 단정하고, 1136년 1월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북부로 침공해 1월 말까지 칼라일, 워크, 알닉, 노럼, 뉴캐슬 성을 함락했다. 하지만 그 해 2월 스티븐 왕이 대군을 이끌고 반격하자, 다비드 1세는 그와 대결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제안했다. 스티븐 역시 갓 즉위해서 불안정한 왕권을 다질 여유가 필요했기에 받아들였다.
이때 체결된 더럼 조약에 따르면, 다비드 1세는 칼라일을 유지하는 대신 다른 성은 반납하고,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는 스티븐 왕이 다비드 1세의 침공에 보복하고자 몰수했던 헌팅던 백작에 선임되고 헌팅던의 절반을 돌려받는 조약을 맺었다. 또한 다비드 1세는 잉글랜드 국왕이 된 스티븐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지만, 헨리는 칼라일과 다른 잉글랜드 영토의 영주로서 스티븐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합의를 맺은 후 부활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티븐의 궁정으로 떠난 헨리가 그곳에서 모욕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다비드 1세는 분노해 아들을 스코틀랜드로 귀국시켰다.
1137년 봄, 다비드 1세는 잉글랜드를 다시 침공하기로 마음먹고 노섬벌랜드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잉글랜드 측은 이에 대응해 뉴캐슬에 병력을 배치했다. 이후 양자는 서로 대치했고 소규모 접전이 여러 차례 벌어졌지만 대규모 회전은 피했다. 그러다가 양자는 12월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12월이 되었을 때, 다비드 1세는 스티븐에게 옛 노섬벌랜드 백작령 전체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스티븐이 거부하자, 다비드 1세는 1138년 1월 3번째 침공을 감행했다. 헥섬 수도원장이자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인 헥섬의 리처드는 그의 군대가 노섬벌랜드 전 지방을 공격하고 남녀노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도처에서 학살하고 마을, 교회, 집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불태웠다면서, "신이나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이교도 종족보다 더 잔인한 저주받을 군대"라고 비난했다.
이렇듯 행군하면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던 다비드 1세는 1138년 1월 10일부터 3주간 워크온트위드 성을 포위했다. 그러다가 스티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우세한 전투력을 갖춘 잉글랜드군을 피하기 위해 국내로 철수했다. 그 후 스티븐은 스코틀랜드에 보복하고자 로디언 해안 지대로 진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다가 돌연 잉글랜드로 귀환했는데, 이에 대해 또 다른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헥섬의 존은 그가 군대 내부 인사들의 충성심을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얼마 후, 잉글랜드 서부 지역에서 마틸다를 지지하는 대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반란군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의 알윅 영지에서 군림하던 유스타스 피츠 존은 다비드 1세에게 구원을 청했다. 다비드 1세는 4월 8일 노섬벌랜드로 재차 진군했고, 유스타스는 동생 윌리엄에게 군대를 맡겨 다비드 1세와 합세하도록 했다.
1138년 5월, 다비드 1세의 군대는 스코틀랜드군 보급선을 지속적으로 습격하던 워크온트위드 성을 포위했다. 헥섬의 리처드는 공방전 초기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스코틀랜드인들이 공성추와 기타 공성 무기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스코틀랜드군의 사상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자, 다비드 1세는 남작 2명에게 성을 계속 봉쇄하도록 한 뒤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해 6월 10일 클리더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다비드 1세는 여세를 이어가 계속 남하했지만, 8월 22일 스탠더드 전투에서 요크 백작 윌리엄 르 그로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상당한 전력을 보존한 채 칼라일로 후퇴한 다비드 1세는 스티븐이 국내의 반란군에게 관심을 돌린 틈을 타 군대를 재편했다.
이후 1138년 9월 말 교황 특사인 오스티아 주교 알베릭과 만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휴전을 협상한 그는 원정 중에 끌려간 모든 여성들을 돌려보내고 1139년 11월 11일 이전에는 잉글랜드를 다시 공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워크 성은 이러한 조건에서 명시적으로 면제되었고, 다비드 1세는 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는 수비대와 주민들은 결사 항전했고, 스코틀랜드 공성 장비 대부분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이 성을 봉쇄해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11월에 리보의 수도원장이 다비드 1세를 찾아가서 협상한 끝에 수비군이 명예롭게 무장하고 떠나는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워크 성을 접수한 다비드 1세는 성을 모조리 허물도록 했다.
이후 노럼 성을 짧은 포위 끝에 공략하고, 유스타스 피츠 존이 스코틀랜드에 넘긴 알닉 성을 점유하면서, 다비드 1세는 스탠더드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노섬벌랜드 점유권 분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1139년 4월 9일, 다비드 1세는 스티븐과 더럼 조약을 체결했다. 스티븐은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가 헌팅던 백작의 명예를 계속 누리는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노섬벌랜드 전체를 다비드 1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는 이후에도 스티븐과 종종 전쟁을 치르면서도 노섬벌랜드와 컴벌랜드 지방을 계속 손아귀에 쥐었고, 칼라일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