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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2:15:45

앙리 드 블루아

파일:앙리 드 블루아.jpg
성명 앙리 드 블루아
Henri de Blois
생몰년도 1096년 또는 1100년경 ~ 1171년 8월 8일 또는 8월 9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블루아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윈체스터
아버지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
어머니 노르망디의 아델
형제 기욤, 티보 4세, 마틸드, 스티븐 왕, 질레트, 엘레오노르
직위 윈체스터 주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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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성직자, 윈체스터 주교. 무정부시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헨리 2세 치세에서도 윈체스터 주교로서 정계에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1096년 또는 1100년경 블루아와 샹파뉴 백작 에티엔 2세와 윌리엄 1세의 딸인 노르망디의 아델의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기욤[1], 티보 4세[2], 마틸드[3], 에티엔, 질레트[4], 엘레오노르[5]가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클뤼니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으며, 1126년 삼촌인 헨리 1세의 지원 덕분에 글래스턴베리의 대수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이웃 영주들에 의해 강탈된 수도원 땅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1129년, 그는 중세 잉글랜드 왕국의 최고위 성직자 중 하나인 윈체스터 주교에 발탁되었고, 1129년 11월 17일에 봉헌되었다. 그는 종종 왕실 정치에 참여했으며, 1131년에는 헨리 1세의 의사에 따라 그의 딸인 마틸다를 잉글랜드 왕위 후계자로 받들겠다고 맹세한 성직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1135년 12월 헨리 1세가 사망한 후, 형제인 에티엔이 잉글랜드의 스티븐 왕으로 등극할 수 있도록 대법원장인 솔즈베리의 로저 주교와 왕실 재무부 수호자인 기욤 드 퐁드라슈를 설득했다. 1136년 옥스퍼드 자유 헌장에서 스티븐 왕으로부터 교회의 자율성에 대한 보증을 얻었으며, 형이 반란을 일으킨 볼드윈 드 레비에르의 거점인 엑서터 성을 포위 공격할 때 참여했다. 엑서터 수비대가 항복한 뒤, 스티븐 왕은 그에게 엑서터 성과 주변 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1138년 12월, 캔터베리 대지교 윌리엄 드 코르베유가 사망했다. 앙리는 자기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기를 원했지만, 스티븐 왕은 테오볼드를 새 대주교로 세웠다. 그 대신 앙리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대주교 급 권위를 지닌 잉글랜드 전역의 교황 특사로 선임되었다. 1139년 6월, 스티븐 왕은 쌍둥이 형제이자 자기 심복인 갈레랑 4세 드 묄룬, 로베르 드 보몽으로부터 솔즈베리 주교 로저와 로저의 조카인 엘리 주교 나이젤, 링컨 주교 알렉산더가 마틸다에게 귀순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여기에 옥스퍼드 거리에서 솔즈베리 주교의 부하들이 연루된 무력 충돌이 벌어지자, 스티븐 왕은 두 사람에게 로저를 체포하고 로저와 그의 가족이 통제하는 성을 접수하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공세를 개시해 디비시스 성을 공략하고 로저가 보유하던 막대한 부를 탈취했다. 앙리는 스티븐 왕을 찾아가서 성직자의 자유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항의하며 로저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스티븐은 이에 따라 로저를 석방했지만, 로저는 얼마 안가 사망했다. 이 일은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분노를 초대했고, 상당수가 당시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스티븐 왕과 대적하던 마틸다 편에 섰다.

이후 스티븐 왕과 마틸다 간의 전쟁이 벌어질 때, 앙리는 중립을 고수하면서 마틸다 세력의 핵심 지도자인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스티븐 왕을 중재하고자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1141년 2월 2일, 스티븐 왕이 링컨 전투에서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패배하고 생포되었다. 마틸다는 그해 3월 3일 윈체스터에서 앙리와 접촉했다. 앙리는 마틸다와 협의한 끝에, 잉글랜드 성직자들을 이끌 권리를 자기에게 주는 대가로 마틸다를 "Domina Anglorum(잉글랜드의 여군주)"로 받들기로 했다. 그는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각지의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을 초빙한 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틸다에게 왕실의 금고를 여는 열쇠를 넘기고 주교와 대수원장들이 그녀에게 복종하도록 했으며, 그녀에게 여전히 대적하는 자들을 파문하기 시작했다.

스티븐 왕에 의해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임되었던 베크의 테오볼드는 윈체스터 대주교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지만, 마틸다에게 즉시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충성 서약을 바꾸기 전에 스티븐 왕과 이야기하기를 고집했다. 이후 수도자들과 함께 브리스톨로 찾아간 그는 감옥에 갇혀 있던 스티븐과 상의했다. 스티븐은 그가 새 여왕에게 충성하는 걸 허가하기로 했고, 테오볼드는 4월에 윈체스터로 가서 윈체스터 대주교와 합류한 뒤 부활절 이후 스티븐을 폐위하고 마틸다를 여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마틸다는 이 자리에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여군주"로 선포되었다. 이후 열린 행사에서 그녀의 추종자들이 충성을 바쳤지만, 상당수 대영주들은 그녀를 따르길 꺼려서 사절을 보내지 않았고, 스티븐 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런던 시민들도 마틸다 여왕에게 복종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겨서 사절을 일부러 늦게 보냈다.

한편, 스티븐 왕의 왕비로서 런던에 군림했던 불로뉴의 마틸다는 남편을 풀어주고 아들 외스타슈가 영지를 물려받는 걸 허락해 준다면, 남편이 잉글랜드 왕위를 완전히 포기하고 순례자로 살도록 설득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틸다 여왕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6월에 런던으로 향했다. 불로뉴의 마틸다는 켄트 지방으로 피신했고, 마틸다 여왕은 윈저 성에 자리잡은 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를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였던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런던 사절단에게 몹시 오만하게 대했고, 높은 세금을 즉시 납부하라고 명령했다. 가뜩이나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런던 시민들은 이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얼마 후,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가 기욤 디프르와 플란데런 용병대, 그리고 켄트 출신 민병대를 소집한 뒤 런던으로 진군해 인근 농촌을 약탈했다. 이에 시민들은 그녀에게 호응하기로 마음먹었고, 당초 마틸다 여왕을 추대하기로 했지만 형제를 풀어주길 거부하고 조카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걸 거부한 것에 불만을 품었던 앙리도 여기에 가세했다. 1141년 6월 24일, 런던 수비대가 봉기를 일으켜 윈저 성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마틸다 여왕은 가까스로 탈출해 옥스퍼드로 피신했다. 그 후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합류한 마틸다 여왕은 자신을 배신한 윈체스터 주교에게 복수하고 다시 한 번 영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기로 마음먹고 윈체스터로 진격했다.

1141년 8월 12일 윈체스터에 도착한 마틸다와 로버트는 윈체스터 시를 장악했고, 앙리는 올베시에 있는 성채로 피신했다. 마틸다는 당장 성채를 포위해서 공략할 수 있었지만, 그러는 대신 앙리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가기를 거부하고 런던으로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불로뉴의 마틸다는 즉시 윈체스터로 가기로 하고, 기욤 디프르와 함께 군대를 일으켰다. 이후 벌어진 윈체스터 전투에서, 마틸다의 군대는 참패했고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생포되었다. 그 해 11월, 양측은 스티븐 왕과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교환했다. 그 후 앙리는 두 진영 모두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스티븐 왕 측은 앙리가 한때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는 걸 동의한 것에 배신감을 느꼈고, 마틸다 측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을 배반했다고 비난했다. 월링포드와 에버게이브니 영주이자 마틸다의 지지자인 브라이언 피츠카운트는 앙리에게 "당신이 변덕스럽게 행동하는 바람에 내전이 연장되었다"라고 강하게 질책하는 편지를 보냈다.

1143년 9월 24일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사망했다. 이리하여 교황 특사로서의 직위를 상실한 그는 이를 갱신하거나 윈체스터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전환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1143년 윌리엄 피츠허버트를 요크 대주교로 확인했지만, 1147년 교황 에우제니오 2세가 윌리엄 피츠허버트를 해임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교황청에서 점점 더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1148년에는 잉글랜드 주교들이 랭스 공의회에 참석하는 것을 막으려 드는 스티븐 왕의 시도의 근원이 되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윈체스터 주교에서 정직될 위협을 받자, 그는 새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자신을 변호하고자 로마로 가야 했다. 그에겐 다행히 해명이 먹히면서 정직을 모면할 수 있었고, 돌아오는 길에 수도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한 클뤼니 수도원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냈다.

1153년 11월 6일, 앙리는 스티븐 왕과 헨리 플랜태저넷 간의 월링포드 조약이 성립되면서 무정부시대가 막을 내리도록 양자를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154년 10월 스티븐 왕이 사망한 뒤, 새 국왕 헨리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앙리는 스티븐 왕 치세 때 햄프셔 등지에 상당한 영지와 요새화된 성을 두었지만, 헨리 2세는 즉위 이후 왕실의 허락 없이 지었다는 이유로 이 요새들을 몰수하거나 파괴했다. 그 후 그는 클뤼니 수도원에 은퇴했고, 수도원에 일정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158년 왕의 총애를 회복해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국왕의 자문 역할을 맡았다. 1162년 토머스 베켓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하고 서품하는 일을 주재했다. 이후 헨리 2세와 토머스 베켓 사이에 성직사 서임권과 관련된 분쟁이 벌어졌을 때, 양자를 중재하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노샘프턴 의회에서 왕실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베켓의 토지를 몰수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해외로 망명한 베켓과 연락을 계속 주고받으면서 그에게 국가와 정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1166년부터 건강이 쇠약해졌고, 말년에는 시력을 잃었다. 1170년 12월 29일 토머스 베켓이 헨리 2세의 기사들에게 살해되자, 그는 죽기 직전에 헨리 2세를 비난하는 선언문을 반포했다. 1171년 8월 8일 또는 8월 9일에 윈체스터에서 사망했고, 윈체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 1092년 이전 ~ 1150, 정신적 문제로 인해 블루아와 샹파뉴 백작 상속권을 박탈당했지만, 술리 영주의 상속녀와 결혼해 술리 영주가 되었다.[2] 1092 ~ 1152년 이전, 블루아와 샹파뉴 백작[3] ? ~ 1120, 제2대 체스터 백작 리처드 다브랑주의 부인. 1120년 화이트쉽 호 침몰 사고 때 남편과 함께 익사했다,[4] 1100 ~ 1159, 엘리 영주 고티에 2세 드 엘리의 부인[5] 1102년 이전 ~ 1147, 베르망두아 및 발루아 백작 라울 1세 드 브라반트와 결혼했지만 1142년 결혼 무효 선고를 받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