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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2:43:02

휴 비고드

성명 휴 비고드
Hugh Bigod
생몰년도 1095년경 ~ 1177년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벨부아 성
사망지 팔레스타인
아버지 로저 비고드
어머니 아델리자 드 토스니
형제 윌리엄, 험프리, 군너, 세실리, 모드
배우자 줄리안 드 베레, 군드레다 드 보몽
자녀 로저, 휴, 윌리엄
직위 초대 노퍽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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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무정부시대마틸다스티븐 왕 양자를 오가며 이득을 챙기려 했다.

2. 생애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한 뒤 노퍽의 보안관을 역임한 로저 비고드와 빌베르 영주 로베르 드 토스니의 딸인 아델리자 드 토스니의 차남이다. 형제로 윌리엄[1], 험프리[2], 군너[3], 세실리[4], 모드[5]가 있었다. 1120년 형 윌리엄이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장자인 윌리엄 애설링이 빠져 죽은 해상 사고로 유명한 백선 침몰 사고에서 목숨을 잃은 뒤, 그는 아버지의 권리와 재산을 물려받고 프램링엄 성을 포함한 이스트 앵글리아의 광범위한 영지를 확보했다. 또한 그는 숙모로부터 상속을 받아 빌베르 성을 포함한 링컨셔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헨리 1세의 총애를 받아 1122년 노리치 성의 성주이자 노리치 청지기로 선임되었다.

1135년 12월 헨리 1세가 사망한 후, 휴는 스티븐 왕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 최초의 귀족 중 한 사람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헨리 1세가 죽자마자 곧바로 런던으로 달려간 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드 코르베일에게 헨리 1세가 죽기 직전에 딸 마틸다가 아니라 스티븐을 상속인으로 지명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스티븐 왕이 자기를 중히 기용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품고, 1136년 스티븐이 병에 걸린 틈을 타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스티븐이 재빨리 반격을 가해 노리치에서 포위되자 항복했다. 스티븐 왕은 이스트 앵글리아의 강력한 영주를 자기 편으로 포섭하고 싶었기에 휴를 용서하기로 하고, 1140년 그에게 노퍽 백작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1141년 2월 2일, 휴는 링컨 전투에서 스티븐 왕의 편에서 싸웠지만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이끄는 강력한 기병대의 위세에 질려 제일ㅇ 먼저 도망친 다섯 백작 중 한 명이 되었고, 스티븐은 생포되었다. 마틸다는 여왕으로 선포된 뒤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런던으로 향했고, 그는 대다수 영주와 함께 마틸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1141년 6월 28일에 런던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마틸다를 쫓아냈고, 1141년 9월 윈체스터 전투에서 마틸다가 패배한 뒤 스티븐 왕이 마틸다 측 장성 로버트와 교환되어 자유의 몸이 되자, 그는 다시 스티븐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이웃 귀족의 습격으로부터 자기 영지를 방어하는 데 전념했다. 1148년 스티븐과 켄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 사이의 갈등이 벌어질 때 대주교를 지지하고 그에게 프램링엄 성을 피신처로 제공했다. 하지만 테오발드는 곧 왕과 화해하고 컨터베리로 돌아갔다. 1150년 대 초, 휴는 다시 마틸다 측과 가까워졌다. 1153년 마틸다의 아들 헨리 플랜태저넷이 잉글랜드에 상륙하자 그의 편으로 넘어갔다. 이에 스티븐 왕이 군대를 일으켜 휴가 자리잡은 입스위치를 포위하자 곧바로 항복했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영지 소유를 인정받았다. 그 후 1153년 11월 스티븐과 헨리 왕자와의 사이에서 월링포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무정부시대는 막을 내렸다.

1154년 스티븐 왕이 사망한 뒤 단독 군주가 된 헨리 2세는 1155년 1월 휴에게 노퍽 백작이라는 칭호와 영지 소유권을 확인하는 헌장을 발행했다. 그러나 헨리 2세가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고 왕의 군대에서 개인적으로 봉사한 대가로 기사 봉토 소유자에게 부과된 세금인 방패금을 더 많이 거두려 하자, 그는 이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의 음모를 간파한 헨리 2세가 1157년 이스트 앵글리아에 쳐들어와서 그를 포위했고, 휴는 어쩔 수 없이 복종했다. 이후 10년간, 그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1169년에 다른 잉글랜드 귀족들과 함께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에게 파문당했다는 것만 전해진다.

1173년, 헨리 2세의 아들들이 프랑스, 스코틀랜드의 군주들과 아키텐 및 잉글랜드-노르망디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헨리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휴는 귀족 반란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해 9월 29일, 주로 플란데런 용병들로 구성된 레스터 백작 로베르 드 보몽의 부대가 서퍽에 상륙한 뒤 프램링엄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휴와 힘을 합쳤다. 반란군은 레스터를 향해 진군했지만, 험프리 드 보훈과 리처드 드 루시가 이끄는 왕실군에 의해 세인트 에드먼즈 북쪽에서 저지되었다. 이어진 전투에서 레스터 백작이 생포되었고, 휴는 플란데런 용병대를 해산하는 걸 동의하며 휴전을 체결했다. 하지만 1174년 초 재차 플란데런 용병대를 고용한 그는 적대 행위를 재건해 노리치를 접령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가 헨리 2세의 군대에게 패배하고 생포되면서, 반군의 세력은 약화했다. 급기야 이스트 앵글리아의 요충지인 헌딩턴이 함락되자, 그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다.

반란을 제압한 헨리 2세는 여기에 참여한 모든 귀족을 사면했고, 휴는 자신의 영지, 성 및 소유권을 유지했다. 3년 후인 1177년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다가 팔레스타인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사후에 장남 로저와 미망인 군드레다 드 보몽간의 상속 재산에 대한 분쟁이 발생했다. 헨리 2세는 이를 중재해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휴 비고드의 영지를 접수하고 노퍽 백작령 영지의 1/3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로저는 1189년 리처드 1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야 헨리 2세에게 빼앗겼던 영지를 돌려받았다.

3. 가족



[1] ? ~ 1120, 노퍽 보안관[2] ? ~ 1113년 이후, 수도자[3] ? ~ 1137년 이전, 라일리 영주 로베르 피츠스웨인과 초혼, 하몬 드 생 클레어와 재혼[4] ? ~ ?, 헨리 1세 시기 레스터셔 순회 판사를 맡은 윌리엄 도비뉴 브리토의 부인[5] ? ~ 1133년 이전, 버킹엄 남작이자 헨리 1세 궁정의 서기인 윌리엄 도비니의 부인. 이들의 후손은 대대로 아룬댁 백작 칭호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