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만 셈벤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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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심사위원대상 | ||||||||||||||||||||||||||||||||||||||||||||||||||||||||||||||||||||||||||||||||||||||||||||||||||||||||
제44회 (1987년) | → | 제45회 (1988년) | → | 제46회 (1989년) | ||||||||||||||||||||||||||||||||||||||||||||||||||||||||||||||||||||||||||||||||||||||||||||||||||||
키엘 그레데 (건배!) | → | 우스만 셈벤, 티에르노 파티 소우 (티아로예 캠프) | → | 오타르 이오셀리아니 (빛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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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우스만 셈벤 Ousmane Sembène | |
출생 | 1923년 1월 1일 |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지긴쇼르 | |
사망 | 2007년 6월 9일 (향년 84세) |
세네갈 다카르 | |
국적 | [[세네갈|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영화감독, 작가, 배우 |
활동 기간 | 1956년-20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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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레르족 출신 세네갈의 영화 감독, 각본가, 배우, 영화 제작자, 작가.[2]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장편 영화를 만들어[3] '아프리카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운 거장 감독으로, 오늘날까지도 세네갈과 아프리카 영화계에서 존경 받고 있다.
2. 생애 및 작품 활동
2.1. 성장기 및 초기 소설가 활동
1923년 당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였던 세네갈의 지긴쇼르에서 월로프어를 사용하는 세레르족 하부 분파인 레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계 쪽 친척들을 통해 세레르족 전통 종교 행사들을 접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세레르 고유의 문화에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신앙심이 깊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상님께 바치는 공물인 우유를 몰래 집어먹기도 했었다고. 어린 시절에는 주로 외할머니가 그를 키워주셨는데, 이 외할머니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성장기에는 프랑스 학교를 다니면서 모국어인 월로프어외에 프랑스어와 아랍어를 익혔고, 열다섯살인 1938년에는 학업을 그만두고 다카르로 이주해 자동차 정비원, 목수, 어부로서 육체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세네갈 식민군에 징집되어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종전 후에는 고국으로 돌아가 철도 파업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4]
1947년에는 다시 프랑스로 가 파리 시트로앵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클로드 맥케이나 자크 루메인 같은 흑인 작가들을 접하게 된다. 이에 영감을 받은 셈벤은 자신도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경험이나 탈식민주의적 세계, 사회현실 비판적 주제가 어우러진 소설들을 집필해 문학적 명성을 얻었으며, 재정적 수익면에서도 그에게 성공을 안겨다 주었다.
2.2. 영화 감독 활동
소설가로서 명성을 쌓은 셈벤은 1962년 소련의 영화 감독 마크 돈스코이의 지도 하에 모스크바 고리키 필름 스튜디오에서 1년 동안 영화 제작을 공부하게 된다.[5] 그러면서 셈벤은 자신이 그동안 써온 문학은 글자를 익힌 소수의 문화 엘리트 계층에게만 어필 할 수 있지만, 영화를 통해 자신이 전하고 싶은 사회적 주제를 담는다면 훨씬 더 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영화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1963년 부터 두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셈벤은 1966년 《흑인 소녀》를 내놓으면서,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장편영화를 감독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세네갈 소녀가 프랑스로 건너가 가정부로 일하는 내용을 담은 이 작품은 겨우 1시간을 넘기는 적은 분량과 소규모로 배급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프랑스 내에서 비평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 작품의 성공으로 탄력을 얻은 셈벤은 자신의 소설을 각색한 1968년작 코미디 영화 《만다비》를 통해 최초의 월로프어 장편 영화를 감독하게 된다.
1971년 프랑스어와 졸라어를 사용해 만든 실화바탕 영화 《군신 에미타이》를 통해 제7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6]경쟁 부문에 초청받아 은게오르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이 작품은 당시 정부로부터 검열 받아 상영을 금지당했으나, 셈벤은 변함없이 자기 창작 활동을 이어나가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한 《할라》로 다시 한번 모스크바 영화제에 초청 받는다.
1977년작 《세도》 역시 연달아 모스크바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으며, 같은 해 그가 영화에 기여한 바를 기념하는 명예상까지 수여받게 된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세네갈 영화 전체가 영 힘을 쓰지 못하면서 셈벤 또한 영화 창작 활동을 이어나나기 어려워졌고, 셈벤의 전성기였던 70년대에 비해 작품 수가 줄어들게 된다. 그러면서도 1988년작 《티아로예 캠프》로 제45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면서 본인의 저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2003년작 《물라데》를 통해 제57회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아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을 수상했고,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한다. [7] 은퇴 후 4년 뒤인 2007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3. 연출 스타일
검은 아프리카 영화의 지도자이자 아버지, 우스만 셈벤은 세네갈과 다른 아프리카계 감독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왔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많은 환호를 받아왔다. 그가 세네갈의 척박한 환경에서 일구어낸 작품들 모두 아프리카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통렬한 발언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스만 셈벤의 영화는 매우 강력한 메시지들을 전달하며 이것들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발언된다. 즉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사회의 악과 싸우면서 ‘예술을 해방하는 것’이다.
ㅡ 씨네21 영화감독사전
우스만 셈벤의 영화는 매우 강력한 메시지들을 전달하며 이것들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발언된다. 즉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사회의 악과 싸우면서 ‘예술을 해방하는 것’이다.
ㅡ 씨네21 영화감독사전
코트디부아르의 데지레 아카레, 니제르의 우마르 간다, 모리타니의 메드 혼도와 함께 1세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영화 감독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1세대 중에서는 가장 인지도가 높은 편.
자신의 영화에 아프리카인들의 토속신앙 등 독특한 전통과 문화를 그려내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데뷔작 《흑인 소녀》는 부득이하게 프랑스어로 제작되었으나 이후 자신의 모국어인 월로프어를 사용한 영화를 제작하게 된 것도 이러한 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만다비》, 《할라》, 《세도》, 《티아로예 캠프》, 《구엘와르》는 모두 월로프어로 제작되었을 정도.
서구권 영화들과 구분되는 전통적인 형식들과 이미지들을 적용하고 사용하는 한편으로 현대 세네갈 사회의 문제와 분쟁에 깊숙하게 개입해 들어가 강력한 메시지와 비판을 담았던 감독으로, 《만다비》는 서민들의 빈곤과 가난을 풍자와 유머로 담아내었고 《군신 에미타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정부에게 억압받았던 아프리카 민중들의 실상과 저항을, 《할라》는 부유한 사업가와 정치 계급권의 자존심과 위선에 대한 조롱을, 《세도》는 세네갈 국민들의 회교개종과 정치적 체계의 열악함을 반영하는등 역사 · 정치 · 문화 · 종교 등 전방위에 대해 비판 의식을 표현했던 감독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메시지들은 언제나 정부당국과 프랑스 식민정부의 비판과 검열에 직면해야만 했으며 《군신 에미타이》는 프랑스 정부에 대한 비판 때문에 첫 공개 이후 5년간 세네갈에서 상영 금지를 당했고, 《세도》는 명목상으로는 셈벤이 심의용 서류 작업을 빠트렸다는 문제로 검열 당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반이슬람적 내용이 정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셈벤은 이런 검열에 대해 검열된 장면을 묘사한 전단지를 극장에 배포함으로서 대항했고, 국제 시장에 수출할 때도 전체 내용에 일절 손대지 않은 채 원본 그대로 상영본을 수출하면서 정부에 저항했다.
이러다보니 프랑스어권 출신이지만 정작 베니스 국제 영화제 등 프랑스어권 바깥에서 대접이 좋았던 편이다. 칸 영화제에서는 생전 초청 받은 게 말년인 2004년 물라데였을 정도로 장 비고상 수상 이후 월로프 영화를 만들면서 프랑스에서는 다소 홀대받았던 편. 이에 이용철(평론가)가 씨네21에 물라데 DVD 발매 기사를 쓰면서 물라데를 고작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한 칸 영화제가 '어리석다'며 비판했을 정도였다.
4. 작품
4.1. 소설
- *표시는 감독이 이후 소설화 한 작품들.
- The Black Docker (Le Docker Noir, 1956, 프랑스어).
- Oh country, my beautiful people! (O Pays, mon beau peuple!, 1957)
- God's Bits of Wood (Les bouts de bois de Dieu, 1960)
- Tribal Scars (Voltaïque, 1962)*
- The Money-Order with White Genesis (Le mandat, précédé de Véhi Ciosane, 1966)*
- 할라 (Xala, 1973)*
4.2. 필모그래피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제작 | 비고 |
1963 | 보롬 사렛 Borom Sarret | ○ | ○ | ○ | 단편 |
1964 | 니아예 Niaye | ○ | ○ | 단편 | |
1966 | 흑인 소녀 La noire de... | ○ | ○ | 장편 데뷔작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출시작 | |
1968 | 만다비 Mandabi | ○ | ○ |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출시작 | |
1970 | 타우 Tauw | ○ | ○ | 단편 | |
1971 | 군신 에미타이 Emitaï | ○ | ○ |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출시작 제7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은게오르기상 수상 | |
1975 | 할라 Xala | ○ | ○ |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출시작 제9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 |
1977 | 세도 Ceddo | ○ | ○ |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출시작 제10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 |
1988 | 티아로예 캠프 Camp de Thiaroye | ○ | ○ | 제45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티에르노 파티 소우와 공동 감독 | |
1992 | 구엘와르 Guelwaar | ○ | ○ | ||
2000 | 파트 카이네 Faat Kiné | ○ | ○ | ○ | |
2003 | 물라데 Moolaadé | ○ | ○ | ○ | 유작 |
5. 기타
- 장 루슈의 비판자였다. 루슈는 시네마 베리테의 창시자로서 흑인과 아프리카를 소재로 다뤄서 아프리카 영화 태동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프랑스 본토의 백인 위주의 시각에서 이를 다뤘기 때문에 셈벤과는 정 반대의 성향을 띌 수 밖에 없었다. 셈벤이 영화 감독이 된 계기 중 하나가 루슈에 대한 비판이었을 정도.
- 상당한 애연가다. 인터넷에 그의 사진을 검색해보면 담배 파이프를 들거나 물고 있지 않은 사진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
- 자신의 영화에서 카메오로 자주 출연하곤 했다.
- 두 번 결혼해 세 명의 자식을 남겼다.
[1] 출처[2] 경력으로만 치면 소설가로서 먼저 활동해 인정을 받았고, 하단의 영화들 중에서도 본인이 쓴 소설을 본인이 영화화한 작품도 있다.[3] 아프리카 대륙 전체로 치면 유럽을 접하고 있는 이집트에서 가장 먼저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집트는 지금도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활발히 영화 제작이 진행되고 있는 국가다.[4] 이때의 경험을 소설로 집필하기도 했다.[5] 이때 같이 영화를 공부한 사람 중에 과들루프 출신의 사라 말도로르가 있었는데, 그녀는 후에 아프리카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삼비장가》를 감독하면서 아프리카 최초로 장편 영화를 만든 흑인 여성 영화 감독이 된다.[6] 현재는 많이 몰락했지만 당시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는 주최국 소련의 영향력을 등에 힘업고 상당한 위상을 자랑했다.[7] 다만 부고 기사에 따르면 차기작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8]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