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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인민공화국 제11대 대인민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 욤자깅 체뎅발 ᠶᠠᠭᠤᠮᠠᠵᠢᠭᠠ ᠶᠢᠨ ᠼᠡᠳᠡᠨᠪᠠᠯ | Юмжаагийн Цэдэнбал | |
이름 | 몽골 문자:ᠶᠠᠭᠤᠮᠠᠵᠢᠭᠠ ᠶᠢᠨ ᠼᠡᠳᠡᠨᠪᠠᠯ 키릴 문자:Юмжаагийн Цэдэнбал 로마자: Yumjaagiin Tsedenbal |
출생 | 1916년 9월 17일 |
대몽골국 옵스 맹[1] 다브스트 소목 (現 몽골 오브스 주 다브스트) | |
사망 | 1991년 4월 20일 (향년 75세)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국적 | [[몽골 인민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묘지 |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묘지 알탄 울기 |
정당 | 몽골 인민혁명당 |
배우자 | 아나스타샤 이바노브나 필라토바 |
재임 기간 | 1952년~1984년 |
복무 | 몽골 인민군 (1936년~1984년) |
최종계급 |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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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인민공화국의 전 총리이자 독재자.1940년-1954년 몽골 인민혁명당 총비서, 1952년 ~ 1974년 몽골의 내각수상, 1974년 ~ 1984년 몽골 대인민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허를러깅 처이발상 사후 그 자리를 승계받았고 32년간 몽골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2. 행적
전성기 당시 모습 | 제복을 차려입은 노년기 모습 | 욤자깅 체뎅발의 동상 |
1916년 가난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후 소련 이르쿠츠크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고등학교와 대학, 대학원까지 마쳤다. 전공은 재정학이었고 이후 1930년대 후반 울란바타르에 돌아와 경제학 교수를 하다가, 건국 초기 새국가를 이끌 인재가 드물었던 몽골 인민공화국 정부에 발탁되어 경제 관료가 되었고, 고속 승진하여 30대에 이미 재정성 부상과 재정상, 그리고 당 총비서를 역임한 뒤 36세였던 1952년에 사망한 허를러깅 처이발상이 역임했던 내각수상직을 승계 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정적들을 "민족주의자" 혹은 "스탈린주의자"로 몰아 은퇴시키고 일인 권력을 확립했다. 하지만 처이발상과는 달리 사법살인이나 피의 숙청은 자제했으며, 그저 지방 도시의 한직으로 추방하는데 그쳤다. 전반적으로 언론과 문화를 억압하는 독재를 펼쳤지만, 그의 치세에서 스탈린식의 공포정치는 없었다.
중국과 소련의 분쟁이 표면화된 상황에서 소련을 옹호하고 중국을 비판해 중국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이 몽골에 원조하던 여러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하지만 2차대전 전까지 소련과만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던 몽골 인민공화국은 동유럽 그의 치하에서 동유럽 공산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후에는, 서방국 및 비동맹국과 대거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영국, 프랑스, 일본과도 수교를 했다.[2]
소련의 입장을 충실히 지지한 결과 소련의 전폭적 지원을 얻게 되었고, 그의 재임기에는 소련의 경제가 좋았기 때문에 이런 원조로 교육시스템을 정비하고, 여러 주택이 건설되었다.
소련의 전폭지원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몽골의 풍부한 지하지원이 사회주의 혈맹 우호가격이라는 헐값으로 소련에 넘어갔고, 몽골민족주의자들에게는 이점을 들어 비판을 받고 있다.
30년간 장기집권하면서 치매 기미가 보이자 소련은 그에게 은퇴를 종용했고 결국 1984년 모스크바 방문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치매 판정을 받았다. 결국 몽골 인민당의 주도로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고 잠빈 바트뭉흐에게 권좌를 넘겨줬다.
원래 중장계급을 가지고 있었으나, 집권당시 몽골군 원수 계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에 요양하다가 1991년 병원에서 주사를 맞다가 쇼크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시신은 몽골에 묻혔는데 이에 대해 소련의 암살[3] 음모론이 도는 등 지금도 그의 죽음을 두고 논란이 많다.
3. 평가
선임자인 처이발상이 수만명을 처형하고 절들을 박살냈지만 체뎅발은 이 보다는 온건한 통치를 했지만 울란바타르에 비밀경찰들을 많이 배치해 감시하는 식의 통제정책을 펼쳤는데 불온한 언행을 보이면 어디론가 끌고가서 조사받는 일은 잦았다(...). 시골에서는 체뎅발과 공산당을 욕해도 대놓고 드러내지만 않으면 별탈이 없었던 데 반해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체뎅발과 인민혁명당을 욕하면 기관에 끌려가 며칠간 곤혹을 치르거나 혹은 직장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체뎅발은 초등부터 대학원까지 소련에서 마쳤기 때문에 일관된 친소파의 면모를 보였다. 몽골 인민공화국 초기 문맹율을 낮추기 위해 지도부는 배우기 어려운 몽골문자를 원래 라틴문자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이를 러시아어에서 쓰이는 키릴문자로 바꾼 것은 체뎅발의 제안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권좌를 잡은 직후인 1950년대에는 친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몽골을 소련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소련은 이런 체뎅발의 제안을 거부했다. 소련 입장에서는 중국과의 완충지대를 위해 중화민국으로부터 몽골이 독립하는 것을 지원한건데, 이렇게 몽골이 소련의 한 공화국이 되면 완중지대가 없어지는 셈이니 당연히 거부할만 했다.
이렇게 친소 정책을 일관적으로 견지했다 보니 몽골에서도 안티들 사이에서는 소련의 꼭두각시를 자처한 매국노, 독재자, 국가 파탄의 원흉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는데 이는 전임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이 무자비한 학살과 독재에도 불구하고 몽골 민족주의자로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국체를 수호했다는 것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도 받는 점과 대비된다. 특히 러시아인 영부인인 아나스타샤 체뎅발이 정치의 전면에 나섰으며, 이 때문에 더욱 욕을 먹는 측면도 있다.
처음에는 중소분쟁 중립을 지켰지만, 이후 대놓고 소련을 지지하고 친소정책을 취했으며 소련군은 대군을 몽골영토에 주둔시켜 중국을 압박했다. 이 댓가로 소련은 몽골에 막대한 원조를 했고, 그리하여 몽골 경제도 좋아졌고 현대화 성과도 나타났다.
사후에 공산정권이 몰락하고, 전직국가원수로서의 지위나 예우가 모두 박탈되지만 2013년 다시 재활되었다. 울란바타르에는 이 때 세워진 그의 기념비가 있다.
4. 여담
- 스탈린의 70세 생일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맨 오른쪽).[4] 스탈린 왼쪽에는 마오쩌둥, 오른쪽에는 발터 울브리히트가 서 있으며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의 인물은 니콜라이 불가닌이고 마오쩌둥 왼쪽의 인물은 그의 러시아어 통역이었던 스저다.
- 공산정권 몰락후, 그는 독재자로 단죄되었으나, 어른의 사정인지[5] 2013년 다시 복권되었고,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울란바토르에 기념물이 건립되기도 했고 기념비,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 오이라트인으로 오이라트계 도르베트족 혈통이다.
- 아내 아나스타시야 이바노브나 필라토바(Анастасия Ивановна Филатова, Anastasia Ivanovna Filatova, 1920년 ~ 2001년 10월 21일)는 러시아인으로 몽골에서 영향력이 큰 정치인이었으며 소련의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꽤나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다만 말년에는 예우가 없어진 데다 무엇보다 초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아 빈곤하게 지냈다고 한다.
[1] аймаг. 한국으로 치면 도(道)에 해당하는 몽골의 행정 단위로, 실제 발음은 '애맥' 에 가깝다.[2] 미국과의 수교는 냉전이 완화된 1987년에야 이루어진다.[3] 뭔가 비밀이 있는데 이를 은폐하려 들었거나 이용가치가 없어져서 암살했다는 설이 있다.[4] 본래는 허를러깅 처이발상이 가는 것이 맞는 편이나, 만주공세 당시 몽골이 장자커우 일대까지 남하하여 내몽골 통일을 시도하는 것을 스탈린이 반발하여 두 지도자가 사실상 결별했기 때문에 체뎅발이 대리로 파견되었다.[5] 여당인 몽골인민당은 체뎅발이 당수를 맡던 몽골인민혁명당을 전신으로 두고 있고, 아무래도 처이발상과 체뎅발에 대한 우호적인 의견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