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2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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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
평가 | 평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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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 요한 23세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2. 상세
재위 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비롯하여 20세기 후반의 가톨릭이 개방적, 탈권위적인 성격의 현대화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 20세기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1] 20세기 초의 비오 10세가 가톨릭 전통주의를 대표한다면, 요한 23세는 개방 및 탈권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요한 바오로 2세와는 달리 외모가 빼어나거나 대중적인 쇼맨십이 있진 않았으나[2], 선함과 소박함, 진솔함을 무기로 인망을 얻고 존경받았다. 교황이 된 뒤에도 권위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소박함과 진솔함을 잊지 않았다. 그 때문에 교황으로서 권위가 없고 교회를 세속화시킨다고 바티칸의 추기경단 일부와 마찰도 컸지만, 교황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았다.
살아 생전 이탈리아인들이 붙여준 별명은 '선하신 교황(Il Papa Buono) 요한'. 그리고 교황이 되기 전이나 후나, 실로 그 별명에 어울리게 산 교황이었다.
3. 교회 쇄신에 매진한 탈권위주의자
현대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이다. 본시 성품이 소탈하고 서민적이었고 개인적인 욕심도 없었지만, 교황으로 당선된 초부터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려고 결심했다. 현대 사회의 발전과는 달리 격리되어 쇠퇴의 위기를 맞고 있던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 위해 노력했다.권위주의적이던 이전의 교황들의 스타일에서 탈피해, 되도록 검소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적인 예로, 교황청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서는 교황에 대해 언급할 때, 말하자면 "존엄하신 분의 입술에서 옥음이 내리셨다" 같은 식으로 표현했는데, 요한 23세는 그냥 "교황이 말했다"라고 쓰라고 지시했다. 이런 공식적인 활동에서뿐만이 아니라 교황청 안에서 인부들과 만날 때에도 시골 신부 같은 온화하고 탈권위적인 태도로 대해서 크게 인망을 얻었다.
추기경들은 교황이 너무 권위가 없다고 싫어하기도 했다. 사회정의에도 관심을 쏟아서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등 관련 교서를 발표했는데, 미국의 우익 신자들이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당시 가톨릭의 분위기에 거스르는 점이 많았다.
또한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 동방정교회와 개신교와의 화해 및 대화에 대한 노력을 기울인 교황이기도 했다. 이미 교황이 되기 전부터 동방정교회와의 대화에 노력한 요한 23세는, 동방정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던 이전의 시각에서 탈피해 갈라진 교회(이교)로 규정했다. 또한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 교회 협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개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개신교 역시 (정교회처럼 이단 상태에서 해제되진 않았지만) '갈라진 형제'로 규정했다.
4. 재치 있고 선하신 교황 요한
요한 23세의 성격을 보여주는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교황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상류층 사람들에게 노골적인 무시와 푸대접을 당하곤 했다. 한 번은 어느 고급 파티에서 누군가 성직자인 그에게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여주며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요??" 하고 물었다. 요한 23세는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요한 23세가 외교관으로 재직하였을 때의 일이다. 한 여자가 파티에서 야한 복장으로 나타나서 론칼리 몬시뇰에게 알은체를 하자, 그 여자에게 사과를 건네며 이렇게 디스를 했다고 한다.자매님!! 이 사과를 드시고 부끄러움을 느끼시지요.
이 에피소드는 구상 시인이 요한 23세에 관해서 쓴 수필에 소개된 것이다.
- 요한 23세는 밤에 잠을 조금 자고 일찍 일어나는 대신 낮잠을 자곤 했다. 요한 23세가 낮잠을 자는데 뭐라고 잠꼬대를 하고 있어서 들어봤더니,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나는 모릅니다. 교황에게 물어보지요.
- 로마시 경비대장이 요한 23세를 알현하러 와서 예법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요한 23세는 경비대장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일어나세요! 당신은 장교지만 나는 사병이었습니다.
요한 23세는 신학생 시절 징집되어 사병으로 1번, 사제 시절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의무병으로 징집되어 복무한 적이 있다. 하지만 대전 중에 군이 복무 중인 사제를 군종 신부로 임명함에 따라 장교로도 임관했기에 실제로는 요한 23세도 장교 출신이었다.
- 요한 23세가 아직 안젤로 추기경이던 시절, 동유럽의 공산주의 정권 밑에서 복역하다 풀려난 추기경이 로마에 찾아왔다. 안젤로는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 같이 기차를 타고 바티칸으로 향하는데, 감옥에 있다 나온 이 추기경은 바깥 구경을 더 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서 두 추기경이 함께 산책하기로 했는데, 바깥 구경을 정신 없이 하는 사이에 기차가 떠날 시간을 놓쳤다. 감옥에 있었던 추기경이 당황하는데, 안젤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괜찮아요, 괜찮아요. 지금 제 뒤에 있는 분 보이죠? 이 분이 기관사입니다. 기차에서 내려올 때 잡아왔죠. 이 분이 있는 한 기차는 떠나지 못합니다.
- 요한 23세는 소탈하면서도 개방적인 인물이라 가톨릭 교회의 오랜 관성을 혁파하려고 했다. 그래서 권위적이며 보수적인 로마인이었던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 타르티니 추기경과 마찰이 잦았다. 교황 집무실이 국무원장실 바로 위에 있던 관계로, 국무원장은 요한 23세에게 화가 나면 "저 위에 계신 분"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 소식은 돌고 돌아 요한 23세의 귀에까지 전해졌고, 국무원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요한 23세가 말을 꺼냈다.저 위에 계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나는 국무원장보다 1층 위에서 일하는 사람일 뿐이고요. 다시는 계급을 혼동해서 부르지 마십시오.
- 요한 23세가 교도소를 방문하였을 때, 수감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여러분들이 제게 오시기 어려울 것 같아서, 제가 여기에 왔습니다.
- 요한 23세가 교황청을 산책할 때였다. 포도원에서 일하던 정원사가 와인을 한 잔 권했다. 요한 23세는 맛을 본 뒤 이렇게 말했다.엔리코, 다른 신부들이 여기에 와서 와인을 맛보지 못하도록 해주겠소? 한 번만 맛을 보면 추기경들이 모두 성체성사에 쓰자고 할 테고, 어쩌면 하루에 네댓 번이나 미사를 드리자고 할지도 모르오.
- 위의 교도소 일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요한 23세는 공장과 양로원 등을 자주 찾아가 평소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이런 그의 적극적인 활동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조니 워커'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4] 요한 23세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그야말로 배꼽 빠지게 웃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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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몬티니 추기경과 교황 |
[1] 그의 직접적인 후임자 바오로 6세를 비롯해서 이후 등장한 교황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요한 23세의 노선을 이어받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요한 23세가 재위 시절에 행했던 개혁 조치들이 없었다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 같은 이들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2] 교황에 선출된 후의 한 대외 행사에서 어느 신자가 "새 교황은 별로 잘생기지도 않고 늙은이네." 하며 실망 섞인 반응을 보이자, 요한 23세는 "미안합니다. 콘클라베는 미인대회가 아니라서요."라고 답했다고 전한다.[3] 어느 서적에서는 "부인이신가 보죠?"라고 응수했다는 서술도 있다.[4] '조니 워커'는 창시자인 존 워커에서 비롯한 명칭이지만, 문자 그대로 옮기면 '걸어다니는 사람 조니(요한)'라는 뜻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