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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3 06:03:45

요도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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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
淀殿
파일:Yodo-dono_cropped.jpg
출생 1567년
오미국 아자이군 오다니성
(현 시가현 나가하마시)
사망 1615년 6월 4일 (향년 48세)
셋쓰국 히가시나리군 오사카 오사카성
(현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오사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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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차차(茶々) 또는 키쿠코(菊子)
신체 170cm
가족 남편 도요토미 히데요시
외삼촌 오다 노부나가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
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
어머니 오이치노카타
동생 죠코인, 스겐인
사돈 도쿠가와 이에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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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4.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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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부나가의 혈통을 잇고,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고, 이에야스가 두려워한 여인"
요도도노를 주인공으로 한 <차차 : 천애의 귀비>라는 일본 사극의 카피.[1]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며 도요토미 츠루마츠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 센히메(千姫)는 그녀의 며느리인 동시에 조카이기도 하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도 조카이다.

2. 생애

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와 어머니 오이치(お市) 사이의 장녀로 소위 '아자이 세 자매'[2] 중 첫째로 이름은 '차차[茶々]' 또는 '키쿠코(菊子)'. 1573년 외숙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나가마사의 거성 오다니 성(小谷城)이 함락될 때 아버지는 자결하고 오빠는 오다군에게 처형을 당했지만 차차는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구출되어 오다 가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오이치가 오다 가문의 유력 가신이던 시바타 카츠이에재혼하면서 키타노쇼 성(北ノ庄城)에 살게 되지만 하시바 히데요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시즈가타케 전투로 키타노쇼 성이 함락되고 카츠이에와 오이치는 자결하면서 두 동생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의 보호를 받는다. 그 후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는데 다른 두 여동생은 차례차례 시집을 보냈는데 차차만은 20살이 지나도록 혼례를 미루더니 1585년 관백에 취임한 히데요시가 1588년 으로 취한 것이다.[4]

요도도노의 어머니 오이치를 사랑했던 히데요시가 어머니를 가장 닮은 그녀를 측실로 맞은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를 닮은 탓인지 히데요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鶴松)를 낳고 요도 성(淀城)을 받았으며 그녀의 호칭 '요도도노'[5]는 여기서 유래한 것. 불행히도 츠루마츠는 3살 때 요절하지만 다시 히로이마루(拾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는다. 히데요리의 생모라는 점을 이용해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가문의 실권을 잡게 된다.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서군과 동군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했다. 이후 도쿠가와 가문과 반목하다 일어난 오사카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아들 히데요리와 함께 할복했다. 카이샤쿠는 모리 카츠나가가 맡았으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존설도 돌았다.

3. 기타

4.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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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의할 점은 히데요시의 건을 제외하면 모두 과장이란 것이다. 먼저 노부나가의 경우 노부나가의 자식도 아닌 누이의 딸, 즉 조카일 뿐이며, 노부나가의 친자식들이 멀쩡히 있고 대를 이었으니 딱히 돋보일 존재는 아니었다. 노부나가와 혈연인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하나. 거기다 히데요시 사후 요도도노는 유일한 패권자인 이에야스에게 농락당하기 일쑤였고, 이에야스가 패권을 기정사실화 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그녀를 두려워할 이유가 더욱 없어진다. 그냥 센코쿠 시대의 3대 영웅들과 크고 작게 연관이 있었던 여인이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하다.[2] 여동생으로 죠코인(오하츠), 스겐인(오고우)이 있다.[茶々] 뒤의 표기는 동어 반복을 나타내는 기호이기 때문에 '차차(茶茶)'라는게 원래 표기일 듯하다.[4] 따지고 보면 어머니가 자결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인 집안 원수와 결혼한 것이다.[5] '요도 성의 마님'이라는 뜻. 일본사에 관심이 있다면 잘 알겠지만 '~도노(どの/殿)'는 일본어에서 명칭/호칭 뒤에 붙여서 남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한국어로 하면 '요도 공' 정도. 마찬가지로 '요도노 카타(淀の方)'라고도 불렸으며 '요도기미(淀君)'라는 호칭으로도 불리는데 '기미(君)'가 유녀의 호칭에 자주 쓰였다는 점에서 그녀를 비하하기 위한 호칭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실제로는 '기미'가 귀부인에게 붙여지는 칭호이기 때문에 유녀를 직접 부를 때 띄워주는 의미에서 불려졌다는게 정답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요도도노'를 '기미'라고 부른 에도 시대에 쓰여진 기록에 음란하고 질투가 많으며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권력 다툼을 했다는 험담이어서 '요도기미'는 비하하는 명칭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에도 시대에 작성된 도쿠가와 가문의 계보인 <도쿠가와 바쿠후 가보(徳川幕府家譜)>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처 아사히히메가 '아사히기미(朝日君)',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실 스겐인이 '오에요기미(於江与君)'라고 적혀 있는걸 보면 '기미'가 특별히 비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용법상으로도 '기미'는 귀부인에게 붙여지는 경칭이다.[6] 大野治長. 요도도노의 유모 아들, 즉 젖형제인데 실제로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7] 다만 불륜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히데요리의 거대한 키는 외가쪽 유전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외할아버지(아자이 나가마사: 170후반-180cm 추정이라는 썰이 있다), 외할머니(오이치: 168cm로 추정), 어머니(챠챠: 165-170cm로 추정)의 기골이 당대는 물론 현대 일본인 기준으로도 모두 장대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빠 후보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이시다 부교의 신장은 유골 조사 결과 156cm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8] 1위는 네네, 2위는 오이치, 3위는 가라샤, 5위는 이이 나오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