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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리는 고대 중국의 진나라(秦)의 장군이다.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활약한 진나라의 명장 왕전의 손자이자 왕분의 아들이다. 시황제 시기에 무성후의 작위를 받았고, 이세황제 시기에 변경 수비의 책임자가 되었다가 다시 반란 진압에 동원되었으나 거록대전에서 항우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2. 생애
왕리는 전국시대 말 진나라의 명장 왕전의 손자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시황제 시기에 무성후(武城侯)의 작위를 받았다.기원전 219년, 시황제가 낭야(琅邪)를 순행할 당시에 아버지인 통무후(通武侯) 왕분 등과 함께 황제를 수행하였다.
기원전 210년, 상군(上郡)에서 북쪽의 변경을 수비하던 장군 몽염의 부장으로 있었으나, 이세황제가 즉위하여 몽염의 직위를 빼앗자 그를 대신하여 변경 수비를 맡았다.[1]
기원전 208년 9월, 왕리는 장한의 명령에 따라 섭간(涉閒)과 함께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조나라의 왕인 조헐과 재상 장이를 거록(鉅鹿)에서 포위하였다.
기원전 207년 10월, 왕리는 동군위(東郡尉)와 함께 유방에게 패하였다.
그해 12월, 초나라의 항우가 거록에 고립된 조나라의 조헐과 장이를 구원하기 위해 장하(漳河)를 건너 왕리를 포위하였다. 거록대전에서 왕리는 항우와 9번을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 보급로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달인 1월 왕리는 항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항우에게 패하여 포로가 된 이후의 왕리의 행적은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왕리의 지위 및 항우의 성격 및 둘의 관계로 추측해보면 포로가 된 왕리는 항우에게 비참하게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3. 일화
왕리가 처음 조나라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거록성을 포위했을 당시에 어떤 사람이 "왕리는 진나라의 명장이다. 이제 장차 강력한 진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새로 세워진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이다."라 하였다. 그러자 다른 객(客)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무릇 장수가 3대를 이어가면 반드시 패하게 된다. 왜 반드시 패하는가? 필시 죽이고 정벌한 사람이 많으므로 그 후손에게 상서롭지 못한 일이 닥치기 때문이다. 지금 왕리가 3대째 장군이다."라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왕리는 정말로 항우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고 말았다.[2] 당대 진의 명장으로 여겨졌던 왕리의 저명성과 인과응보에 빗대어 진의 통일전쟁과 폭정을 비판하는 당시의 부정적 여론을 추측 가능한 고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3]4. 매체에서의 묘사
초한지 등 창작물에서는 보통 항우에게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4][1] 왕리는 이세황제의 파벌, 적어도 이세황제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여긴 것 같다.[2] 물론 논리로 따지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인류역사상 대를 이어 장군 노릇하는 집안은 셀수 없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패망한 것은 아니다. 당장 왕리를 이긴 항우 부터 3대째 장군 집안이다(...).사실 항우도 상서롭지 못한 일을 당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3] 한편으로 3대가 명장이고 3대째에 집안이 망한 진나라 집안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몽씨 가문. 몽오-몽무-몽염까지 이렇게 3대가 진나라에서 장군으로 일하며 천하통일에 공을 세웠으나 진시황 사후 이세황제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몽염은 제거당한다.[4] 왕리의 할아버지 왕전이 항우의 할아버지 항연을 죽인 것 때문에 항우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왕리를 직접 죽이는 걸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