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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7 17:05:41

올리버 R. 에이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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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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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선
연희전문학교 교장 · 연희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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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단법인 이사장
초대

에이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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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연합재단법인 연희대학교 이사장
초대

에이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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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백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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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76><colcolor=#ffffff> 올리버 R. 에이비슨
Oliver R. Avison
파일:올리버 R. 에이비슨.jpg
한국명 어비신(魚丕信)
출생 1860년 6월 30일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 주 웨스트라이딩 재거그린
사망 1956년 8월 29일 (향년 96세)
미국 플로리다 세인트피터즈버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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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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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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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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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신교 (미국 북장로회)[1]
학력 올만테 고등학교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우스터 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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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이자 의료인.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교장 및 세브란스 병원 원장을 겸임하였다.

초창기 한국에서 서구 의학의 보급 및 정착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언더우드와 더불어 초창기 연세대학교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는 '에비슨'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생애

영국 허더즈필드에서 태어났다. 6살 때 가족이 캐나다로 이주했다. 온타리오 대학교와 토론토 대학교에서 약학 및 의학을 전공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교수(강사)직을 제안받았다.

1892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 자금을 모금하고 있던 호러스 언더우드를 캐나다 선교 모임에서 만났고, 언더우드에게 감화된 그는 의료 선교를 위해 한국행을 결심했다. 심지어 감리교 신자였던 그는 언더우드가 소속된 장로교 선교단에 합류하기 위해 장로교로 교단을 바꾸었다.

교직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건너갈 준비를 마친 그는 1893년 가족을 데리고 토론토를 떠났다. 에비슨은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부산에 입국하여 그해 11월 1일부터 제중원에서 의료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자금으로 운영되던 제중원은 운영에 있어 정부의 심한 간섭을 받았다. 심지어 그가 지방 출장 중일 때 조선 정부에서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본인 의사를 들여 진료를 보게 하였다. 에비슨과 언더우드는 제중원을 조선 정부에서 독립시키기로 결심했다.

쉽지 않은 협상 끝에 1894년 제중원의 운영권을 정부로부터 완전히 이관받아 조선 최초의 민영 병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 보조금 없이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고 이에 에비슨은 북미 선교회에 자금 모금을 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899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카네기홀에서 의료 선교에 관한 연설을 했고, 이에 감동한 클리블랜드 부호 세브란스 씨가 한국에서 병원 신축 비용으로 1만불의 거액을 기부하였다. 이 기부액을 가지고 서울역전에 현대식 병원을 신설하였고 세브란스 병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세브란스 씨는 한국을 직접 방원하여 병원을 살펴보고 세브란스의학교 건축을 위한 기금을 또다시 내놓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세브란스의 발전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고, 아울러 북미 선교회에서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지지하며 연희전문학교가 개교하는데도 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에비슨은 중단된 의료 교육을 재개하였고,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병원이 완공되면서 세브란스의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그는 원서를 직접 번역해가며 학생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가 안정화될 무렵, 언더우드는 숙원이었던 종합대학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언제나 언더우드를 롤모델로 여기며 따르던 에비슨은 언더우드를 도와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1915년 천신만고 끝에 연희전문학교가 개교했으나 1년여만인 1916년 언더우드가 타계하고 말았다. 세브란스의학교 교장이었던 에비슨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겸직하였다. 그러나 연희전문학교는 아직 일제로부터 정식 인가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유지를 받들어 반드시 종합대학 설립을 완수해야 한다며 선교사들과 교수진들을 독려했다.

에비슨의 노력으로 마침내 1917년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차례로 일제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사립 구제전문학교였다. 이후 쉴틈도 없이 에비슨은 아직 교사가 없어 YMCA 건물에서 강의하던 연희전문학교 교사 신축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미 언더우드가 신촌 연희궁터를 교지로 점찍어 놓았으나 하필이면 그땅이 총독부 소속이었다. 에비슨은 일제로부터 교지 매입을 허가받는데 성공했다. 애초부터 언더우드와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전을 합병하려고 계획하였기 때문에 에비슨은 교지를 매입할 때 세브란스씨로부터 병원 이전 자금을 추가로 받아 세브란스병원이 이전할 부지까지 함께 매입했다. 비록 일제시대 때는 여러사정으로 불발되었지만 훗날인 1950년대 실제로 세브란스병원이 에비슨이 신촌에 미리 매입한 부지로 이전하게 되었다.

언더우드의 친형이며 타자기 사업으로 거부가 된 존 언더우드 씨가 에비슨이 세브란스와 연희전문 양교 교장 일을 함께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자가용을 제공했고, 에비슨은 오전에 서울역 앞의 세브란스병원으로 출근하여 업무를 본 후에 오후에 신촌의 연희전문학교로 이동하여 업무를 수행했다.

에비슨은 1935년 12월 세브란스의전 교장에서 은퇴했고,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에비슨은 한국에 영구 정착하기 위해 친척들에게 인사하러 간다고 말하고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미국에서 아내가 병을 얻었고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시간이 늘어졌고, 한국전쟁마저 끝난 뒤의 그는 93세의 노인이었던지라 그는 결국 영영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3. 기타



[1] 감리교 (캐나다 감리교회) → 장로교 (북장로회).[2] 언더우드 선교사는 감리교 선교사였던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와 친밀한 사이였다. 또한 언더우드 선교사로 인해 에이비슨 선교사가 감리회에서 장로회로 교파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