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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1 21:07:19

오토타치바나히메

1. 개요2. 배경3. 일본판 서복 전설, 타지마모리(田道間守)가 가지고 온 것4. 관동 일대의 타치바나 무녀 신앙5. 포로가 된 이민족의 여신6. 인간으로서의 오토타치바나히메7. 기타8.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야마토타케루의 아내.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오토'는 弟라는 접두어로 타치바나히메라고 불리기도 한다.

야마토타케루는 기록상 여러 아내가 있었다고 하나, 다른 아내는 시간 배열에 모순이 있거나[1] 제대로 된 기록이 없거나 실존하지 않는 전설상의 인물로 간주되는 반면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야마토타케루가 언급되는 모든 역사서에서 존재가 확인될 뿐만 아니라 다른 야마토타케루의 부인들과는 달리 자신을 모시는 신사가 존재하며 기록상에서의 비중도 다른 부인들보다 월등히 높다. 따라서 학자들은 오토타치바나히메 이외의 부인들은 상당수가 가공인물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대부터 도쿄만을 중심으로 간토에서 야마토타케루와 함께 신으로 숭배되었으며, 간토에서 긴키 야마토 정권의 고사기, 일본서기를 비롯한 공식 기록과는 다른 전설이 많이 내려오는 존재이기도 하다.

2. 배경

만약 실존했고, 사람으로서의 이름이 있었다면 본명은 호즈미 오토타치바나(穂積 弟橘). 현재 일본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성씨인 호즈미 스즈키(穂積鈴木) 씨의 시조이자 오시야마 신사의 주신, 당시 오시야마 신사의 신주이며 이세 지역의 집정관 호즈미 오시야마 스쿠네(穂積忍山宿禰), 혹은 타테오시야마스쿠네(建押山宿禰))의 1남 1녀, 혹은 1남 2녀 중 장녀이다.

호즈미 씨는 야마토 국의 중심지를 본거지로 한 고대 호족으로, 최초의 천황인 진무 덴노의 동국 정벌보다 먼저 야마토에 들어왔다고 하는 니기하야노미코토(邇芸速日命)의 후예이며 니니기노미코토를 필두로 한 천손강림과는 별개 계통인 신의 씨족이다. 진무 덴노 때부터 야마토 정권에서 군사, 제사적인 분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모노노베(物部) 씨와 동족의 관계이며, 이후 해당 성씨에서 우이(宇井) 씨, 호즈미(穂積) 씨, 스즈키(鈴木) 씨로 나뉜다. 헤이안 시대에는 스즈키 씨가 가장 출세하여, 현재에도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스사노오를 주신으로 하는 쿠마노 신사 본관의 신직(神職)을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호즈미 스즈키 씨 족보 中)

오토타치바나히메의 가문인 호즈미의 穂는 이삭 수, 즉 벼나 보리 끝에 열매가 가득 달린 부분을 뜻하며 積란 이를 쌓아 놨다는 뜻이며, 스즈키 역시 현재에 와서 한자가 달라졌을 뿐 같은 의미였다. 이외에도 바다로 향한 그녀가 도달할 토코요노쿠니는 신화 속에서 그 곳으로 건너갔다고 하는 인물들이 모두 곡물신, 풍양신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토코요노쿠니 자체가 곡식령의 고향이라는 설도 있다.[2]

한편 이들은 신라 도래인이라는 가설이 제기되는 씨족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고대 일본은 신라와의 불편한 관계와는 별개로 신라 도래인인 천일창이나 신라 소시모리에서 이즈모로 이주했다는 신화를 가진 스사노오, 이와이의 난까지 긴키 야마토와 별개였던 큐슈 세력과 신라와의 유착관계 등 게이타이 덴노의 현 일본 왕조의 출현 이전까지는 일본에서 신라, 가야 도래인의 존재감이 강했다.[3]

태어난 곳은 미에현 가메야마시 노무라에 위치해있는 오시야마 신사. 야마토타케루의 고모이자 이세 신궁을 지은 야마토히메가 이세 신궁을 짓기 전 반 년 동안 머물렀던 곳에 그대로 신사를 세웠다(후케 신사라는 설도 있다). 이세 신궁은 오시야마 신사 앞에 흐르는 스즈카 강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오시야마 신사는 이세 신궁과 야마토 국의 수도(현재의 나라현)의 갈림길에 위치해있다. 시조인 오시야마 스쿠네 이외에 모시는 신은 스사노오아마테라스, 아마테라스의 아라미타마 등. 현대에는 후케 신사와 합사하여 사루타히코를 주신으로 모신다.

후에 게이코 덴노로부터 동국 정벌을 명 받은 야마토타케루와 혼인을 맺고, 아내로서 아버지 오시야마노 스쿠네와 함께 여행길에 오르나, 하시리미즈에서 야마토타케루 일행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열녀이자 양처, 현재에도 바다의 수호신으로 신앙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존했더라도 오시야마 스쿠네의 친딸은 아니었을 것이란 이야기가 전해진다.

3. 일본판 서복 전설, 타지마모리(田道間守)가 가지고 온 것

일본서기에 따르면, 야마토타케루의 할아버지인 스이닌 덴노는 불로불사를 이룩하고자 4대에 걸쳐 자신을 섬기고 있던 타지마모리에게 토키지쿠노카구노코노미(非時香果)[4]를 구해오라고 명한다. 타지마모리는 토코요노쿠니(常世国)[5]로 향하여 10년에 걸쳐 토키지쿠노카구노코노미와 그 잎을 각각 8개씩 구해서 돌아오지만, 이때는 이미 스이닌 덴노가 죽은 뒤였다. 타지마모리는 가지고 온 토키지쿠노카구노코노미 4개를 천황의 무덤에 심고 나머지는 불태운 뒤, 그 무덤 앞에서 통곡하며 자결한다.

오시야마 신사에 내려오는 이야기에서는 타지마모리가 혼자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토코요노쿠니의 귀족의 딸인 하나타치바나히메(放橘媛)와 결혼하여 그녀와 함께 야마토로 돌아왔고, 타지마모리가 자결했을 때 그녀는 이미 타지마모리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오시야마 스쿠네는 남편을 잃고 홀로 외지에 남겨진 하나타치바나히메를 아내로 들여, 그 아이도 자신의 양녀로 들였다. 아이의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와 오토(작은) 타치바나로 지었다. 즉,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인간의 세상이 아닌 바다(용궁)에서 온 해신의 일족, 그 혼혈이며, 꽃인 어머니가 소중하게 품어온 열매이자 친아버지가 인간의 몸으로 저 세상에서 훔쳐온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4. 관동 일대의 타치바나 무녀 신앙

현재에도 도쿄만을 둘러싼 일대(치바현,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는 타치바나히메를 모시는 신사가 다수 존재하고 있는데, 이 일대에는 신사뿐만 아니라 그녀에게서 유래한 지명 역시 집중되어 있다. 사실상 오토타치바나히메 신앙의 중심지라 볼 수 있다.

하시리미즈의 수난 에피소드에 대하여 고사기 연구가인 모리야 토시히코는 1.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유해 대신 빗이 매장되는데, 고대에 빗은 신성한 것의 표식이며, 그에 따라 무녀의 소지품인 동시에 상징이었다. 2. 해안가 일대에 자생하던 귤은 바다의 신이 깃드는 성스러운 나무로 여겨졌다. 3. 고사기에서, 그녀는 입수할 때 <갈대, 가죽, 비단으로 만든 돗자리 8장을 바다에 깔고 그 위에 앉아 물에 들어갔다> 라고 하는데, 이는 야마사치히코가 용궁에 들어가 바다의 신 와타츠미와 만났을 때 귀빈으로서 받았던 대접과 동일하다. 타치바나히메라는 이름 역시 서다(立つ타츠), 곶(岬, 땅 끝=はな하나) 부인(姫)가 합쳐진 이름으로, 곶이 있는 일대에 신사가 있는 이유이며, 이러한 이유에 따라 그 이름을 "육지의 솟아 오른 절벽에 서서 바다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무녀"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타치바나히메와 바다에 관한 이야기는 현재의 이바라키 현에 해당하는 히타치 국(常陸国) 풍토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과거에는 사가미 국(相摸國)의 아시가라(足柄) 언덕에서 동쪽의 모든 현(縣)을 총칭하여 아즈마 지방(東國)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히타치(常陸)라고 하지 않았으나, 정권으로부터 관리를 파견하여 아즈마 지방을 8개 지방으로 분리하였고, 히타치 지방은 그 중 하나이다. 원래 히타치 지방의 면적은 아주 광대하며, 경계도 아득히 멀고, 토양은 또 대단히 비옥하여 들판 또한 풍요롭다. 바다의 보고, 육지의 창고, 기름이 흐르는 극락이다. 옛날 사람들이 이상향이라고 여기던 토코요노쿠니(常世国)란 이 곳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설명하는 아즈마 지방의 이름은 야마토타케루가 하시리미즈에서 오토타치바나히메를 잃고 아시가라 언덕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아아, 나의 부인이여!(吾妻はや)" 라고 외친 것에서 유래하며, 친아버지 타지마모리가 다녀왔다고 하는 토코요노쿠니로서도 언급이 된다.
야마토타케루 천황이 동쪽 변방 지대를 순찰하려고 이 평야에 묵으셨을 때, 사람들이 ‘이 평야 주변에 모여 있는 사슴이 아주 많다. 사슴의 높게 치켜 올려진 뿔은 시든 갈대의 들판과 같고 내뿜는 기는 아침 안개의 언덕과 닮았다. 또 바다에는 전복이 있어 그 크기가 약 2.4m 정도나 된다. 그 밖에 여러 종류의 진미가 있으며, 잡히는 생선의 수확도 많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천황은 들판으로 행차하고 타치바나(橘) 황후를 바다로 보내어 서로 경쟁했다. 각각 흩어져서 산과 바다의 수확물을 찾았다. 이때 들판에서의 사냥은 하루종일 뛰어다니며 활을 쐈으나 한 마리의 사슴도 잡지 못했다. 그에 비해 바다에서는 잠깐 사이에 물고기를 많이 잡아 각종 진미를 맛볼 수가 있었다. 사냥과 고기잡이를 완전히 끝내고 식사를 바치자, 천황은 시중드는 사람에게, ‘오늘 놀이는, 나와 왕후가 각자 들과 바다로 가서 수확을 경쟁했다. 들 수확은 없었지만, 바다의 맛은 완전하여 모두 풍족하게 질리도록 먹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그 뒤부터 그곳을 아키타(‘질리다’라는 뜻)라 명명했다."(2013년 5월 9일 출간, 강용자 번역[풍토기 中])

히타치 풍토기에 언급되는 야마토타케루와 오토타치바나히메의 해당 설화는 고사기에 기록된 야마사치히코(山幸彦)와 우미사치히코(海幸彦)의 매우 흡사한데, 이에 따라 야마토타케루 천황과 타치바나 황후는 각각 산과 바다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신앙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알아둘 것은 고사기일본서기에서 야마토타케루는 천황이 된 적이 없으며, 오토타치바나히메 역시 일본서기에서는 황자의 후궁인 황비(皇妃)로서도 취급해주지 않는다.[6][7]

5. 포로가 된 이민족의 여신

일본 신화를 읽는 데에 있어서 함께 봐야 하는 고사기, 일본서기, 풍토기(風土記)[8]에 나오는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취급은 각각 다르다.

고사기일본서기의 기록은 기본적인 흐름은 같지만, 고사기에서는 사가미 지방에서 화계를 당하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보다 오토타치바나히메 본인을 더 걱정해줬던 남편에게, 이번에는 자신이 남편을 지키겠노라고 스스로 희생하는 절절한 황후로 그리며, 남편인 야마토타케루는 그런 그녀를 잊지 못하고 해안가를 7일 동안이나 떠돌고, 그러고도 차마 그 곳을 떠나지 못했다 하여 지어진 지명(치바현千葉県 키사라즈시木更津市)이 있을 정도다. 또 그렇게 해안가에 떠밀려온 오토타치바나히메의 빗을 유해 삼아 능묘와 신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9]

반면 일본서기에서는 호즈미 오시야마 스쿠네라는 인간의 딸로 등장하며, 사가미 지방에서의 에피소드도 딱히 언급하지 않는다. 일본서기의 야마토타케루는 고사기에 비해 영웅적인 면모가 강조되기 때문에, "쿠마소 정벌에서의 여장 일화"도, "고모인 야마토히메에게 울면서 하소연한 일화"도 등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야마토 타케루의 "친족 살해 일화"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키도 2m가 넘어간다. 그런 일본서기에서 명확하게 야마토타케루의 실수로 묘사하는 장면이 바로 하시리미즈의 수난이다. 고사기나 오시야마 신사, 타치바나 신사에서조차 "어째서 바다의 신이 분노하였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데, 유독 일본서기에서만 야마토타케루의 폭언에 바다의 신이 분노하였고, 그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황자를 대신하여 "그저 야마토타케루를 따라왔을 뿐인 여자"인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며 스스로 희생한다.

이렇게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하시리미즈의 수난에서의 오토타치바나히메를 다르게 묘사하지만, 이 묘사 뒤에 오토타치바나히메의 1인칭은 천한 첩(賤しい妾)으로 공통되는데, 사실 이 첩이라는 표현, 시대극에서 고귀한 신분의 여성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1인칭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 유래는 [辛(=문신을 새길 때 쓰는 도구, 포로가 노예에게 문신을 새기는 행동) + 女(여자)], 즉 문신이 새겨진 여자 죄인이나 노예, 포로, 혹은 신에게 바쳐진 무녀에서 온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본래라면 야마토 내에서는 힘 있는 호족의 딸인 오토타치바나히메를 이렇게 칭한 건 오토타치바나히메를 토코요노쿠니,[10] 즉 관동 지방의 해양 민족의 여신이며 긴키의 야마토 민족에게 납치당한 존재로도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판본에서든 반드시 언급되는 하시리미즈의 수난은,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여신으로서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풍토기에는 바다 저편의 이상향이라 불린 토코요노쿠니(常世囯)에 오토타치바나히메가 바다를 건너서 가있고, 야마토타케루는 죽지 않고 야마토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가 토코요노쿠니에서 둘이 재회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먹을 것이 풍족하여 사람들이 욕심이 없고 평화로운 세계라 야마토 타케루는 싸우지 않는 친근한 천황으로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밭을 메거나 우물을 파거나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 엔딩이다.

일본서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호즈미 씨는 7세기 경 관동 지방의 행정관을 임명되었는데 당시 관동 지방에는 야마토 정권이 에미시라 부른 아이누의 조상과, 야마토 정권과 별개로 형성된 도래인의 후손 집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민족과 민족이 섞이면서, 한쪽 민족의 신화를 흡수, 격하시키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꿋꿋하게 관동에서 야마토 타케루는 <천황>, 타치바나히메는 <황후>이고 하시리미즈에서 헤어졌지만 히타치 국에 흐르는 강인 스케 강에서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설화는, 자신들의 <산의 타케루 천황과 바다의 타치바나 황비>를 지켜낸 히타치 국의 고집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도쿄 인근에 자기들이 그 신사라고 주장하는 신사는 치바현 소재의 타치바나 신사(橘樹神社), 카나가와현 소재의 아즈마 신사(吾妻神社), 내륙에 있는 이바라키현 소재의 오토타치바나히메 신사(弟橘媛神社)가 있으며, 한편 도쿄에서 한참 먼 아이치현에도 이리미 신사(入海神社)가 있다. 아이치현의 이리미 신사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일화가 전해지는데, 당시에는 전화 같은 것도 없었기에 딸의 죽음을 몰랐던 호즈미 오시야마 스쿠네가, 자신을 쫓아 바다를 거슬러 올라온 딸의 빗을 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통곡했다는 이야기다. 각 신사들의 주장이 전부 사실이라면 오토타치바나히메는 머리에 빗을 최소 4개 꽂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11]

이런 무난한 일화 말고도 특이한 일화가 내려오는 신사도 있다. 이 역시 치바현에 소재한 타마자키 신사(玉崎神社)로, 앞서 언급한 신사들이 "야마토 타케루의 아내를 향한 마음"으로 지은 신사라면 이 신사는 "야마토타케루가 아내를 빼앗긴 분노"로 지은 신사이다. 모시는 신은 진무 덴노의 어머니인 타마요리히메로, 이름 모를 다른 민족의 바다의 신을 자기 신화의 바다의 여신으로 눌러버릴 생각이었던 것 같다.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신사도 있다. 치바현의 소가히메 신사(蘇我比咩神社)로,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입수할 때 그녀의 하녀 다섯 명이 같이 들어갔는데, 그 중 소가 대신(蘇我大臣)의 딸 소가히메(蘇我比咩)만이 살아남았다. 마을 사람들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회복한 그녀는 그대로 수도로 돌아갔고, 야마토 타케루의 죽음을 안 마을 사람들은 그 곳에 야마토 타케루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신사를 세웠다. 훗날 이 이야기를 들은 오진 덴노는 감격하여 해당 지역에 관리로서 소가(蘇我)씨를 파견하였고, 그때부터 그 신사를 소가히메 신사(蘇我比咩神社)라고 불렀다는 전승인데, 지역에 내려오는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이때 구조된 것은 사실 오토타치바나히메이고, 그녀가 "나, 되살아났노라."(我、蘇り)라고 말해서 소가(蘇我)라는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가 씨는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친척인 모노노베 씨와 크게 대립한다.

6. 인간으로서의 오토타치바나히메

그 실체가 어쨌건 고사기일본서기에서의 그녀는 인간이고, 야마토타케루의 동국 정벌의 여정을 함께했다.

야마토 타케루의 전설 속에서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야마토타케루가 이세 신궁에서 고모인 야마토히메로부터 신검과 부싯돌을 받아 동국 정벌을 떠나기 직전. 오시야마 신사에서 그녀와 결혼하고 양아버지인 호즈미 오시야마 스쿠네와 함께 동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은 지역의 신사마다 조금씩 전후가 다른데, 가령 나라현 덴리 시의 이자나기 신사의 경우에는 동국 정벌을 명 받기 전, 즉 쿠마소 정벌과 이즈모 정벌을 마치고 야마토로 돌아오자마자 오토타치바나히메와 결혼하고, 행복한 순간도 잠시, 곧바로 동국 정벌을 명 받고, 신혼부부가 나란히 이세 신궁으로 승전 기원을 하러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확실한 건 대부분의 판본이 서국 정벌 후 ~ 동국 정벌 전으로 잡는다는 것이다.

이민족의 여신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야마토 유력 호족인 호즈미 씨임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부인들의 서열은 그 배경이 되는 집안으로 정해졌다. 기록에서 야마토 타케루의 황후, 즉 정실로 취급되는 후타지이리히메(両道入姫命)는 야마토 타케루의 할아버지인 스이닌 덴노의 딸로, 야마토타케루의 고모에 해당하며 천황의 직계이다. 배경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

그녀가 태어났다고 하는 미에현 소재의 오시야마 신사와 나라현은 그럭저럭 거리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호즈미 집안의 본가도 나라 현에 있었기 때문에 둘이 소꿉친구 비슷한 게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 반대로 그녀가 혼혈이라 기피 받아 자신이 태어난 신사에서 지냈다 하더라도, 고사기의 오우스, 즉 야마토타케루는 형인 오오우스 살해 사건 이후 아버지에게 미움을 사 고모 야마토히메가 있는 이세 신궁에서 머물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실제로 오우스는 쿠마소로 정벌을 떠나기 전, 나라현을 기준으로 쿠마소 지역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이세시 이세 신궁에 들러 야마토히메로부터 옷을 빌렸다고 전해지는데(고사기) 이세 신궁과 오시야마 신사는 해당 신사들이 지어지기 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관계고, 이에 따라 어느 쪽이었던 간에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출산 시기와 자녀의 수는 판본에 따라 다르나, 어느 판본에서나 장남의 이름은 와카타케루로 동일하다.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오토가 연하, 작은 이란 접두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와카타케루의 와카 역시 젊은, 어린, 작은 이란 뜻의 접두어이기 때문. 따라서 야마토 타케루가 사랑했던 아내와의 장남은 와카타케루로 통일되어 있는 편이다. 한편, 이 와카타케루는 정실로 여겨지는 후타지이리히메의 셋째 아들이라 여겨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오토타치바나히메는 이이노마구로히메(飯野真黒比売)라는 딸을 낳으며, 이 딸이 와카타케루와 결혼한다.

고사기나 오시야마 신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에 따르면 야마토 타케루는 서국 정벌 이후 거의 곧바로 동국 정벌을 떠났고, 고사기에서는 이 동국 정벌이 얼마나 걸렸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일본서기에서는 야마토 타케루가 동국 정벌을 떠나서 이부키 산에서 죽을 때까지를 3년으로 잡았기 때문에, 동국 정벌 시작과 함께 결혼했다고 할 경우 시기적으로 둘 사이에 자식은 한 명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일본서기를 기준으로 야마토 타케루의 서국 정벌과 동국 정벌 사이에 13년이란 시간이 있다. <호즈미 스즈키 씨 집안의 가계도>에는 7명의 자식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같은 조상을 둔 모노노베 집안의 주도 하에 제작된 <선대구사본기>에서는 9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묘사나 기록은 없으나, 일본서기에서 그녀와 함께 여정을 떠났던 오시야마 스쿠네가 오와리(尾張) 국(현재의 아이치현 서부)에서 되돌아갔다는 묘사가 있기 때문에, 이쯤에서 와카타케루를 낳고 아기를 험난한 정벌 여정에 함께 데려갈 수는 없으니 아버지에게 맡겼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이 오와리 국이 바로 오토타치바나히메 사후 재혼하는 미야즈히메와 만나는 곳이다.

혹은 쿠사나기의 검의 일화로 유명한 사가미 국(相模国)의 야이즈(焼津, 현 시즈오카현)도 고려해볼 법하다. 야마토 타케루 일행은 야이즈에서 화계를 당하는데, 애초에 그들이 화계를 당하게 되는 이유는 해당 지역의 호족들이 야마토 정권을 따르는 척 그들을 성대히 맞아줬다가, 그곳에서 잠시 체류하게 된 일행에게 "사가미 들판에 도적 떼가 들끓어서 곤란하다. 그들을 토벌해달라."라며 그들을 속였고,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임신으로 움직이기 어려웠던 그들은 성대하게 맞이해준 보답으로 들판으로 향했으나 거기서 화계를 당했다는 이야기다. 이럴 경우, 야마토타케루가 자기 자신보다 임신한 아내를 누구보다 걱정했던 것도, 분노한 나머지 사가미 국의 호족뿐만 아니라 해당 부족 전체를 말살 수준으로 전부 도륙내고 그 시체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다는 일화도 납득이 된다.

장남인 와카타케루에 관한 행적은 고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앞서 오토타치바나히메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을 경우 그 딸로 여겨지는 인물과 결혼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와카타케루가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아들일 경우, 이 딸은 야마토타케루의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어느 부인>의 손녀로 취급된다. 어느 쪽이건 부모를 모두 잃은 두 사람의 자식은 야마토 타케루의 다른 부인에게 길러져, 그 부인의 자식과 결혼하는 모양이다.

문제는 이 와카타케루의 손자가 야마토타케루의 아버지인 게이코 덴노의 아내가 된다는 타임 패러독스가 고사기 내에서 발생한다.[12] 타임 패러독스 외에도, 고사기에서의 야마토타케루와 게이코 덴노의 관계는 최악이기 때문에 굳이 게이코 덴노가 야마토타케루의 증손녀를 구제해줄 이유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현재 의견은 와카타케루의 아버지인 야마토 타케루와 게이코 덴노의 아들 오우스는 다른 사람이라는 설과, 와카타케루의 손녀 카구로히메가 동명이인이다 정도로 좁혀진다.

7. 기타

치바 현 키사라즈 시에 설치된 키미사라즈 타워는 1992년에 지어졌는데, 전망대의 형태는 배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꼭대기에 있는 것은 야마토 타케루와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조각상. 치바 현답게 비교적 사람도 적고 조용하고 밤 되면 주변에 아무 것도 없어서 어둡고 두 조각상 밑으로 라이트 업까지 해준다고 한다. 커플들의 야경 스팟으로도 유명하다고.

8. 대중매체에서

야마토 정권의 영웅 야마토타케루와 그 아내인 오토타치바나히메가 관동 지역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까지 퍼지기 시작한 건 일본의 가부키 작가 치카마츠 몬자에몬(1653~1725)의 가부키 <야마토 타케루 아즈마 열전>부터이다. 고사기를 기반으로 하며 "게이코 덴노는 욕심 많은 오오우스에게 오우스(야마토타케루)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어려서부터 여자애로 키웠다"는 걸로 시작한다고. 젠더적 감수성이 그득한 과감한 어레인지가 들어간 것은 총 5장 중 2장까지로, 3장은 오오우스의 갱생을 다루며 동국 정벌 이야기부터는 원전대로 흘러간다고 한다. 교쿠테이 바킨(1767~1848)도 오토타치바나히메를 소재로 한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메이지 시대 말기 및 다이쇼 시대 초기(1900~1920)는 여성을 위한 잡지나 신문이 늘어나던 시기로 정부 주도 하에 활발한 창작이 이루어졌다. 현재 각지에 남아있는 오토타치바나히메의 조각상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전쟁을 떠나는 용감한 남편을 전쟁터까지 쫓아와서 내조한 현모양처 오토타치바나히메"라는 것은 당시 일본 정부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소재였기에, 요즘 젊은 세대보다 노년 세대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Fate 시리즈의 행적은 오토타치바나히메(Fate 시리즈) 참조.


[1] 고사기에 따르면 야마토타케루와 첫 번째 부인인 후타지이리히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일본의 14대 천황인 주아이 덴노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주아이 덴노가 태어난 시기는 야마토타케루가 사망한 지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뒤이다.[2] 한편 이세 신궁에 후에 합류하는, 호즈미 씨와 원형을 같이하는 모노노베 일족이 원래 모시던 곡물의 여신 토요우케히메는 훗날 우카노미타마(여우신)과 동일시되는데, 이세 신궁은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내궁과 토요우케히메를 모시는 외궁이라는 이중 구조로 되어있다.[3] 이들 외에는 중국계로 기록되었으나 현대 연구에서 신라 도래인임이 밝혀진 하타(秦) 씨족이 있다.[4] <시간을 정하지 않고 향기가 나는 과일> 즉, <언제까지고 향기가 나는 과일>이며, 귤나무는 상록과수로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종.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당시에는 <찰나>를 의미하는 벚나무에 대응하는 <영원>을 뜻하였으며, 거기서 열리는 <황금빛 열매>인 귤은 불로불사의 영약으로 여겨졌다. 감귤류의 한 종류로도 여겨졌다.[5] 신토에서 천상의 신들의 세계인 타카마가하라(高天ヶ原)와 동일시되기도 한 바다 저편의 이상향으로, 우라시마 타로의 용궁성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토코요는 常夜라 쓰기도 하는데, 常世는 '영원한 세상' 즉 죽음이나 두려움이 없는 이상향이라는 뜻이지만 常夜는 항상 밤이 세상으로 밝아질 일 없는 밤 주민들의 세계라는 뜻으로 토코요노쿠니의 양면성을 보여준다.[6] 일본서기에서는 애초부터 오토타치바나히메를 야마토타케루와 결혼한 것으로도 취급하지 않으며 어지간해선 천황의 후비로는 취급해주는데 그녀만큼은 애인으로 취급한다.[7] 사실 고사기의 경우 야마토타케루 일행이 사가미(相模) 지방(쿠사나기의 검 일화의 지역)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들을 부르는 호칭이 "대왕(=천황)"과 "황후(천황의 정실 부인)"로 바뀌지만 해당 파트 이외에는 다시 주어가 야마토타케루로 돌아온다.[8] 나라 시대의 지방 문화 풍토, 지세 등을 각 국(国) 별로 기록 편찬한 것으로 「고풍토기(古風土記)」라고도 한다. 몇 개의 풍토기가 일본 율령 국가 체제 하의 각 국(国)별로 기록된 흔적이 있고, 몇몇 현존하는 풍토기가 있으나 가장 완전에 가까운 형태로 현존하는 것은 이즈모(出雲) 풍토기, 또는 이즈모 국(出雲国) 풍토기이다. 하리마 국 풍토기(播磨国風土記), 히젠 국 풍토기(肥前国風土記), 히타치 국 풍토기(常陸国風土記), 분고 국 풍토기(豊後国風土記)가 일부 손실된 형태로 남아 있다. 그 외 지역의 풍토기는 존재하였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오늘날에는 후세의 서적에 인용되어 있는 당시 풍토기의 내용들로부터 그 형태를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9] 야요이 시대 여성들은 빗을 머리를 빗기 위한 용도 말고도 머리에 꽂아두는 장신구로서도 사용했는데, 야마토타케루는 그녀가 하시리미즈에서 몸을 던진 이후 바닷가에 표착한 빗을 주워 이것을 그녀의 유해 삼아 무덤과 신사를 지었다고 한다.[10] 토코요노쿠니는 바다 너머의 이상향, 저승이라는 뜻이지만 고대 관동 일대를 부를 때 사용되기도 했다.[11] 왜 최소냐면 일본은 한 번 신사들이 너무 많다고 싹 밀고 통폐합한 역사가 있다.[12] 그러니까 야마토 타케루의 증손녀가 야마토 타케루의 아버지의 부인이 된다는 건데 어떻게 봐도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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