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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 쇼헤이/선수 경력/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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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 쇼헤이의 연도별 시즌 일람
프로 이전 2013년 2014년
1. 개요2. 시즌 전3. 페넌트 레이스
3.1. 전반기3.2. 후반기
4. 총평

1. 개요

오타니 쇼헤이의 2013 시즌을 정리한 문서다.

2. 시즌 전

프로 첫 시즌인 2013시즌엔 일단 유격수+투수를 겸업한다고. 이를 일본 미디어에선 이도류(二刀流)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훈 옹도 자칫 둘 다 잃을 수 있다며 비관론을 나타냈다.[1] 다만,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뭘 시작부터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개성 넘치는 선수가 등장했는데 도전해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다 보면 어느 쪽을 선택할지 결정하게 될텐데 그 때 가서 평가해도 늦지 않다."라고 평가했다.[2] 스프링 캠프에서 유격수 훈련을 받았지만, 오릭스 버팔로스로 이적한 외야수 이토이 요시오의 공백과 유격수로서의 체력부담 때문인지 닛폰햄 구단은 그를 우익수로 기용할 방침을 세웠다. 시범경기에선 주로 우익수로 출전해서 10타석 만에 첫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했다. 일단 시즌 초엔 타자로서는 1군에서, 투수로서는 2군에서 뛰었다. 타격은 즉시전력감이지만 투구는 아직 조정할 부분이 많다는 것이 감독의 입장.

3. 페넌트 레이스

3.1. 전반기

2013년 3월 29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원정 개막전에 8번타자이자 우익수로 선발출장했다. 일본 언론에서는 고졸 야수가 프로 첫 시즌 개막전에 선발로 나선것은 재일교포 선수 장훈 이후 54년만의 일이라며 대서특필했다. 또한 이 경기에서 2안타와 1타점을 올리며 좋은 활약을 펼치며 대형 유망주로서의 기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5월 23일엔 드디어 삿포로 돔에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상대로 투수로서 커리어 첫 선발등판 경기를 가졌다. 최고구속 157km/h[3]를 던졌고, 5이닝, 6피안타, 3볼넷, 2삼진으로 승패없이 물러났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단장보좌 겸 국제 스카우트인 스캇 리틀필드도 이 경기를 관전했는데 인상적인 투구라고 평했다. #

5월 26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교류전에선 드디어 타자로서 고교 라이벌인 후지나미 신타로와 맞붙었다. 과연 세간의 이목을 끌며 역사적인 대결이라고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오타니는 이날 5번 우익수로 출장해 후지나미를 상대로 3타수, 2안타에 2루타 2방을 쳐내며 판정승을 거뒀다.

2013년 7월, 퍼시픽 리그 올스타에 선정되면서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일본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참가하였다.

3.2. 후반기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는 주로 타자로 출장시킬 것이라고 구단측이 밝혔다. 현재 상태로서도 타자로서는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투수로서는 아직 다듬을 부분이 많다는 듯.

8월 18일 45년 만에 한 경기에서 한 선수가 야수로 출장했다가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홈경기에서 5번 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 출장한 후, 8회 계투로 등판한 것. 1968년 킨테츠 버팔로즈의 나가부치 요조[4] 이후 처음이며, 최고구속은 156km였다.

4. 총평

2013년 성적은 다소 미묘한데 우선 타자로서는 77경기 출전해 3홈런 20타점 타/출/장이 .238/.284 /.376, OPS가 .660으로 사실 코너 외야수로서 부족해 보이는 성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NPB는 고졸 야수가 1년차에 제대로 성적을 올린 케이스를 찾기가 거의 힘든 리그인 점[5][6]과 야수와 투수를 병행했다는 점을 감안해서 봐야 한다. 당장 고등학교 때 만나는 투수들과 프로에서 만나는 투수들의 수준차는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스타급 선수들도 고졸 1년차에는 2군에서 단련하거나 백업 정도에 그쳤을 뿐이고 오타니가 프로 투수들의 공을 공략할 수 있다는 걸 어느 정도 보여준 것만으로도 사실 대단한 것이었다.

타자로서는 좋은 평가도 있었지만, 투수쪽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다. 13경기 등판해 투구 이닝이 61이닝에 3승 무패 평균자책점은 4.23. 물론 신인으로서 그렇게 나쁜 성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그보다도 경기 내에서 보이는 약점들이 명백했다. 제구 불안으로 인한 볼넷과 위닝샷으로 쓸만한 변화구 부재, 선발로 나왔을 때 경기 중반부로 넘어가 투구수가 늘어나면 갑자기 떨어지는 구위 문제까지 투수로서는 아직 많이 멀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투수 자질로만 놓고 볼 때는 라이벌로 불린 후지나미를 넘어서긴 어렵다는 평이 대다수였고 타자로서의 포텐셜이 더 낫다는 평들이 있었다. 빠른 공 외에는 투수로서 큰 메리트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저 두 개를 동시에 해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오타니 쇼헤이의 자질이 엄청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타자와 투수 두 영역에서 모두 자질과 발전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말하면 비록 1년차이긴 하나 어느 하나 만족스럽진 않다. 정말로 양쪽 모두에서 대성할 만한 자질을 보여주었으나, 일단 첫 해 소위 이도류의 성적과 실험은 썩 성공적이지 않다. 구단과 오타니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성공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많이 늘은 것은 사실. 양쪽 모두에 자질이 뛰어다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본인도 어느 하나 포기를 못하는 것일테지만, 이제 슬슬 투수와 타자 중 자신의 분야를 정해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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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도 그럴 게, 투수와 타자의 운동 메커니즘은 정 반대다. 기본적으로 투수는 수직운동을, 타자는 수평운동을 주로 한다.[2] NHK 스포츠 뉴스에서의 평가. 당시 이도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몇 안 되는 야구인이었으나, 사실 그 근거는 매우 확실하며 결정적으로 오치아이의 이야기는 오타니의 현재와 딱 맞다.[3] 다르빗슈 유가 NPB 시절 던진 가장 빠른 공이 156km/h였다. 오타니는 이를 첫 선발등판에서 뛰어넘은 셈(...)[4] 데뷔 해였던 1968년, 당시 감독이었던 미하라 오사무에 의해 투수, 외야수, 대타 등으로 기용되어 투타 겸업을 하며 한 경기에 야수/투수를 둘다 맡기도 하였으나, 투수로써의 성적이 나쁘자(12경기 등판, 19.1이닝, 1패, 방어율 2.84) 이듬해인 1969년부터 야수(외야수)로 전업하여 그해 타율 .333과 162안타로 최다안타와 수위타자(그것도 NPB 최초의 공동 수위타자였다! 참고로 같이 수상한 인물은 다름아닌 장훈.)를 획득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사사키 쿄스케 등의 신인들의 대두로 입지가 줄어 닛폰햄 파이터즈로 트레이드되었으며 이후 1979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타자로써의 성적은 962안타, 109홈런 409타점 134도루, 타율 .278이다. 여담으로 현역 시절 소문난 주당이었던 점 덕분에 만화 아부상의 주인공 카게우라 야스타케의 모티브가 되기도.[5] 고졸 야수가 규정타석을 채운 경우를 찾으려면 거의 50년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70년대 이후는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빼면 사실상 고졸 1년차에 레귤러급 타격 성적을 낸 신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마쓰이 히데키도 11홈런을 치며 가능성을 보였지만 출장경기수가 57경기에 불과했다. 따라서 신인왕의 경우 대부분 투수나 대졸, 사회인 출신의 야수들이 받게 된다.(다만 NPB도 60타석 밑으로 나온 5년차 이하의 선수는 신인왕 자격이 있기 때문에 고졸 야수가 중고신인 신분으로 신인왕이 되는 경우도 있다. 2년차에 신인왕을 수상한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그 케이스.) 60년대부터 지금까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졸 타자 신인왕은 86년 파리그의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88년 세리그의 타츠나미 카즈요시 겨우 두명이며 그나마 30홈런을 치며 괴물 같이 등장한 기요하라와는 달리 타츠나미의 신인시절 타격성적은 0.223 0.317 0.310 4홈런 22도루에 불과했다. 사실상 리그 우승팀의 주전 유격수를 본 걸 쳐준 것이다. NPB가 고졸 타자 신인에게 얼마나 가혹한 리그인지 알 수 있다.[6] 사실 메이저리그도 신인이 바로 메이저에 올라오는 일이 극히 드물고 대체로 마이너리그 시스템에서 몇 년간 훈련과 조정을 거치기 때문에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NPB는 AAA수준으로 평가받는데, 미국에서도 보통 AAA까지 도달하는 데 빨라야 3~4년은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고졸 1년차 선수가 AAA수준에서 어쨌든 성적을 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