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7 ~ 1613
1. 개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살았던 무장.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두 천하인을 섬겼고, 그들이 모두 죽은 뒤까지 도요토미 히데요리까지 섬겼던 인물. 여러 저서를 남겼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노부나가의 일대기를 담은 신장공기이다.출생지는 오와리국 카스가이 군(尾張国春日井郡)[1]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오사카에서 신장공기를 쓰고 있었고 전후으로 사정을 기록한 세키가하라 전투 병합기(関ヶ原合戦双紙)를 작성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나카이 요시모치(中井宗茂)에게 헌상했다고 한다.
1613년 오사카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자손들은 어려 다이묘의 번사가 되었다가 최종적으로는 가가번(加賀藩)의 마에다(前田)의 번사가 되어서 후손이 이어진다.
2. 이름에 대하여
牛一라는 이름을 어떻게 읽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규이치(ぎゅういち)와 우시카즈(うしかず)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여러 설이 존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동시기의 1차 사료상에 그의 이름을 읽는 법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2][3] 그렇기에 이름을 읽는 법이 명확하지 않고, 사람마다 다른 이름읽기를 사용하는 양태가 나타난 것이다.[4]연구자들의 경우 우시카즈를 쓰거나 아예 독법을 명기하지 않는 방향으로 저술하는 경향을 보이지만[5], 대중매체에서는 규이치라는 표기를 선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노부나가의 닌자,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태합입지전 시리즈에서는 규이치로 등장한다.
한국에 나온 서적들의 경우 상당수가 오타 규이치라는 표기를 취하고 있다. 서울대 일본 중세사 전공 교수인 박수철 교수의 논문과 저술, 문헌학자인 김시덕 박사의 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등에서 규이치라는 표기를 찾을 수 있다.
[1] 현재의 아이치현 나고야시 북구, 愛知県 名古屋市 北区[2] 모가미 요시아키가 누이동생에게 보낸 자필 서장에 스스로의 이름을 요시아키라고 쓴 것이 발견되기 이전 모가미 요시테루, 모가미 요시미츠로 불렸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3] 미요시 나가야스 또한 "長逸"라는 듣도보도 못한 이름을 쓰고 있기에, 대다수의 민간인들은 대충 읽거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처럼 "나가유키"로 읽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참 고맙게도 쿠게 야마시나 도키쓰구가 그의 저서이자 1차 사료인 토키츠구 쿄키(言継卿記)링크는 근대 번각본, 第四권 코마 번호 53번의 우하 산닌슈 서장 인용본에서 대충 볼 수 있다.에 후리가나까지 이용해 ながやす라고 1566년 11월 11일 조에 적어주어, 전문적 내용이 어느정도 퍼진 현재에 와선 나가야스의 표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개명전 이름인 長縁 또한 듣도보도 못한 이름인걸 보면 본인의 취향이 의심되는 수준(...) - 三好長慶(ミネルヴァ) p.171[4] http://www.webchikuma.jp/articles/-/504 노부나가와 신장기 관련 연구를 진행한 가네코 히로시(金子拓)의 규이치에 대한 글.[5] 아라키 - 미요시 - 마츠나가 연구의 최전선에 서는 아마노 다다유키(天野忠幸) 문학 박사와, 조소카베 - 임진왜란의 연구를 활발히 진행한 쓰노 도모아키(津野倫明) 문학 박사가 "우시카즈" 표기의 대표주자. - 三好長慶(ミネルヴァ) p.247/長宗我部元親と四国 p.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