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시 3인중 | ||
미요시 나가야스 | 미요시 소이 | 이와나리 토모미치 |
三好長逸
생몰연대 미상
1. 소개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 통칭은 마고시로(孫四郎), 별명은 나가요리(長縁), 출가 후의 법호는 호쿠사이(北斎)이며, 미요시 산닌슈의 한 사람이다. 미요시 나가노리의 아들이자 미요시 유키나가의 손자이며, 아들로는 미요시 큐스케, 미요시 나가마사가 있다.1549년에 미요시 마사나가와 미요시 마사카츠 부자를 공격하는 에구치 전투에서 예비 부대를 맡았으며, 아리마 시게노리의 요청으로 1554년에 하리마 공격에 참전하여 미노 군을 공략하였다. 1555년 9월에 탄바의 하타노 하루미치를 공격하려고 나섰다가 패하여 교체되었으며, 이후에는 아시카가 요시테루와도 싸웠다.
1558년에는 야마시로 이이오카 성의 성주에 임명되어 야마시로 남부를 통치하였으며, 1562년에 쿠메다 전투에 참전하였지만 하타케야마, 롯가쿠 연합군에게 패하였다. 1564년에 나가요시가 사망하자 다른 산닌슈,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함께 미요시 요시츠구를 당주로 세워 옹립하였으며, 1565년에 요시츠구와 마츠나가 히사미치(松永久通)와 함께 니죠고쇼를 공격해 쇼군인 요시테루를 살해하였다.
이후 새로운 쇼군을 세우지않고 키나이의 정치를 진행하였으나 마츠나가 부자가 이에 반발하여 미요시 가문 내 내전이 발생하였으며 여러 정치적 문제와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새로운 쇼군을 추천하자 결국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새로운 쇼군으로 세우게 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주군인 요시츠구의 의지를 무시하는 정책이었던데다 나가야스가 요시츠구 보다 나가후사와 요시히데와 많이 결탁했기 때문에 요시츠구가 산닌슈의 세력에서 빠져나와 마츠나가 세력으로 망명하는, 가문의 당주가 적대세력에 몸을 투신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어나게 한다.
1567년에 야마토 토다이지에서 히사히데의 공격을 받아 토다이지다이부츠덴 전투가 벌어졌는데, 마츠나가와의 싸움에서 우세한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마츠나가 세력은 여전히 고립되어있는 상황이었고 히사히데와 요시츠구는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노부나가는 이에 응해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내세워 약 6만을 이끌고 상락을 개시하자 숙적이었던 롯카쿠 요시카타와 함께 오다 군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전투하는 족족 패배하게 되자 농성하던 아쿠타가와야마 성에서 도망쳐 아와로 하향하였다.
1569년 1월에 혼코쿠지의 요시아키를 습격했다가 오다 군의 공격으로 격퇴되었으며, 같은 해에 카츠라카와 전투에서 3천을 이끌고 셋츠 이케다 방면에서 원군으로 온 오다 군의 이케다 카츠마사, 호소카와 후지타카, 미요시 요시츠구 등과 카츠라카와에서 싸웠다가 패하면서 아와로 후퇴한다.
1570년에 시코쿠에서 군사를 모아 셋츠 이케다 성에서 모반을 일으켜서 성주인 카츠마사를 추방한 아라키 무라시게에게 호응하면서 셋츠로 진군하여 7월에 노다 성, 후쿠시마 성 전투를 벌였다. 이후에는 혼간지 겐뇨가 반 노부나가 진영에 가담하게 되면서 혼간지 군, 아사이 군, 아사쿠라 군의 연합의 도움을 받아 오다 군을 일시적으로 셋츠, 카와치에서 몰아냈다가 11월에 화의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1571년 5월에 화의가 파기되면서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각을 담당했지만 가문 내의 불화가 일어나면서 쇠퇴하였으며, 1573년에 타케다 신겐의 병사로 노부나가 포위망이 와해되자 오다 군의 공격을 받아 셋츠 나카지마 성에서 패하면서 키나이에서 추방, 그대로 행방불명되었다.
2. 기타
사실상 미요시 가문의 최고 간부임에도 그의 행적을 나타내주는 사료는 얼마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행방불명되어 일생을 끝마친다는, 한때 천하인의 가신이었다곤 생각할수 없는 씁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마츠나가 히사히데와 함께 나가요시를 행정적, 군사적 면에서 크게 도와준 인물이지만 어째선지 크게 유명하지 않으며 인지도, 악명, 만들어진 이미지 등등 모든 면에서 히사히데에게 저참히 밀린다. 심지어 히사히데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에이로쿠의 변의 실제 역사 상의 유력한 주동자는 정황상 이쪽이기까지 한 것치고 정말 낮은 인지도를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