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 오카모토 요시키 岡本吉起|Yoshiki Okamoto | |
이름 | 오카모토 요시키 ([ruby(岡本, ruby=おかもと)] [ruby(吉起, ruby=よしき)], Yoshiki Okamoto) |
출생일 | 1961년 6월 10일 ([age(1961-06-10)]세)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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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게임 개발자이자 프로듀서로 과거 캡콤의 전무이사, 게임 리퍼블릭의 대표이사 등을 지냈고 현재는 퍼즐 앤 드래곤 이후 일본의 국민 게임이라 불리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대성공한 몬스터 스트라이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흔히들 캡콤 출신의 유명 인사를 꼽자면 록맨의 이나후네 케이지, 바이오하자드의 미카미 신지 등을 꼽겠지만, 체육회계 출신 같은 성격의 강한 리더십으로 당시 캡콤의 개성 넘치는 개발자들을 잘 관리하고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오카모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경력 초기에는 그 자신도 개발자로서 캡콤 아케이드의 초기 성공 게임을 다수 감독했고, 이후 프로듀서로서 스트리트 파이터 2와 바이오하자드 등을 탄생시킨 주역이다. 그는 아무것도 없었던 캡콤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바람개비나 PoW같은 아이템을 공통적으로 만들어서 유저들에게 캡콤을 인식시키는데 성공할 정도로 사업 감각도 비상하게 뛰어났다.
2. 약력
- 에히메현 미나미우츠와군 아이난초 (구・잇폰마츠쵸) 출신.
- 창조사 디자인전문학교 졸업
- 전 캡콤 전무이사.
- 전 주식회사 게임리퍼블릭 대표이사장.
- 주식회사 오카키치 대표이사장.
- 공익재단법인 일본게임문화진흥재단[1] 이사장.
3. 코나미 재직 시절
오카오토 요시키의 업계 경력은 코나미에서 시작되었다. 디자인 전문학교를 다녔던 오카모토는 사실 게임에 대해 흥미도 없었고 잘 몰랐다고 한다. 재학중에 '코나미 공업 주식회사'라는 곳에서 졸업 예정자(新卒) 인턴으로 일러스트레이터를 모집하는데 경쟁률이 40:1 정도 된다는 것을 듣고, 스스로를 천재라고 여길 정도로 자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채용에 도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면접 때 게임 개발사라는 얘기를 듣고 '에? 게임회사입니까?' 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런 면접이었지만 합격해 코나미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입사했으나 실제 업무에서는 기획 부서로 돌려져, 처음으로 개발에 참여한 게임은 1982년에 발매된 '타임 파일럿'이었다. 상사가 지시한 기획을 구체화하는 작업이었는데 그 기획이 오카모토 본인의 표현을 빌면 '너무 따분했다'고 한다. 애초에는 운전 교습 게임을 만들라는 지시였으나 그것을 자기 멋대로 360도 회전하는 비행기 게임으로 만들었다. 제작이 한참 진행되어 취소도 할 수 없는 단계에서 상사에게 발각되어 엄청 혼났지만, 완성된 게임은 크게 성공했다. 이후 게임은 만들지 않고 포스터를 그리겠다고 했으나, 이를 눈여겨 본 회사는 계속 기획을 시켰고 그래서 만든 것이 1983년에 발매된 자이러스였는데 이것 역시 성공했다.그러나 오카모토는 코나미 시절엔 분노한 기억밖에 없었는데 업계 평균보다 급여는 조금 높은 편이었고 업무 자체도 혹독했지만 무엇보다 두 번이나 게임을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급여가 그대로인 것이 불만이었다. 물론 쥐꼬리만한 특별 상여가 나오긴 했지만 무엇보다 대우가 그대로라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카모토 입사 후 급여 체계가 변경되며 신입 일률 5510엔이라는 이상한 금액으로 인상되는 것 등 이런 저런 급여에 대한 자잘한 불만들이 누적되며 오카모토는 상사에게 상담을 요청하여 급여를 20만 엔 올려달라는 말을 해보았지만 10만 올려준다는 대답에 '이 회사는 원칙도 뭣도 없구나' '이대로는 성과를 어떻게 올려도 제대로 보상받기는 어렵다'는 생각으로 퇴직을 결심한다.
지금 하는 일은 마치고 퇴직하기로 했는데 그 시기 아리마 토시오(有馬 俊夫)[2]가 사장하고 싸울 때 '오카모토를 데리고 나갈거다' 라고 하는 바람에 아침 조례에서 '오카모토와 아리마는 징계 해고' 라고 먼저 알려왔고 총무과에 항의하러 가서 스스로 나오는 식으로 해달라고 나온다.
징계 면직을 항의하러 가 사직서를 제출하자마자 '출입금지' 상태가 되었는데 여기서 오카모토가 짐을 빼도 되겠냐고 했는데 '네 짐 같은건 없다'며 책만 최소 2~300권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쫓아냈고 오카모토는 여기에 강한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구직하는 동안 코나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자고 게임업계 투신을 결심, 다른 회사들로부터 많은 구인 요청을 받게 된다. 그야말로 업계의 스타가 된 셈. 그러다가 아리마를 통해 이제 막 캡콤을 설립한 츠지모토 켄조와 만날 기회를 가지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개발의 전부를 일임할 테니 우리 회사에 오지 않겠나' 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 때 오카모토는 고작 22세였다. 그러나 캡콤의 게임 개발 체계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아는 곳이 코나미 밖에 없었던 오카모토는 코나미에서 후지나카, 후에 마계촌이나 바이오하자드 등을 만드는 후지와라 등 프로그래머를 빼온다. 이걸로 완전히 출입금지를 먹었다고 한다.
그래도 코나미 시절에 배운 것은 모두 캡콤에서 사용하였으며 캡콤이 체육회계 스타일인 것 역시 코나미 시절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선배들은 야망 같은것이 있어서 매일 열심히 일했고 그걸 보고 후배들도 지지 않기 위해 자주적으로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철야로 잔업을 하다가 밥을 먹고 왔는데 선배가 밥 먹는데 15분이나 걸렸냐며 씹지 않으면 5분이면 끝낸다는 소리를 듣고 오카모토는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블랙회사 같은 소리를 듣겠지만..
4. 캡콤 재직 시절
그리하여 당시 벤처기업이었던 캡콤으로 이직. 사원 번호는 0009였다고 한다. 당시의 캡콤은 아직 제대로 된 개발 부서조차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게임 개발 체계를 갖춰 나가는 것도 오카모토에게 부여된 임무의 하나로, 오카모토는 이때 코나미의 동료들을 데려와 합류시켰는데 이것이 코나미에게는 이른바 '상도덕'을 지키지 않은 일로 취급되어, 현재까지도 오카모토는 코나미에 '출입금지' 상태라고 한다.어쨌든 캡콤으로 이직한 뒤 츠지모토 사장과 담판을 지어 월급을 30만엔 이상 받는데 성공한다.(코나미 시절엔 13만 엔이었다고 한다.) 그는 다음해인 1984년에 지금까지도 업계에 회자되는 명작 게임들인 1942와 손손을 개발하였으며, 다음해인 1985년 12월에는 슈팅게임 건스모크를, 이듬해인 1986년에 역시 슈팅게임인 사이드 암즈를 개발하였다. 오카모토는 도쿄 개발실에서 게임 개발 이외에도 인재 채용 같은 여러 일을 도맡아 했는데, 야스다 아키라는 물론이고 스트리트 파이터2의 니시타니 아키라나 바이오하자드의 미카미 신지를 채용한 것 역시 오카모토다. 심지어 미카미 신지는 채용시험에서 떨어진것을 인사과에 뽑아야 한다며 불합격을 합격으로 만들어 채용시킨 사례.
이후 로스트 월드를 끝으로 게임 개발 일선에서는 물러나고, 게임 프로듀스와 홍보 담당 임원으로 변신. 캡콤의 황금기를 이끌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스트리트 파이터 2와 바이오하자드 등 게임의 역사를 새로 쓴 명작들을 배출해내며, 오카모토 자신도 개발부장, 개발본부장 등을 거쳐 전무이사까지 올라가게 되고 인터뷰 같은 곳에서는 공공연하게 캡콤의 차기 사장이 되겠노라는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참고로 이 시기에 캡콤이 한국 지사인 코코캡콤을 설립하고 한국에 진출하면서, 동시에 세종대학교와 협력하여 한국에서 기획과정 공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대학생들의 수준에 맞춘 내용이기도 했고, 캡콤의 한국 진출에 발맞춰 자사의 홍보 및 이미지 제고 등의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본격적인 게임 기획이라기보다는 상당히 가볍고 라이트한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이미 1997년(캡콤 재직 중) 플래그십 주식회사라는 개발사를 설립했던 적이 있다. 다만 이 회사는 캡콤의 자회사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어, 완전히 독립된 회사라기보다는 캡콤의 독립 개발 스튜디오 같은 성격의 회사였다고 볼 수 있다. 오카모토의 캡콤 퇴사 이후로도 다양한 캡콤 게임을 개발했으나, 2007년 캡콤에 합병되었다.
5. 캡콤 퇴사 이후
2003년 캡콤을 퇴사. 당시에는 상당히 돌발적인 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미카미 신지나 카미야 히데키 등등 이른바 캡콤의 스타 개발자들에 대한 처우 문제와 이적 사태 등이 연이어 벌어진 것을 볼 때 예정된 수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게임 리퍼블릭을 설립하고 PS2로 GENJI, XBOX 360으로 '에브리 파티' 등의 게임을 발매한다. 이후 폭스소울 : 잃어버린 전승, PS3판 GENJI, PSP로 '브레이브 스토리' 등을 제작하지만, 2010년 게임 리퍼블릭의 경영난으로 2011년 17억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채무를 남긴 채 파산해 업계에서 종적을 감춘다.원래 게임 리퍼블릭은 소니가 후원을 하는 형태로 시작된 회사였으나 갑자기 소니가 계약을 중지해 버렸다. 이 때문에 오카모토는 서둘러 후원처를 찾게 되고, 미국의 펀드 투자회사로부터 지원을 받아 게임 개발을 계속하게 되는데, 매달 개발 상황 목표(마일스톤)를 설정하고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 위반이 되어 투자 금액을 전부 반환해야 하는 상당히 빡빡한 계약이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개발 도중 품질이 미달되거나 하면 그 달은 개발비를 받지 못하거나 하는 경우가 생겨,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 갔다. 개발비가 없어서 팀을 유지하기 힘들지만 결과물을 만들어 보여주지 않으면 또 돈이 나오지 않는 악순환의 반복으로, 결과적으로는 투자 회사가 먼저 파산하고, 게임 리퍼블릭도 점점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가 구원 투수로 등장. 다만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는 게임을 만들 개발비는 제공했으나 이미 생겨난 빚은 갚을 길이 없었다. 이때의 상황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고 하는데, 320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월급이 동결, 감봉 혹은 체불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우수한 인재도 빠져나가고, 그런 상태에서 개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오는 게임 품질도 떨어져, '에브리 파티'는 시장의 반응이 상당히 나빴다. 다만 오카모토의 입장에서는, 원래는 허드슨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들고 있던 것을 최종 단계에서 게임 리퍼블릭이 조력으로 참가한 것 뿐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오카모토가 만든 게임'으로 홍보되어 모든 것을 뒤집어쓴 것이 꽤나 억울했다고 한다.
6. 소셜 게임 업계로 전향
승승장구하던 캡콤 시절에서 밑바닥까지 떨어져 지옥을 맛보고 있던 오카모토는 때마침 일본에도 불어온 소셜 모바일 게임 붐을 접하게 된다. '394'라는 모바일 게임 회사의 일을 도와주는 것을 시작으로 모바일 게임에 발을 들여놓았다.(이 때의 인연으로, 오카모토가 설립한 몬스터 스트라이크의 개발/운영사인 데라게가 이후 2017년 394를 합병한다.) 다만 원래 아케이드와 게임기 게임으로부터 개발을 시작해 정점에 올랐던 그였기에, 모바일 게임 업계의 개발 방식과 사업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본인의 말로는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 3년이 걸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당시 일본의 게임 업계에서는, '게임기 게임 만들던 사람은 소셜 게임 업계에서는 절대로 성공적인 게임을 만들 수 없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패러다임의 전환이 어려웠다는 것이며, 다른 유명 개발자 출신들이 소셜 게임 업계에서 제대로 살아남는 선례가 그만큼 없었다는 뜻도 될 것이다.'납득이 가지 않는다'라는 상태로 2년을 보내고, 슬슬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싶어질 무렵에 출시된 것이 퍼즐앤드래곤으로, 이것은 오카모토가 보아도 신선한 충격으로, 이렇게 하면 가능하겠구나 라는 길이 보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태어난 것이 바로 몬스터 스트라이크. 당구를 기반으로 한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게임성에 힘입어 대성공하고 목표로 삼고 있던 퍼즐 앤 드래곤의 앱스토어 매출 순위도, 당초 2년으로 잡고 있던 예상 기간보다도 한 달 앞서 따라잡았다. 일본 내에서 몬스터 스트라이크의 성공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으로, 이를 통해 오카모토 본인도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 현재의 연봉은 캡콤 시대의 수십 배 정도라고 한다. 다만, 위에 설명한 암흑기 시절에 신용불량자로 등록되어 버린 덕분에 신용카드 발급이나 대출이 어렵다는 듯. 요즘도 매년 수입이 10억엔을 넘는데 은행 대출 심사에서 탈락한다고 한다.
몬스터 스트라이크는 최초 일본의 유명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믹시와 손을 잡고, 믹시의 자금과 개발력을 빌려 시작되었다. 현재도 몬스터 스트라이크를 기동하면 표시되는 XFLAG는 믹시의 게임 개발 스튜디오의 명칭이다. 다만 현재는 큰 성공에 힘입어, 오카모토도 자신의 몫을 챙겨 독립하였고 몬스터 스트라이크도 오카모토가 설립한 게임 회사 데라게(株式会社でらゲー)[3]에서 개발 및 운영을 전담하고 있다.
7. 기타
- 1990년대 중반부터 캡콤의 얼굴마담으로 활약하기 시작하고나서 미디어에서 항상 밝고 유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 인터뷰 영상들이 유튜브에 많이 올라와있다.
- 개인 유튜브 채널이 있다. 공적인 채널과 소소한 영상 기록 내용의 부채널. 공적인 채널에서는 (코나미/캡콤 시절의) 게임 개발 이야기라던가 사업 이론 등을 말한다. 몬스터 스트라이크 이전의 게임 개발 이야기는 20~35년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으며, 마츠노 야스미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4]와 파이널 판타지 7의 정가가 틀리는 등 애매한 기억을 확인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 한국을 오가며 강의도 하는 등 나름 가깝게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한 기억은 엉망진창인지 스트리트 파이터 2가 오락실에 가득해서 기뻐하는 듯 하다가 전부 불법 복제 기판이었다고 말하거나 소프트뱅크의 광고에 깔려있는 여러 설정들을 보고 혐한이 하는 이야기들을 확인없이 그대로 하는 등 싫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생각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말이 나오지는 않는 편이다. 스트리트 파이터 2 시절이야 불법 복제가 판을 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는 정규 수입도 어려웠던 시절이었고 CPS2 시절부터는 고봉산업을 통해 정식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 본인이 일본 게임업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 그런지 일본 게임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높으며 타국의 게임은 은근히 까내리는 경향이 있다. 모탈 컴뱃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도 서양쪽에서는 스트리트 파이터의 인기를 능가하는 지역도 있다는 팩트는 인정하면서도, '게임이 척봐도 섬세함이 영 부족한데, 서양 유저들이 섬세함이 영 부족해서 그런 게임을 좋아한다'라며 일본 게임이 인기가 없으면 그건 유저의 수준이 낮아서 그런 거다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는 발언을 종종 한다.
[1] 젊은 게임 개발자들의 창작 지원을 목적으로 한 재단.[2] 자이러스의 프로그래머. 이후 캡콤의 초대 작품인 벌거스와 1985년 작인 마계촌의 프로그래머를 담당했다.[3] 참고로 이 회사는 오카모토 요시키의 친족이 과반 이상의 지분율과 의결권을 가지고 있는 회사다.참고자료(여기서 6페이지를 보면 데라게의 주요 주주 목록이 나온다.)[4] 캡콤이 퀘스트를 인수하려던 시절에 마츠노 야스미가 재직중이었다는 이야기. 마츠노 야스미 본인이 유튜브와 트위터에서 그의 이야기를 반박하였으며, 오카모토는 그의 의견을 듣고 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