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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09:53:56

오사카 아동방치 살해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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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 정황3. 발각 전
3.1. 엄마 '시모무라 사나에(下村早苗)'3.2. 유흥업소에서 일을 시작
4. 발각 후
4.1. 본격적인 방치4.2. 재판4.3. 이후
5. 기타6. 유사 사건7. 외부 링크8. 관련 문서

1. 개요

大阪2児餓死事件(오사카 두 아이 아사사건)

2010년 일본 오사카의 모 맨션에서 당시 3세[1]였던 여자 아이 사쿠라코(桜子)와, 당시 생후 21개월[2]이었던 남자 아이 카에데(楓)를 두고 아버지를 이어 어머니가 집을 나가 아이들이 아사한 사건이다. 일본 영화 <굿바이 마마>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2. 사건 정황

본래 이 사건의 가해자인 어머니 '시모무라'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자주 만들어줬을 정도로 다정다감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시모무라의 외도로 인해 부부는 이혼하게 되고, 아이들은 시모무라가 양육하기로 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가출을 밥먹듯이 했던 시모무라는 두 아이를 키울 능력이 되지 않았고, 나고야에 위치한 캬바쿠라호스티스로 일을 하게 되었다. 시모무라가 없는 사이 아이들이 물을 계속 틀어놓은 채로 지내게 되자, 이사를 독촉받아 결국 2010년 1월, 시모무라는 오사카 남부에 있는 패션헬스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시모무라는 매일 새벽 늦게 들어오기 시작한다. 점점 지쳐가는 삶으로 인해 결국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이기에 이른다.

3. 발각 전

3.1. 엄마 '시모무라 사나에(下村早苗)'

파일:두 아이들의 사진.jpg 파일:시모무라 사나에.jpg
본인 블로그에 올린 두 아이들의 사진 본인이 일하던 해당 유흥업소 홈페이지와 본인 블로그에 올렸던 사진이다.[3]
1987년 출생. 그녀는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하고 재혼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체육교사로, 무명의 고교 럭비팀을 전국대회 출전 15회에 이르는 강팀으로 키운 유능한 코치였으나 가정을 돌보는데는 무관심했고, 결국 계모와 불화를 겪던 그녀는 중학교 시절부터 가출을 반복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탓에 14살이 되던 해 이미 그 지역에서 유명한 불량 청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더이상 딸이 귀찮은 듯 당시 알고 지내던 동료 럭비 감독의 집으로 보내버리는데, 오히려 그쪽 환경이 친부모보다 훨씬 나았던지 그녀는 학교 성적이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럭비팀 매니저 활동도 하는 등 적응을 잘하며 지냈다. 그 시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애정을 느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녀의 인생은 도쿄에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2006년 12월 대학생이었던 남성(이후 대학을 그만두고 취직을 했다.)과 혼인신고를 하고 2007년 20살이 되던 해 5월 첫째 딸 '사쿠라코' 를 출산했으며 그로부터 1년 후 2008년 10월에 둘째 아들 '가에데'가 태어났다.

그녀는 아이를 낳자마자 이렇게 귀여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며 블로그에 글을 올릴 정도로 기뻐했었다. 그러나 둘째가 태어난 지 6개월 후 그녀는 이혼을 하게 된다.

3.2. 유흥업소에서 일을 시작

아이들을 데리고 나고야의 번화가인 한 유흥업소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실적에 따라 급여가 정해지기도 했는데 시급은 당시 3,000엔부터 6,000엔. 여기에 성과급까지 포함하면 월급은 약 27만 엔(대략 270만 원) 이상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물을 계속 틀어놨다는 이유로 퇴거를 당한 그녀는 여기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며 오사카로 이사를 하는데 업소에서 계약해준 멘션이 있는 동네에는 아이를 맡길만한 곳이 없었고 이때부터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본격적인 방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맨션의 주민들의 목격담을 들어보자면 공원에서 아이들이 놀고있을 때 시모무라는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담배만 피우고 있었고 아이들이 엄마를 아무리 불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의 이름을 물어봐도 귀찮은지 대답도 잘 하지 않았다고.

집의 수돗물 사용량도 4월 15일부터 6월 15일까지 두 달 동안 ‘0’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집에서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먹이거나 목욕을 시키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4. 발각 후

4.1. 본격적인 방치

2010년 3월부터 아이들을 집에 며칠씩 남겨놓은 채 외박을 하기도 하였다. 3월 30일, 새벽 2∼3시경에 집에 연결되어 있는 인터폰으로 '엄마, 엄마'하고 엄마를 찾으며 아이들이 운다는 신고를 받은 오사카 어린이 상담센터는 1∼2회 주의를 주었고, 주의를 주고 난 뒤 1개월이 지나자 울음소리가 그쳐 상황이 호전되었다 여겼다. 6월, 23살이던 그녀는 '엄마'이기를 포기하고 두 아이들을 방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 그동안 만난 남자들[4]과 놀면서 호텔 생활을 했다. 해수욕장을 놀러가거나 운동 경기를 보러가는 등.

그리고 한 달이 흐른 뒤인 7월 30일, 악취가 난다는 주민들의 신고에 의해 부패한 두 아이의 시체가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아이들은 쓰레기가 나뒹굴고 과자 부스러기와 햄버거 포장지, 기저귀가 흩어져 있던 방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숨져 있었다.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자 더위에 못이겨 스스로 옷을 벗은 것으로 추정된다. 냉장고에는 마실 것조차 없었다.

부검 결과 두 아이의 위장에선 아무런 내용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거기다 아이들은 평소에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먼저 6월 초순에 아이들을 방치하고 집을 나간 뒤 6월 9일에 돌아와 아이들이 쇠약해진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약간의 음식만 남겨둔 채 재차 집을 나가 같은 달 하순에 집으로 돌아왔으며 아이들이 이미 숨진 것을 확인했다.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며 다시 집을 나가 친구집을 전전했다.

그 후 7월 29일 귀가한 후 다시 자취를 감췄는데 한 달여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유가 집에서 악취가 난다는 소리에 귀가를 한 것이다. 자취를 감춘 후 다른 교제 상대를 만나 호텔에서 7월 30일 체포 될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거기다 시모무라는 친구들에겐 착한 엄마 행세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집에 돌아가 아이들의 시신을 확인한 뒤에도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가 사고로 죽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울먹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7월 중순엔 고향 미에현에서 여러 명의 친구를 만났을 때도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냐”는 물음에, 두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잘 기르고 있다”고 말했다.

4.2. 재판

시모무라는 체포 후 약 5개월간 정신감정을 받아 책임 능력에는 문제가 없다는 결과를 받았다. 이에 살인죄로 기소가 되었다. 하지만 사체 유기 혐의는 불기소처분이 내려졌다. 검찰은 시모무라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날 때 냉장고에 음식이 없었으며 두 아이의 학대가 의심되는 신고를 보아 시모무라에게 살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변호인 측은 "피고가 어린시절 받았던 학대의 영향으로, 공포를 무의식적으로 피하려는 특수한 심리상태에 처해 있었다"라며 아이에 대한 살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변호했다. 2012년 3월 16일, 오사카 지방 법원은 시모무라가 아이에 대한 '미필적 살인'이었음을 인정하고 그녀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하여 시모무라는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시모무라는 사건 당시 "아이들에게 밥을 주거나 목욕을 시키는 일이 귀찮았다.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등의 발언으로 일본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당시 유흥업소 직원이었던 시모무라는 뛰어난 외모에도 관심이 모아져 '욕망을 위해 아이를 죽인 미녀'로 묘사되기도 했다. 재판에서 그녀는 "이렇게 형편없는 엄마지만 지금부터라도 두 아이의 엄마라는 자각을 갖고 평생 두 아이에게 죄를 갚으며 살아가겠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4.3. 이후

이 충격적인 사건은 일본 각지에 알려졌으며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해당 사건의 맨션에 사람들이 굶어 죽어간 아이들을 위해 물이나 음식, 과자를 두고 갔으며 이를 계기로 이웃 주민과의 교류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의 또 다른 문제는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오사카 아동상담센터 담당자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3월부터 5월까지 익명의 여성한테서 신고를 받고 시모무라의 집을 다섯 차례나 방문했다. 하지만 이 담당자는 아이들이 학대받고 있다는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말그대로 형식적인 방문이었던 셈이다. 아동상담센터는 기자회견을 열어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점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며 사과했다.

5. 기타

6. 유사 사건

7. 외부 링크

8. 관련 문서



[1] 2007년 5월생.[2] 2008년 10월생.[3] 인터넷에서 원본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다.[4] 주로 호스트바의 호스트다.[5] 이 사건도 굉장히 충격적이며 아기를 라면 박스 안에다 넣어서 아사시키고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는 게 드러났다. 실제로 오윤성 교수는 "이 자들에게 영아는 물건이기 때문에 라면 상자에 넣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6] 참고로 안협소는 이렇게 사건이 벌어진 장소를 로드뷰 등을 통해서 설명하기 때문에 더 몰입하며 볼 수 있다.[7] 2018년 3월생.[8] 이 사건을 매우 냉정하게 다룬 영화다. 보다보면 고구마 영화라는 것에 누구라도 동의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