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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학부/법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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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광복관

1. 개요2. 내용3. 법학전문대학원 설치 이후

1. 개요

연세대학교법과대학.

2008년 법학전문대학원이 신설되며 이관되었며, 이후 학부 신입생은 받지 않고 있다.

2. 내용

연희전문학교
1915연희전문학교 상과[1]
연희대학교
1950연희대학교 문과대학 법학과
1954연희대학교 정법대학 법학과
연세대학교
1957연세대학교 정법대학 법학과
1980연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2009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1. 태동기~90년대 이전 시기

사진의 건물명은 광복관으로 중앙도서관 뒤, 백양관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법학전문대학원 건물로 쓰이고 있다. 중앙도서관 바로 옆에다 길만 건너면 학생회관이라 연세대학교 모든 단과대학 중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편이다. 문과에서 진학할 수 있는 과 중에서 정문에서 가장 가까워, 덜 걷기 위해 법대를 진학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사실 법대, 법학과는 연대에서 유일하게 고려대에 밀리는 학과였다. 연대 자체에서 법학과는 상경대 보다는 입결이 낮았지만 사회대 대부분의 학과보다는 높았던 과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대와 비교할 때 90년대까지 의대, 공대, 이과대, 상경대, 문과대 등 대부분의 학과 대부분의 전공이 고려대의 동일학과보다 입결이 높았고, 그나마 사회과학대학의 행정학과, 사회학과, 정치외교학과나 문과대의 유럽어문쪽 일부 후발 학과 정도가 고려대와 입결이 비슷했다. 이와중에 법대와 법학과는 연대에서 유일하게 고대 법학과보다 입결이 낮고 입학생 규모도 절반에 불과한 학과로서 학내에서는 '연대속의 고대'라고 불리며 상경대의 위세에 밀려 존재감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법대만 아니었으면 '연대≥고대'가 모든 학과에서 성립할 수 있었지만, 법학과 때문에 저런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며 그냥 고대와 같은 레벨로 엮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는 해당 이후 4년재 대학으로 승격할 때까지 법률과(법학)와 이재학과(경제경영) 두 개의 학과가 존재했는데, 연희전문학교는 상과(경제경영)은 존재하였으나, 법학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해방 후 법대, 법학과만 고려대에 비해 역사와 전통이 밀리게 되었다.

하지만 연희전문학교 시절에도 학과는 없었지만 명백하게 법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다수의 법학 전공 교수들이 상과에 소속되어 법학을 가르쳤다. 주로 상법에 관련된 교수들이 많았지만 상법과 무관한 과목도 개설되었다.

해방 이후 1950년 법학과가 신설되었다. 하지만 학내에서 대우는 좋지 못했다. 일제시대부터 내려져 온 학교인 탓에 단과대의 서열이 중요하게 작용했는데, 문과대학, 상경대학, 의과대학, 이공대학, 신학대학 등에 밀리며 오랫동안 학내에서는 서열이 가장 아래였고, 게다가 유일하게 고려대에 밀리는 학과였던 관계로 학내에서도 시선이 곱지 않은 편이었다. 애초에 법학과를 만들 때도 진통이 있어서 법학과를 만들면 고려대한테 밀릴게 뻔한데 그럴바에는 법학과는 말들지 말자던 의견이 있었을 정도. 하지만 이미 상대에 법학 교수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들을 법학과로 독립시켜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법학과가 생겼지만 입학정원도 소수이고 입결 역시 고려대에 발리고 말았고, 법학과는 여러모로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아웃풋이 떨어지니 학교에서도 대학은 사법고시를 외면하며 고시 지원이 미비하였고, 심지어 다수의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사법고시 준비에 대해 좋지 않은 시각을 심어주기도 했다. 심지어 1960년대에는 백낙준 총장이 직접 중앙도서관에서 불을 끄며 고시생들을 쫓아내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사법고시에서 현격히 낮은 결과로 이어졌고, 이는 입결의 저하로 이어지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런 시기에서도 윤관 대법원장이나 김석수 대법관(이후 국무총리 역임) 등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해 내기도 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고시에 대한 무관심 속에 홀로 독학에 가까운 길을 걸어 가신 소수의 분들 중 일부였다.

197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는데, 서울법대, 고대법대는 물론 후기대학에서 탑급이던 성대법대에도 밀리는건 물론, 후기대학중에서 문과계열에서는 연대법대에게는 턱도 없던 한양법대도 사시합격자 수에서 일시적으로 연대법대를 따라잡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2]대표적으로 한양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최초의 한양법대 출신 법조인인 손영근 전 사법연수원장, 국회의원 추미애 등이 이 당시 한양법대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러한 저투자와 학교법인의 의도적인 무시, 그로인한 우수 인력의 기피가 아울러져 70년대는 연대법대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 1980년대 들어서는 사정이 나아졌나 하면 그건 희망사항일뿐.
전두환 정권이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던 판사들과 사회적 귀족 취급받던 변호사들을 길들이고 국민들의 법적 접근성을 높인다는 홍보성 시혜와 당시 학생운동의 엘리트들을 고시로 분산시키기 위해 사시 인원을 대폭늘리게 됨에도 불구하고 연대법대는 다른 대학에 비해 눈에띄는 성적을 얻지 못한것이 사실이다. 이는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은 입학정원의 문제가 컸다.

2. 80년대의 잠재기

이렇게 되자, 1980년대 초반에는 서울대, 고려대에 이은 저 어디메쯤있는 명문대에 끼어있는 그저 이름뿐인 법대라는 인식이 박히고 만다. 그 결과 입결에서 당장 나타나게 되는데, 후기대학에서 전후기 분할 모집으로 변경되었던 성대법대나 한양법대 출신의 사시 합격자가 비등하고나 앞서게 된 것이다. 당시 서울,고,연법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재수생이나 n수로 인해 더 이상의 학력고사 응시가 어려웠던 학생들은 후기 전형으로 대거 성대와 한대를 지원했고, 사실 이들 중 입시운이 없었을 뿐(더구나 당시는 선지원 후 학력고사 한방에 입시의 당락이 결정되던 시기였다) 실제 실력이나 자질은 합격자들에 비해 뒤쳐지지 않는 뛰어난 이들이 많았고, 이들이 성대나 한대에서 와신상담하며 사시에 조기합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연법도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더이상 법대를 방치하다가는 대학전체의 네임밸류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서서히 투자를 늘이게 된다. 100명도 안되던 입학정원도 160명으로 대폭 늘리고 대표적으로 연대에서 유명무실하던 고시반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이고 우수한 인재들이 연법에 지원하도록 전국 고등학교에 직원들을 투입하고 신문과 방송에도 의도적인 언론플레이(고법과 성법 한법이 예전부터 하던걸 연법이 이제서야 그것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거다.)를 시작하면서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연법의 사시 합격자가 유의미하게 늘어나기 시작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연법이 한법을 제치고 성법과 3위자리를 두고 엎치락 뒤치락했는데 인풋에서 그래도 상위에 있던 연법이 사시합격자 수에서 성법과 경쟁을 하게 된 데는 입학정원의 차이가 크다. 연법은 1990년대 후반까지는 입학정원이 160명으로 서울대 270명, 고려대 290명, 성균관대 300명 등 정원에 비하면 절반 밖에 되지 않았고 심지어 한양대보다도 훨씬 입학생 수가 적었다. 그럼에도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연법의 사시합격자수는 20명 내외로, 2위인 고려대의 절반 정도였는데, 실제 입학생수 대비 합격률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투자와 발전. 또한 시기가 좋았던 것이 법조인력 양성이라는 시류에 따라 사시인원을 늘리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이 파이가 커졌고 이에 따가 연법출신의 사시합격자 또한 늘어나기 시작한다.

3. 90년대 이후의 중흥기

1990년대 들어서 사법고시 정원이 대폭 확대되면서 연세 법학의 사시합격자가 큰 폭으로 증가하였고, 학교 측도 사시생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연세대 학내에서도 중상위권 중 하나의 과에 불과한 수준을 면치 못하던 법학과는 90년대에 큰 폭으로 입결이 상승하여 90년대 초중순부터는 기존의 연대 인문계의 간판인 영문학과, 사회과학대의 신문방송학과를 추월하고 경영학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 무렵부터 법학과에 대한 입시선호도가 높아진 탓도 있지만(흔히 연상고법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고법의 입결은 이미 90년대 초중반부터 연상의 입결을 상당히 앞서고 있었고 서울대 중상위권학과와 비슷한 수준을 보여주었다[3]) 이는 입시에서 메이져 대학의 법학과로서의 재조명받았던 영향과 연대 자체의 전폭적인 지원이 함께 뒷받침된 결과였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초부터 입결이 급상승해 상대와 대등하거나 심지어 커트라인은 상대의 대표과인 경영학과보다도 높았던 해도 종종 나타났다(당시 연대는 매년 입결 최상위학과 2개를 대상으로 원어민이 진행하는 교양영어 수업을 했는데 부동의 경영학과가 매년 한자리를 차지하고, 90년대 초까지는 신방과 등 입결이 높았던 과가 들어가다 93년 이후부터는 법학과가 이를 계속 이어가게 된다).

이 무렵부터는 사시합격자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법학과는 부동의 연세대 최상위권 학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90년대 후반부터는 학교측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입학정원을 다시 250명까지도 대폭 늘리게 되어 본격적으로 서울대와 고려대의 아성에 도전하게 된다(연세대측의 지원의사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당시 상황을 보면 유추가능한데 총 입학정원 규제하에 법학과 정원을 늘리기 위해 간판인 의대와 상대의 입학정원을 줄여 이를 법학과로 배정한 것이었다). 2006년 사회계열로 통합된 이후에도 법학계열은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과였다. 사회계열로 입학한 학생들이 학점이 좋지 않아 원하던 법학과로 가지 못하고 정외과나 신방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법학전문대학원 도입으로 법학과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연법은 늘어난 정원과 지원을 토대로 고법과의 격차를 줄여나가 2000년대 중반부터는 사시합격자 수에서도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고, 이후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재편된 이후부터는 연세로스쿨이 고대로스쿨에 우위를 점하던 초기를 거쳐 지금은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서울대 원탑을 제외한 양강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3. 법학전문대학원 설치 이후

2008년 법학전문대학원 신설로 2008년 신입생 선발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신입생은 받지 않고 있다.[4] 2008학년도까지만 신입생과 복수전공을 받으며, 부전공은 2012년 2월에 졸업하는 학생까지만 유효하다. 한편 2012년 5월 10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설치인가를 받은 대학의 종래 학부의 법과대학의 폐지 시한은 2017년으로 정하여, 그 전까지는 명칭과 조직, 수업 과정이 존치된다. 교과부2008년 로스쿨을 인가하면서 2008학년도까지만 법대 신입생을 받도록 하였다.로스쿨 있는 대학 '법대' 명칭 2017년까지 유지(2012-05-10)

기존 법학과의 정원은 신설된 자유전공으로 배정되었으나, 2014년 자유전공이 폐지되고 과거 법대의 정원은 전부 언더우드국제대학으로 배정되었다[5]. 결국 2018년 이후 현재 학부 과정은 폐지되었으며, 사실상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과 일반대학원만 남게 되었다.


[1] 유억겸, 고병국, 정광현 등이 법학통론, 민법, 상법 등을 강의[2] 한양대학교의 설립자 김연준이 윤필용사건으로 인해 유치장에서 사회적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하급 경찰들의 의도적인 핍박을 받고, 심지어 전경들마저도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는지 밥을 배식할때 식판을 김연준 앞에 던지고 밤에 잠들려고 하면 진압봉으로 철창을 치면서 지나가 잠을 이루게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김연준을 괴롭힌다. 이를 제지하라고 임명한 변호사도 권력에 눈치가 보였는지 사직하는 등, 심신을 다해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에 법조계에서 자신의 뒷배가 되어줄 법대인력이 너무나도 부족함을 절절히 깨달은 김연준이 고시반에 대한 지원을 파격적으로 늘이고 법대장학생이라 하여 입학금, 등록금은 물론 고시반내에 숙소와 한달에 일정정도의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전국의 수재들을 한양법대에 모으게 된다.[3] 1993년 마지막 학력고사 기준으로 서울법대의 컷은 326점, 경영학과 323점, 사회학과 319점, 사범계열 313점 내외였고, 고법 319점, 연법 314점, 연대 경영 313점이었다. 당시 고법을 제외한 모든 고려대 학과의 컷은 312점 이하였다. 당시 각 대학 법학과와 고법이 어떠한 위상을 가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입결이다.[4] 다만 2009년 1학기에 소속변경 신청을 받은 적이 있다.[5] 언더우드국제대학은 자유전공의 정원과 타 학과 정원의 3%씩을 갹출한 정원을 합한 인원을 배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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