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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미래캠퍼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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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1959년 원주기독연합병원 시기1.2. 1978년 개교 시기1.3. 1984년 매지캠퍼스 이전과 고난기1.4. 1992년 신촌 상경 투쟁1.5. 2007년 레지덴셜 칼리지(Residential College)도입1.6. 2018년 역량강화대학 선정 1.7. 2019년 미래캠퍼스의 탄생

1. 개요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의 역사
1913~1933 1959~1978 1978~1980 1981~1984 1984~2019 2019~현재
스웨디쉬
감리교병원
원주기독
연합병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원주분교
연세대학교
원주대학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의 역사를 설명한 문서.

1977년 12월 의과대학이 원주분교를 설립하고, 1981년 원주분교가 원주대학으로 승격하면서 10개 학과로[1]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의학과를 필두로 설립되었던 분교의 학과들은 당시 본교의 관련 학과 교수의 지원과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때까지는 원주대학 자체가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취급되었는데, 점차 학과가 많아지면서 원주대학이 여러 단과대학들로 다시 분리되고 이 단과대학의 집합을 이르러 '원주캠퍼스'로 부르게 되었다.

2019년에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1. 1959년 원주기독연합병원 시기

1910년 미국 북감리교회가 한국 선교 시작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앤더슨(A. G. Anderson)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여 전국 리교 병원(서미감병원) 설립을 추진한 것이 미래캠퍼스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13년에 완공된 이 병원은 2층 규모에 17개 병상을 갖추었으며 당시 강원 영서, 남부 지역의 유일한 종합병원으로서 의료 사업 및 복음 전파의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앤더슨 선교사가 평양으로 떠난 이후 1925년부터 맥마니스(S. E. McMains) 선교사가 뒤를 이어 병원 운영을 맡게 되었으나, 서미감 병원은 선교부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1933년에 문을 닫게 된다.
파일:external/photohs.co.kr/PIC139.jpg
6.25 이후 복원한 서미감 병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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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감 병원 복원 기념비 제막식

6.25전쟁 발발 이후 북감리교회가 폐업 상태인 서미감교회를 재건하고자 했는데, 1954년 머레이(C. W. Judy) 선교사의 주도로 미국 감리교회 구제위원회 및 선교부, 국제연합 한국부흥회(UNKRA)의 원조를 받는 데 성공한다.

이에 1959년 10월 원주기독연합병원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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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원주기독병원의 모습

원주기독연합병원은 이후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단층 건물이 아닌 복층 건물로 변화한다.

원주기독연합병원은 1973년 '원주기독병원'으로 개칭 후
1976년 연세대학교에 합병된다.

1.2. 1978년 개교 시기

연세대학교는 원주기독병원을 합병하면서 현재 일산캠퍼스의 위치에 의과대학 분교를 짓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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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의과대학(의예과) 분교의 모습

당시는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에 맞추어 정부가 분교 설립을 독려하던 시기였다.

인구 폭증으로 인해 대학 정원에 비해 수험생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졌으나, 섣불리 서울권 대학의 정원을 늘리면 수도권 과밀현상이 심화될 우려가 있었으므로
대신 분교 설립을 통해 인구분산과 정원확충을 동시에 충족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로 인해 당시 유명 서울권 대학들은 지방에 분교를 설립하여 정부의 의도대로 비수도권 지역으로 상위권 학생들을 분산시키고 입학 정원을 늘려서
학교재정을 확충하려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고, 연세대학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 측에서는 지방분교 후보지로 경상남도 창원, 경기도 오산, 대전 대덕단지를 고려하고 있었으며[2], 이 중 창원, 오산은 위치적 특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대덕단지에 분교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던 중 원주기독병원[3] 측에서 강원도 원주에 의과대학 분교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면서 1978년 의과대학 원주분교가 설립된다[4].

의과대학 원주분교는 의학과 80명과 보건학과 8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원래 보건학과는 보건대학원 산하에 신설될 예정이었으나
당시 강원도의 척박한 의료현실로 인한 지역민의 요구와 정부의 지방분산 정책에 의해 원주분교에 설치된 것이었다.

이후 다른 대학들이 연세대학교를 따라서 지방 분교를 설치하며 분교 확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1980년, 교수진과 동문의 찬동에 따라 지역 수험생과 우수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당대 신촌캠퍼스에서 유력한 전공으로 꼽히던 영문, 경영, 경제, 수학, 생물학 등의 학과들을 포함한 총 7개 학과를 원주분교에 설치하면서 의과대학 중심의 원주분교는 '원주대학'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파일:attachment/maeji_gaegyo.jpg
연세대학교 원주대학 기본계획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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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0.08. 연세대학교 원주대학 건설 기공식 장면

연세대학교 재단에서는 '원주대학' 구축을 위해 1982년부터 원성군 매지리[5]의 약 57만평 부지에 120억원[6]을 투자하였다.

이를 통해 원주대학을 본교 수준의 종합대학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학교와 당시 안세희 총장의 목표였으나, 전두환 정권이 1981년 실시한 졸업정원제 때문에 신촌캠퍼스 정원이 2.5배 늘어나먼서 원주대학에 투자될 예정이었던 자금이 어쩔 수 없이 신촌캠퍼스로 넘어가버리게 된다.

초창기 발전의 기회를 잃게 된 원주대학은 기숙사, 운동장, 심지어 구내식당조차 없이 한동안 기본적인 대학의 모습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로 운영되게 된다[7].

1.3. 1984년 매지캠퍼스 이전과 고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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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08.16. 강의동 및 기숙사 신축 봉헌식 장면

이런 이유로 당시 학생들은 새로운 캠퍼스로의 이전을 요구하였고, 학교 당국은 이를 수용하여 1984년에 의예과, 보건학과를 제외한 학과들이 매지캠퍼스로 이전되었다.

이어 1987년에 원주부총장 직제 및 독자적 총학생회가 신설됨에 따라 매지캠퍼스와 일산캠퍼스를 아우르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의 기본적인 면모가 드디어 갖춰지게 됐다.

하지만 캠퍼스를 이전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학생들의 기대는 환상에 불과했다. 이에 원주캠퍼스 학생들은 교육부에 분교 정책 철폐를 요구하는 동시에 ‘하나의 연세’를 위해 서울, 원주에 각각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을 두는 방식의 학생회 구성을 제안하였으나 부결되었다.

이후 일련의 과정을 거쳐 원주캠퍼스는 독자적으로 총학생회를 세우게 되었으며, 1986년부터는 연세춘추와 별도로 ‘연세학보’를 발간하게 된다[8].

그러나 학생자치기구의 발전과는 별개로 캠퍼스의 인프라는 여전히 열악한 상태였다. 캠퍼스 내 도로는 여전히 비포장된 진흙길이었기 때문에 비가 올때마다 진흙투성이가 되기 일수였다. 게다가 대학의 기본적인 시설인 학생회관이나 도서관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학생들은 학습 환경 개선을 위한 수업 거부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러한 수업 거부 투쟁으로 인해 1988년, 학생회관이 건립되었으나 대학의 나머지 기초 시설에 해당하는 도서관과 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의 건설은 여전히 요원한 상태였다.

이때 학교 당국에서는 학생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원주캠퍼스를 현 덕소농장 부지[9]로 이전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10]

위와 같은 간단하지 않은 역사 때문에 현재 연세대학교의 덕소농장은 미래캠퍼스의 소유로 남아있게 된다.

1.4. 1992년 신촌 상경 투쟁

1992년은 원주캠퍼스에게 있어서 일대의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재학생 상당수에 해당하는 학생 1,300명이 신촌으로의 총상경투쟁을 진행하여, 교육환경 개선[11]을 위한 23개 요구사항을 학교에 제시하였다.

학교는 학생들이 요구한 23개의 조항 대부분을 수용하였으며 이때 사건을 계기로 원주캠퍼스의 중앙도서관과 사회관[12]이 건립된다.

이후 1992년, 송자 총장의 취임과 함께 연세대학교와 원주캠퍼스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 시작되었고,
송자 총장의 주도 하에 원주캠퍼스의 개선을 위한 6가지 안을 도출하게 되는데, 아래와 같다.
1. 특성화안
2. 완전 통폐합안
3. 교양 학부안
4. 캠퍼스 재조정안
5. 동일 재단 타 명칭안
6. 현실 발전 안저
1번 안은 보건과 의료 분야 특성화에 더해 AI 보건 의료 빅데이터 특성화 추진으로 현재 진행형인 상태이고, 2번 안은 현재 시점에서 이원화 추진으로 보면 된다. 3번 안은 현재 인천 송도의 국제캠퍼스처럼 원주캠퍼스 부지를 아예 연세대학교 교양수업 전용 부지로 만들어 현 국제캠퍼스와 같은 기능을 하게 만드는 안이었다.

4번 안은 신촌캠퍼스의 학과를 원주캠퍼스로 더 이전하거나, 혹은 원주캠퍼스의 학과를 다시 서울캠퍼스로 이전하여 학과를 통폐합하는 안이었고, 5번 안은 연세대학교라는 동일 재단 아래 원주캠퍼스를 다른 이름의 대학으로 개칭하는 안이었는데,

즉, 명지재단 아래 명지대학교와 관동대학교[13]와 같은 케이스로 학교 운영을 전환하는 안이었다. 6번 안은 학교 운영을 그대로 존치하는 안이었다.


이중 연세발전위원회 산하 원주발전위원회의 선택은 '특성화'안이었다.

이후 추상적 합의들을 구체화하기 위한 논의 과정에서 학교 측에서는 원주캠퍼스의 계열화를 추진하려고 하였다. 즉, 원주캠퍼스의 모집단위를 인문계와 자연계로 통폐합하여 학생을 선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적극 반대하였고[14], 교수들의 문이과 계열화 반대 사유를 긍정한 학교 측에서는 신촌-원주캠퍼스 간의 동일한 계열 내 이중전공[15] 허용을 전제로 한 계열화를 추진하게 된다.

이후 교수회의 중 이를 통과시켜 학생에게 통보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의 참여는 배제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파일:external/chunchu.yonsei.ac.kr/12944_3735_5634.jpg
당시 원주캠퍼스 학생들의 상경투쟁 모습

1.5. 2007년 레지덴셜 칼리지(Residential College)도입

2007년 17대 연세대학교 총장인 정갑영 12대 원주부총장 부임 이후 원주캠퍼스에는 국내 최초로 레지덴셜 칼리지(RC)#, 캠퍼스 간 소속변경 등 다양한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는 앞서 미국의 모델을 참고하여 국내 실정에 맞게 최초로 학부 연동의 기숙형 협동제도를 도입한 시도였다.

레지덴셜 칼리지(일명 RC, 정주대학 또는 기숙형 대학)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국내 최초로 시행 제도로, 이후 연세대학교 서울캠퍼스를 포함하여 한동대학교 등 기타 여러 국내대학에서도 도입하기에 이른다.[16][17]

1.6. 2018년 역량강화대학 선정

2018년은 원주캠퍼스가 창립한지 40주년이 되는 해로, 학교발전 기금조성을 통한 40주년 기념 교육환경 개선 사업이 기획되어 정의관의 증축, 중앙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의 연세광장 기획[18], 글로벌 빌리지 기획[19] 및 강의실의 전체적인 리모델링 사업 등이 함께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원주캠퍼스는 2018년 6월 20일 대학구조조정 정책인 대학기본역량진단 잠정결과에서 2단계 진단대상대학에 선정되었으며, 이후 8월 23일 2단계 진단에서 역량강화대학에 선정되었다.[20][21] 대학본부 측은 결과에 반발하여 이의제기 신청을 했으나 교육부에서 기각당했으며, 이에 대한 책임으로 17대 원주부총장이었던 윤방섭 교수를 포함한 12명의 처장, 부장급 인사들이 일괄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이로 인해 상술하였던 40주년 기념 개선사업 중 기 진행한 정의관의 증축사업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은 유보되었고 연세광장 잔디화 사업의 경우 사실상 백지화가 되어버렸다.[22]

역량강화대학 선정 후 김용학 총장은 담화문을발표하여 원주캠퍼스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학사구조의 개편, 본-분교간 연계의 확대 등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또한 더 나아가 본-분교 교수진으로 통합 구성된 총장 직속기구인 `원주혁신위원회`를 구성하여 원주혁신안을 마련하는 등, 구성원들의 동요와 우려를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지원과는 별개로 선정 발표 파동의 여파로, 2019년 수시모집에서 원주캠퍼스는 역량강화대학들 중에서도 전년 대비 가장 큰 폭으로 경쟁률이 떨어지는 결과[23]를 보였다. 이때문에 지금껏 지방사립대임에도 불구하고 원주캠퍼스가 입결과 경쟁률에서 항상 매우 크게 우위를 점했던 강원도 지역의 지방거점국립대학교강원대학교에 대해 경쟁률도 낮아졌을 뿐더러 입결마저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엇비슷해지는 대참사까지 벌어지게 된다.[24]

1.7. 2019년 미래캠퍼스의 탄생

결국 2019년 1월 22일, 원주혁신위원회에서 25일까지 미래캠퍼스 구성원 대상으로 새로운 캠퍼스 비전 및 캠퍼스명을 공모받는다. 보건의료의 영문자를 한 자씩 따와 만든 '메디치 캠퍼스'라는 명칭도 학생들로부터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이후 최종적으로미래캠퍼스로의 교명 변경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학교는 새로이 확정된 캠퍼스 명칭과 함께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 학령인구의 감소, 새로운 교육형태의 출현 등, 새로운 교육환경의 변화에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대학 혁신의 새로운 비전VISION 2030 선포를 통해 새로운 혁신의 시대로 나아갈 것임을 공언한다.

또한 “전공 선택의 특성화, 디지털헬스케어와 지속가능발전 분야를 축으로 하는 학문분야별 특성화"를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하는 ‘학생중심 미래지향적 융합교육’ 대학으로 거듭날 것을 천명했다.

거기에 더해 캠퍼스 혁신의 상징인 ‘미래융합형 다목적 강의 연구동인 컨버전스 홀’ 신축이 진행 중을 발표한다.


한편 가나정부와 연세대학교가 2019년 12월 18일 가나의 분소(Bunso)지역에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는 사업 계약을 체결하여, 미래캠퍼스가 본 사업의 교육, 행정, 산학협력 분야를 총괄하는 책임을 맡게 되는데,# 한화로 약 1,200억 원이 투입된 사업으로 가나 현지에 2개의 단과대학과 8개 학과로 구성된 1,100명 규모의 대학을 협력 설립할 예정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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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개교 예정인 가나 분소(Bunso) 종합대학교 조감도


교명변경 및 학사개편 단행 이후 수시 경쟁률이 다시 상승세[26]를 보이고 있다.

학령인구감소의 여파로 타 지방대학들이 신입생 충원률을 채우지 못하는 사태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와중에, 일찍부터 보건계열 및 중복학과의 특성화로 경쟁력을 높이고 있던 미래캠퍼스로 다시 시선이 모아지면서 지방에 위치해 있음에도 경쟁률이 오르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현재까지 교명변경이 다소간 학교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향후 컨버전스 홀을 비롯한 신축 건물들이 연이어 들어서고, 중소벤처기업부(창업진흥원)에서 지원하는 ‘메이커 스페이스 구축·운영사업[27]’의 주관기관으로써 역할을 해낸다면 지역의 혁신 창업 허브로 더욱더 경쟁력 있는 캠퍼스로 발돋움 할 것으로 보인다.


[1] 의예과, 의학과, 보건학과, 영어영문학과, 경제학과, 경영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과[2]삼애캠퍼스는 부지가 너무 작아 제외되었다.[3] 1976년 당시 원주기독병원은 연세대학교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부속병원이었다.[4] 설립 당시 원주 분교는 신촌캠퍼스 의과대학 소속이었다.[5] 현재 지명은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6] 자금 출처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라 한다.[7] 출처 : 연세춘추 보도기획, 원주캠의 역사를 들여다 보다[8] 연세학보는 2015년 1학기를 끝으로 폐간되었다.[9] 남양주시[10] 마찬가지로 중앙대 안성캠퍼스의 경우 경기도 하남이나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동 등으로 이전하려고 온갖 수를 다 썼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안성의 지역구 김 모 국회의원과 안성시 자체의 반대도 한 몫 했다.[11] 도서관 완공, 종합관 건립, 교수진 충원 등.[12] 현재의 정의관.[13]가톨릭관동대학교[14] 보건과학대학에서는 발전기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15] 복수전공[16] 2019년 6월 경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3일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 편에서 국제캠퍼스가 최초로 RC를 시행한 대학이라고 방송이 잘못 나가는 바람에 당시 역량강화대학 선정 이후 학교에 대한 불신 및 회의감이 또 한번 분출되어 미래캠 대학본부로 질타가 쏟아진 적이 있었다. 연세대학교 공식 유튜브에 올라간 국제캠퍼스 기숙사 홍보 영상에는 문제의 부분이 편집되었다.[17] 하지만 방송과는 별개로 국제캠퍼스에 RC 제도를 역수출한 이후 RC 하우스 분반을 비롯하여 국제캠퍼스 RC제도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다시 미래캠퍼스 RC제도에 도입하여 적용시키는 등 서로 상호적인 보완을 지속해오고 있는 실정이다.[18] 역량강화대학 선정 직전에 기공식까지 진행하였다.[19] 주로 외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거, 학업 공간[20] 진단대상대학은 단 40개교에 불과하다. 거기에 이 40개교에서 인지도가 높은 곳이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를 비롯해 덕성여대와 한국해양대, 조선대학교 정도밖에 없다.[21] 일각에서는 연세대학교가 문재인 정부에 밉보인 탓에 차마 본교를 칠 수는 없으니 분교를 때린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22] 하지만 잔디화 사업은 엎어진게 오히려 낫다는 의견이 많았다. 왜냐하면 잔디는 관리에도 굉장한 비용이 소모되는 종인데, 하필 중앙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에 거대한 잔디밭을 조성해버리면 미관상 예쁠 수는 있어도, 그 잔디밭의 유지를 위해서는 학생들의 이동 경로가 이전에 비해 크게 제한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촌캠퍼스에도 잔디밭이 종종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도 사람이 지나다니는 이동 경로에는 잔디가 하나도 심어져 있지 않다. 애시당초 학생들의 실제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로 진행된 문제가 있었던 사업이라는 말.[23] 2018년도 12.1:1 → 2019년도 8.8:1, 그리고 2020학년도 역시 8.76:1로 경쟁률을 보이는 바람에 결국 예정되었던 학사개편을 1년 일찍 앞당겨 시행했다.[24] 역량강화대학 발표 이전 학교 커뮤니티에서는 '강원대축제 우유마시기 프로그램'에서 일어난 '여학우 처우 논란 사건'(만들어질 때만 해도 처음에는 그냥 정말 순수하게 우유 빨리 마시기 행사였지만, 이후에 변질과정을 거치면서 여학우 몸에다 우유를 뿌리고 남학우가 이를 핥아마시는 행사로 변해버린 사실..)에 대해 대놓고 조리돌림을 하기까지 했으니, 그 충격은 분명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게 분명하다.[25] 아프리카 가나연세대학교가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는 안이 확정된 이유는 연세대학교가 식량 안보를 비롯하여 SDGs, 지속가능한 발전과 연관된 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26] 2021학년도 11.31:1에 이어 2022학년도 11.33:1#[27] 유형 : 일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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