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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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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y Sky
1969.06.06
Elton John
1970.04.10
Tumbleweed Connection
1970.10.30
Madman Across the Water
1971.11.05
Honky Château
197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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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
1973.01.22
Goodbye Yellow Brick Road
1973.10.05
Caribou
1974.06.24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1975.05.19
Rock of the Westies
197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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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Moves
1976.10.22
A Single Man
1978.10.16
Victim of Love
1979.10.13
21 at 33
1980.05.13
The Fox
198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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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mp Up!
1982.04.09
Too Low for Zero
1983.05.30
Breaking Hearts
1984.06.18
Ice on Fire
1985.11.04
Leather Jackets
198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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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 Strikes Back
1988.06.20
The Complete Thom Bell Sessions
1989.02.01
Sleeping with the Past
1989.08.29
The One
1992.06.15
Duets
199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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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in England
1995.03.20
The Big Picture
1997.09.22
Songs from the West Coast
2001.10.01
Peachtree Road
2004.11.08
The Captain & the Kid
200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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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ion
2010.10.19
The Diving Board
2013.09.16
Wonderful Crazy Night
2016.02.05
Regimental Sgt. Zip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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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ckdown Sessions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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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인 록스타 (1970~1971)2. 전성기 (1972~1976)3. 침체기 (1976~1981)

1. 신인 록스타 (1970~1971)

1.1. Elton John부터 Madman Across The Water까지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1969년 내내 50곡에 달하는 수많은 곡들을 썼다. 1970년 2집 Elton John의 모든 수록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고, 3집 Tumbleweed Connection의 대부분 수록들도 이때 작곡되었다. 앨범 2~3장에 수록해도 충분히 남을 정도로 많은 곡들을 작업한 이후로 이제 남은 건 앨범 작업이었다고 판단하여 2집 녹음 계획을 세웠다. Empty Sky의 프로듀싱을 맡은 DJM 음반사의 출판업자 스티브 브라운은 엘튼 존에게 '제대로 된' 프로듀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1969년 11월, 스티브 브라운은 런던의 로니 스코츠 클럽에서 엘튼 존과 버니 토핀에게 편곡자 "폴 벅마스터"를 소개했다. 그렇게 친분이 생기기 시작하여 엘튼 존은 그를 앨범에서 편곡을 맡아줄 편곡자로 영입했다.

폴 벅마스터에게 새 앨범 편곡을 제안했을 무렵,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에게 프로듀싱과 편곡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고 조지 마틴도 편곡을 맡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전설과 작업하게 된다는 각종 부담감으로 인해 조지 마틴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폴 벅마스터를 영입했다.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아줄 프로듀서도 찾고 있었고 엘튼 존의 팀원이 폴 벅마스터에게 추천할 만한 인물이 있다고 물었더니 폴 벅마스터가 이전에 같이 몇 번 작업해 본 프로듀서이자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에서 프로듀싱을 맡은 "거스 더전"을 꼽았다.

거스 더전은 이미 몇 개월 전, 런던 2층 버스에 붙어 있던 Empty Sky의 광고판과 FM 라디오에서 방영되던 Lady Samantha를 우연히 들은 계기로 엘튼 존에 관심을 가진 상태였고 공교롭게도 거스 더전의 사무실은 DJM 음반사와 불과 5분도 안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게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거스 더전을 만나게 되었고 그 시기에 작곡된 12곡의 데모를 들려주어 큰 인상을 받게 했다. 거스 더전의 회고에 따르면, 본인이 원하던 뮤지션을 드디어 찾게 되었고 모든 곡들이 놀라웠다고 밝혔다. 그렇게 거스 더전은 앨범에서 프로듀싱을 맡아줄 프로듀서로 합류했고 이후 엘튼 존의 대부분 1970년대 앨범들에서 프로듀싱을 맡으며 엘튼 존의 프로듀서로 크게 활약했고 엘튼 존의 대표 프로듀서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roubadour_02.jpg
트루버도어 극장
2집의 제목을 무명이던 엘튼 존의 이름을 강조하기 위해 Elton John으로 지었는데 거스 더전의 회고에 따르면, 2집은 엘튼 존을 슈퍼 스타로 띄워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그의 곡들을 녹음하도록 데모를 멋지게 포장한 앨범으로 작업했다고 밝혔다. 《Elton John》은 편곡자, 프로듀서, 세션 연주자들을 포함하여 1970년 1월, 런던에 위치한 Trident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Elton John》은 1970년 4월에 발매되었고 발매 1개월 뒤, 영국에서 진입하여 5위로 기록되었다. 22주 동안 차트에 머무면서 5위로 올라간 것이다. 영국에서 차트 진입에 성공한 첫 앨범이 되었고 이 시기부터 투어 밴드를 결성하여 순회공연을 진행,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과 일부 유럽 국가에서만 조금 알려진 상태였고 미국에서는 1970년 8월 초까지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다.

웨스트 할리우드에 위치한 트루버도어 극장의 사장이던 더그 웨스톤(Doug Weston)은 영국에서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신인 가수 엘튼 존을 알게 되었으며 그의 음악성, 슈퍼스타로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알아보았다. 더그 웨스톤은 이 무명의 피아노 연주자를 불러와 이 극장에서 공연을 진행시키라고 요청했고, 이 편지를 읽으면 즉시 그를 데리고 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DJM에게 보냈다.

사실 DJM 음반사의 사장 딕 제임스는 엘튼 존을 미국에 진출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무려 18개월 동안 미국에서 엘튼 존에게 관심 가질 음반사를 찾으려 했다. 1년 가까이 별 소득이 없었다가 마침내 뉴욕의 유니버셜 음반사와 라이선스 협정을 맺게 되었고 2집으로 통해 미국에서도 음반 계약을 얻었다. 당시 유니버셜 음반사의 사장이었던 래리 우탈은 영국에서만 발매되었던 1집 Empty Sky를 그냥 넘겼는데 이후 1집은 1975년 2월에 뒤늦게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매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미국인들은 2집 《Elton John》을 1집으로 착각했다.

처음부터 유니버셜이 엘튼 존과 바로 계약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니버셜은 DJM이 소유한 록 밴드 <아고시>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를 기회로 여긴 엘튼 존 팀원들의 제안으로 인하여 엘튼 존도 같이 계약을 하게 되었다. 유니버셜은 아고시와 1만 달러로 계약했지만, 엘튼 존은 계약금 없이 넘겼다. 그 후로 유니버셜이 큰 관심을 가졌던 <아고시>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미국 진출을 앞두고 있었으며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난 뒤, 로스앤젤레스로 도착했다. 호화로운 캐딜락 리무진이 본인들을 데려다 주는 걸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정작 공항 터미널을 떠나면서 실제로 본 건 런던에서 사용되던 빨간 루트마스터 2층 버스였다.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영국적인 걸 벗어나서 미국적인 새로운 것에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정작 보였던 건 영국 버스였고 이로 인해 영국적인 이미지가 계속 생각나는 바람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당시 버스에서는 '엘튼 존 도착'이라고 적혀있는 현수막도 걸려 있는데 지나가던 일부 사람들은 이를 변기 광고로 착각했다. 이 부분은 2006년 "Postcards From Richard Nixon"에서 묘사되었다.

버니 토핀 뿐 만이 아니라 1970년 3월, 3집 Tumbleweed Connection을 작업하면서 결성된 엘튼 존 밴드의 1기 멤버 드러머 "나이절 올슨", 베이시스트 "디 머리"를 포함한 팀원들과 함께 단체로 동행했고 1970년 8월 25일, 웨스트 할리우드에 위치한 트루버도어 극장에서 대망의 첫 미국 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첫날 공연 당시 엘튼 존은 나팔 청바지와 흰색 글씨로 '로큰롤'로 써져있던 빨간 티셔츠를 입었고 턱수염까지 길렀었다. 이때 당시의 모습을 촬영된 사진들 중에서 한 장을 1972년 5집 Honky Chateau의 표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4385431715_c99389264b_o.jpg
1971년 8월 7일 스웨덴 고덴부르그 공연에서.
엘튼 존은 자신이 당일 공연의 첫 번째 순서로 되어 있다는 걸 보고 크게 놀랐고 첫 순서라는 부담감으로 인해 공연 순서를 바꿔주라고 부탁했지만 그건 통하지 않았다. 당시 관중석에는 리언 러셀, 캐롤 킹, 퀸시 존스, 마이크 러브, 헨리 맨시니 등 유명 뮤지션들이 다수 참석했고 6일 동안 공연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유명인들이 참석했다. 첫 공연에서는 닐 다이아몬드가 무대로 나와 엘튼 존을 소개했다. 미지근한 반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엘튼 존의 우려와 달리, 공연을 진행하는 내내 사방에서 터져나오던 어마어마한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이후 6일 동안 공연들을 진행하면서 성공적인 미국 데뷔를 이끌었으며, 로스앤젤레스의 각종 언론사에서도 칭찬 일색이었다. 첫 공연부터 이어진 호평과 환대로 이전처럼 주목을 받지 못하던 무명은 가버렸고 신인 록스타로서 크게 화제되었다.[1] 이후 미국 각지에서 진행된 공연들로 통해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Elton John》에 대한 관심 또한 커져갔다.

《Elton John》의 리드 싱글은 1970년 3월 발매된 Border Song이다. 여전히 미국에서 무명이던 시기때 빌보드 100위 안에 진입하여 92위로 기록되었지만 빌보드에 진입한 엘튼 존의 첫 곡이라는 업적을 누렸다. 6개월 뒤, 1970년 10월 26일 Take Me To The Pilot이 후속 싱글로 발매되었는데 B면으로 수록된 Your Song을 A면으로 수록하기 더욱 적절하다는 음반사의 판단으로 위치를 서로 바꿔서 발매되었다.

그렇게 발매된 "Your Song"은 1971년 1월, 미국 빌보드 8위, 영국 7위 등으로 기록되는 히트를 거두었고 싱글 차트 10위에 진입한 첫 싱글이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성공을 거둔 싱글이 되었다. 그래미상 올해의 음반 부문과 최우수 남성 팝 보컬 부문에 후보로 오를 정도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리언 러셀, 퀸시 존스, 조지 해리슨 등 엘튼 존에게 미국 데뷔를 축하하다는 전보를 보내었다.

《Elton John》을 녹음하고 2개월 뒤 1970년 3월, 후속 앨범으로 3집 Tumbleweed Connection을 작업했고 몇 개월 뒤 1970년 10월에 발매되었다. 《Tumbleweed Connection》은 《Elton John》이 앨범 차트 상위권에 오르던 1971년 1월에 차트에 비슷하게 진입하면서 빌보드 5위, 영국 2위 등으로 기록되었고 전작에 이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2집이 커다란 성공을 거둔지 얼마 안 돼서 인지도와 상업적 성공을 그대로 편승 시켰고 음악적으로도 역시 큰 호평을 받았다. 《Elton John》은 현악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심포니 록 음악을 담은 음악적, 완성도 면에서 뛰어난 명반으로 평가받았고 《Tumbleweed Connection》는 컨트리 록의 진수를 그대로 보여줌과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담고 있다는 명반으로 평가받았다.

1970년 9월에 급하게 작업된 로맨스 영화 Friends의 사운드트랙이 1971년 3월에 발매되었다. 싱글은 타이틀 트랙 Friends 한 곡만 발매되었고 미국 빌보드 34위, 캐나다 13위로 기록되었다. 1970년 11월 17일, 뉴욕의 A&R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공연이 1971년 4월에 라이브 앨범 17-11-70으로 발매되었고 미국 11위, 영국 20위, 캐나다 10위로 기록되었다. 1971년 시점으로 솔로 데뷔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았던 상태였지만 앨범을 5장이나 발매한 상태였다.

1971년 2월, 8월 작업된 4집 Madman Across The Water는 1971년 11월에 발매되었다. 미국에서는 9위로 기록되어 10위 진입에 성공했지만 영국에서는 41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다. 1971년 11월에 발매된 4집의 리드 싱글 Levon은 미국 24위, 캐나다 6위로 기록되어 꽤 히트쳤고 1972년 2월 발매된 Tiny Dancer는 빌보드 41위, 캐나다 19위, 호주 13위로 기록되었다.

2. 전성기 (1972~1976)

2.1. Honky Château부터 Here And There까지

1972년 5집 Honky Château부터 , 으로 전향하면서 무겁고 진지했던 음악에서 한층 밝고 대중적으로 변했다. 동시에 작사작곡 역량 또한 한층 발달한 모습을 보여 호평을 받았고, Honky Château는 영국 2위, 빌보드 200 1위로 기록되어 처음으로 미국에서 1위로 기록된 앨범이 되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2년 4~7월에 발매된 Honky Cat, Rocket Man이 싱글 차트 10위 안에 진입되어 히트쳤고, 특히 Rocket ManYour Song과 같이 엘튼 존의 대표곡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엘튼 존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이 곡과 앨범으로 통해서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71년 Madman Across The Water에 영입된 기타리스트 데이비 존스턴이 1972년에 투어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합류해 엘튼 존의 투어 밴드의 모습도 이 시기부터 각인되고 있었다.

Honky Chateau가 차트에 오르던 시기인 1972년 6월에 다시 앨범 작업에 들어갔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몇주간 작업된 6집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Honky Chateau로 한층 바꿔진 그의 음악이 팝으로 탈바꿈해 불과 1년 만에 어둡고 진지한 음악에서 밝고 경쾌한 음악으로 변했다. 그로 인해서 성공도 더욱 늘었는데, 1972년 10월(UK), 11월(US)에 발매된 싱글 Crocodile Rock은 첫 빌보드 1위 곡이 되었고, Daniel은 빌보드 2위, 영국 4위, 캐나다 1위 등 여러 국가에서 10위에 진입해 크게 히트쳤고,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는 1973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당시 싱글로 발매되지 않은 Teacher I Need You, Elderberry Wine 등의 수록곡은 1973년 미국의 여러 FM 라디오에서 한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었다.
파일:external/jazzinphoto.files.wordpress.com/elton-john-1973-sundown-theatre-edmonton-north-london-photo-barrie-wentzell.jpg
1973년 3월 22일 영국 런던의 Sundown 극장에서.
1973년 1월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작업을 시작했지만, 열악한 스튜디오 환경과 치안으로 인해 그해 5월 프랑스 에루빌로 거처를 옮겨 2주간 작업되었다. 1973년 10월에 발매된 7집 Goodbye Yellow Brick Road는 엘튼 존의 첫번째 더블 앨범이 되었고, 평론가들의 혹평에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커다란 사랑을 받게 되어 빌보드 200 1위, 영국 1위, 각종 국가에서 5~10위 안에 진입되어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1974년 후반까지 차트에 진입되어 단숨에 가장 커다란 인지도를 얻은 엘튼 존의 앨범이 되어 엘튼 존의 최고 명반 중 하나이자 대표작으로 자리를 세우게 되었다.

싱글로 발매된 곡은 Saturday Night's Alright For Fighting, Goodbye Yellow Brick Road, Candle In The Wind, Bennie And The Jets 총 4곡이며 모두 싱글 차트 10위 안에 진입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중 빌보드 1위로 기록된 두 번째 곡인 "Bennie And The Jets", 빌보드 2위로 기록된 "Goodbye Yellow Brick Road"가 최대 히트곡이다. 그리고 1971년 Madman Across The Water부터 참여한 퍼커셔니스트 레이 쿠퍼는 1973년 11월부터 엘튼 존 밴드에서 퍼커션 멤버로 참여하여 오랜 동료가 되기 시작했다.

1973년 11월 런던의 Trident 스튜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싱글인 Step Into Christmas와 B면 수록곡 Ho! Ho! Ho! (Who'd Be A Turkey At Christmas)를 녹음했고, 1973년 11월 26일에 크리스마스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 24위, 빌보드 크리스마스 차트 1위로 기록되어 꽤 크게 히트쳤다. 이 곡은 2009년에 영국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크리스마스 팝송 리스트에서 상위권에 꼽히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싱글을 발매하고 2개월 뒤인 1974년 1월, 미국 콜로라도의 Caribou Ranch, Nederland 스튜디오에서 8집 Caribou를 작업했다. 당시 일본, 오세아니아 투어를 돌면서 앨범을 작업하느라 타이트했던 스케줄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9일 안에 약 20곡을 녹음했다. 상당히 급하게 작업한 앨범이라서 본인들은 급조한 앨범이라고 별로 좋아하지 않고, 전작들에 그다지 미치지 않는 완성도를 보인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이 앨범도 빌보드 1위, 영국 1위 등 여러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해 전작들처럼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1974년 5~7월에 발매된 싱글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The Bitch Is Back는 싱글 차트 10위 안에 진입되었다. "The Bitch Is Back"는 빌보드 4위로 기록,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는 빌보드 2위로 기록되었고 이 곡은 1975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노래 상에 후보로 올랐다.

Caribou는 엘튼 존이 설립한 음반사이자 대표곡 Rocket Man의 이름을 따온 로켓 레코드 컴퍼니(The Rocket Record Company)에서 발매된 첫 앨범이기도 하다. 1973년 설립된 로켓 음반사로 통해 닐 세다카가 재기작들을 발표했으며, 키키 디도 로켓으로 통해서 인기를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엘튼 존은 로켓 소속이 아니었는데 로켓에 소속해서 앨범을 발매한 건 1976년 11집 Blue Moves부터였다.

1975년 록 오페라 영화 Tommy에 출연해 핀볼 챔피언 역을 맡았고, 더 후의 "Pinball Wizard"를 불렀다.[2] 엘튼 존 답게 화려한 복장과 안경에 4피트나 되는 거대한 부츠를 신고 나왔다. 주제가 주제다보니 굉장히 과격하면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진 성격. 영화에선 주인공으로 나온 로저 돌트리와 관중들로 꽉 체워진 무대에서 게임을 하게 되었지만, 엄청난 점수차로 엘튼 존이 지게 되면서 그 충격으로 쓰러진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lton_john_rock_music_awards_1975.jpg
1975년 록 뮤직 어워드에서.
1974년 11월 발매된 첫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 Elton John's Greatest Hits은 막대한 성공을 거두며 미국에서 가장 높은 판매를 기록한 엘튼 존 앨범이 되었다. 당시 엘튼 존은 연달아 이어지던 막대한 성공들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고, 앨범들은 몇 개월 씩 간격을 두며 속사포로 작업되어 발매되고 있었다.

1974년은 존 레논과 우정이 깊은 해이기도 했다. 1974년에는 서로의 앨범들 Caribou, Walls and Bridges에 참여하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존 레논은 자신의 노래 "Whatever Gets You Through The Night"가 빌보드 1위로 기록된다면 존 레논이 엘튼 존 공연에 출연한다는 내기를 걸었고, 정말이 이 곡이 빌보드 차트 1위로 기록하게 되자 존 레논은 1974년 11월 28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추수감사절 날에 열린 공연에 출연하여 "Whatever Gets You Through The Night",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I Saw Her Standing There"을 불렀다. 당시 엘튼 존은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을 커버한 버전으로 1974년 11월에 싱글로 발매하기도 했는데 이 커버 버전은 1975년 첫 빌보드 1위 곡이 되었다.

미국의 유명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과 그녀의 소속 프로팀 <Philadelphia Freedoms>에게 바치는 필라델피아 소울 넘버 "Philadelphia Freedom"은 1975년 2월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빌보드 1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쳤다. 이 곡은 빌보드 R&B 차트에서 상당한 히트를 거둔 덕분에 1975년 5월 17일 "Soul Train"에 출연해서 "Bennie And The Jets"와 같이 불렀고, 처음으로 소울 트레인에 출연한 백인 뮤지션이 되기도 했다. 흑인 음악에만 관련된 프로그램에서 백인 뮤지션이 출연했다는 건 당시 시점으로 꽤 이례적이었다.

1974년 8월, Caribou를 작업했던 콜로라도의 "Caribou Ranch" 스튜디오와 Nederland 스튜디오에서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을 작업했다. 이 앨범은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1960년대 무명 시절을 묘사한 자전적인 앨범으로, 1972년 5집 Honky Chateau, Goodbye Yellow Brick Road와 더불어 가장 우수한 음악성을 담은 명반이라고 호평받았다.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는데 역사상 최초로 빌보드 200 차트 데뷔 1위로 기록된 앨범이 되어 7주 동안 머물었다. 다른 국가들에서도 앨범 차트 5~10위 안에 진입되었고, 영국에선 2위로 기록되어 9주 동안 머물었고, 197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부문에 노미네이트, 최고의 남성 보컬 부문에서도 노미네이트되었다. 싱글은 "Someone Saved My Life Tonight" 단 한 곡 뿐이었지만, 캐나다 2위, 빌보드 4위로 기록되었다.

1975년부터 엘튼 존 밴드 라인업에 변화가 생겼다. 당시 엘튼 존은 기존의 밴드보다 더욱 강력하면서 새로운 사운드를 원해 1975년 4월에 나이젤과 머레이를 해고시키고 다른 동료들을 영입한 것이다. 1970년부터 함께했던 1기 멤버 디 머리, 나이절 올슨을 해고했고, Empty Sky부터 Madman Across The Water까지 참여한 초기 세션 연주자들 드러머 "로저 포프", 베이시스트 "케니 파사렐리", 기타리스트 "케일럽 퀘이"를 영입했고, 키보디스트로 제임스 뉴튼 하워드를 영입했다. 새로 영입된 세션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 데이비 존스턴과 레이 쿠퍼는 그대로 남았다.[3] 이 라인업으로 1975년 6월 21일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고, 1975년 7월에 작업되어 그해 10월 발매된 10집 Rock Of The Westies에도 참여했다. 이 라인업으로 1975년 6월부터 10월 26일까지 각각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West Of The Rockies 투어를 진행했다.

이 앨범도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처럼 빌보드 200 차트에서 데뷔 1위로 기록되었고, 마찬가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리드 싱글 "Island Girl"은 빌보드 1위로 기록되었고, "Grow Some Funk Of Your Own", "I Feel Like A Bullet In The Gun Of Robert Ford"가 각각 1976년 1월 12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14위, 캐나다 8위로 동일한 성적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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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25일 다저 스타디움
1975년 10월 25~26일 다저 스타디움에서 두 공연을 열었고, 비틀즈 이후 처음으로 다저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진행한 뮤지션이 되었다. 50,000명 이상이나 참석했다. 다저 스타디움 공연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당시의 실황과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졌다. 엘튼 존은 2007년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이 진행한 공연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과 함께한 공연들 중 하나라고 했다.

1976년 3월 7일 런던에 위치한 마담투소 박물관(Madame Tussaud)에 엘튼 존 밀랍 인형이 전시되었는데 비틀즈 이후로 전시된 첫 뮤지션 밀랍 인형이다.[4]

1976년 5월에 두번째 라이브 앨범 Here And There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선 1974년 5월 18일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과 1974년 11월 28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실황을 담았다. 런던에서 부른 라이브 버전의 Love Song은 1976년 4월에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에서 18위로 기록되었다. 1976년 3월에 3~4주간 캐나다와 런던, 로스앤젤레스에서 11집 Blue Moves를 작업했고, Goodbye Yellow Brick Road에 이은 두번째 더블 앨범이 되었다. 앨범 작업 1개월 뒤인 1976년 4월 29일 영국 리즈부터 <Louder Then Concorde Tour (But Not Quite As Pretty!)> 투어를 진행했고, 8월 1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까지 4개월 동안 영국스코틀랜드, 미국에서 진행했다. 1975년 라인업과 마지막으로 함께한 투어이기도 하다.

1976년 6월에 영국의 여가수 "키키 디"와 듀엣으로 부른 "Don't Go Breaking My Heart"가 1976년 6월 21일에 싱글로 발매되었다. 빌보드 1위, 영국 1위, 캐나다 1위, 호주 1위 등 다수의 국가에서 싱글 차트 1~5위 안에 기록되어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영국에서 처음으로 1위로 기록된 엘튼 존 곡이 되었다. 미국에선 골드로 기록했고, 곧 엘튼 존의 가장 큰 1970년대 히트곡이 되었다.

1972년 이후로 꾸준히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로 고수하고 있었고, 왕성하게 이어진 투어 활동으로 인해 6년 동안 무려 500회의 공연을 진행, 5년 연속 골드 레코드 기록 상, 1975년 10월 21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하는 등 막힘 없이 이어지던 성공으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고, 대중은 이 시기를 엘튼 존의 시대라고 평했다. 1975년 당시 전세계 음반 판매량의 2%가 엘튼 존의 몫일 정도였다. 1976년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던 성공들로 인해 1970년대 가장 막대한 성공을 거둔 뮤지션 중 하나이자 1970년대를 대표하는 록 뮤지션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다.

3. 침체기 (1976~1981)

3.1. Blue Moves부터 The Thom Bell Sessions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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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0월 7일에 발행된 엘튼 존의 커밍아웃 인터뷰가 실린 롤링 스톤
무명 시절이던 1967년 이후로 거의 10년간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왔던 왕성한 활동으로 인해서 음악 활동에 흥미를 잃게 되면서 번아웃 증후군을 앓았고, 심리적인 부담들로 한동안 고생했다. 당시에는 정규 앨범 작업 뿐만이 아니라 동료 뮤지션들에게 많은 곡들 써주며 피쳐링도 많이 했다. 과장하자면 10년 정도의 경력을 3년 안에 해치웠다고 봐도 무방했다. 1975년 10월 21일 오클랜드 공연 바로 다음 날인 1975년 10월 22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했던 본인의 맨션에서 신경안정제 60알을 삼키고 실내 수영장으로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다기도 했다. 10월 21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이 걸린 지 바로 다음 날이었고 10월 25~26일 다저 스타디움 공연이 진행하기 며칠 전이었다.

버니 토핀의 아내 맥신 파이벨만이 1975년에 집을 나가 엘튼 존 밴드의 베이시스트 케니 파사렐리와 살림을 차렸고, 이로 인해 버니 토핀은 술을 더욱 가까이 해 한동안 알코올 의존증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결국 버니 토핀은 70년대 말에 알코올 중독 때문에 요양원에서 잠시 요양하기도 했다. 결국 버니 토핀과 맥신 파이벨만은 1976년 초에 이혼했고 이에 대한 원망을 품은 가사를 상당수 썼다. Blue Moves의 대부분 수록곡들이 당시 버니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Blue Moves의 11번 트랙 "Between Seventeen And Twenty"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엘튼 존은 <Louder Than Concorde> 투어를 마치고, Blue Moves가 발매되기 전인 1976년 10월 7일 롤링 스톤에서 개인적인 얘기를 털어놓는 인터뷰에서 양성애자로 커밍아웃했다.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으로 인해 화제를 일으켰는데 한동안 음반 판매량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시각이 있다. 커밍아웃 몇 주 뒤 10월 22일 발매된 Blue Moves는 빌보드 200에서 3위, 영국에서 3위로 기록되었고 세계 어디에서나 1위로 오르는데 실패했다. 1972년부터 4년간 이어지던 1위의 자리에서 벗어났고 차트 성적, 판매량 등 전작들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수록곡 "Sorry Seems To Be The Harest Word"는 1976년 11월 1일에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6위, 영국 11위로 기록되었지만, 차트 정상을 차지했던 이전 싱글들에 비하면 처진 기록이다. 1977년 1~2월에 이어서 발매된 후속 싱글들 "Crazy Water", "Bite Your Lip (Get Up And Dance!)"도 싱글 차트 20~30위 안에 진입하면서 한동안 차트 성적이 시원치 않았었다.

1977년 들어서 보로소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한 엘튼 존은 화려한 의상과 선글라스를 놔두고 어두운 색안경과 칙칙한 의상, 베레모에 금발 가발을 착용했다. 이 시기는 왓포드 FC에서 회장으로서 활동이 더욱 돋보였다. 1977년 4월에 왓포드 FC를 헌정하는 노래 "The Goaldigger's Song"이 자선 싱글로 발매되었고, 1977년 5월 2~7일 런던의 Rainbow 극장에서 레이 쿠퍼와 2인조 투어 공연을 진행, 특별한 장소에서 작은 공연을 열거나 다른 가수의 공연에 찬조출연하기도 했다. 1977년 8월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키키 디 공연에 출연해서 "Don't Go Breaking My Heart"를 듀엣으로 불렀다.

1977년 10월 필라델피아, 시애틀에서 필라델피아 소울, 디스코가 크게 가미된 The Thom Bell Sessions를 작업해 "Nice And Slow", "Country Love Song", "Shine On Through"[5], "Mama Can't Buy You Love", "Are You Ready For Love" 총 6곡을 필라델피아 소울 계의 전문 작곡가들과 작곡하면서 녹음했지만, 녹음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하지 못해 불만족스럽다고 여겨 그 해에 발매되지 못했고, 1979년에 EP로 발매되기 전까진 2년 간 보류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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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3일 웸블리 아레나 공연의 리허설
이 시기의 음악 활동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고, 1977년 한 해를 왓포드 FC의 구단주, 공연 활동으로만 이어가다가[6] 1977년 11월 3일[7] 영국 웸블리 아레나에서 데이비 존스턴의 그룹 밴드 "China"[8]의 멤버들로 급히 밴드를 차려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은 불우 아동을 위한 축구 시설 건립에 힘쓰는 자선단체 클럽을 위한 자선 공연이다.[9] 키키 디가 참석해 "Don't Go Breaking My Heart"을 불렀고, 스티비 원더가 공연의 마지막에 참석해 "Bite Your Lip (Get Up And Dance!)"을 같이 불렀다. 그런데 엘튼 존은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를 부르기 전에 피아노를 연주하면서[10] 돌발 은퇴선언을 했다. 선언을 하는 도중, 관객들은 "안된다", "돌아와"라고 소리쳤다.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을 꺼내기가 몹시 힘들군요. 오랫동안 공연을 돌지 못했고 다시 무대로 돌아갈지말지 결정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오늘 밤 아주 즐겁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나의 공연활동을 모두 접기로 했습니다. 이해하시겠죠? 공연을 도는 것 말고도 나에게 종요한 일이 많습니다. 공연은 이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는 음악 활동을 잠시 멈추고 다른 활동에 집념하다가 나중에 돌아온다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후 인터뷰에서 당시 힘들었던 상황에 대한 회고를 들어보면 정말로 그만둘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날 엘튼 존은 화려한 복장들과 대비되는 베레모에 어두운 선글라스, 검은색 가죽 자켓을 입으며 공연을 진행했고, 평소와 달리 어떠한 농담도 없이 차분하게 공연을 진행했다.[11] 거기다 이 은퇴선언은 엘튼 존 본인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엘튼 존의 돌발선언을 듣고 동료들은 충격을 받았다.[12]

1970년부터 함께한 엘튼 존의 동료들 대부분 떠났고, 심지어 버니 토핀과 이 시점부터 결별했다. 1967년 이후 10년 동안 협업을 맺었으니 자연스레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13] 엘튼 존도 음악 활동을 중단함으로서 점차 내리막길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본인이 좌초한 것이지만, 위기가 상당히 빨리 찾아왔던 셈. 이로써 4년 간 이어졌던 전성기는 막을 내렸고, 소위 말하던 엘튼 존의 시대는 끝났다고 해도 무방했다.

웸블리 공연 이후 4개월 뒤인 1978년 3월 21일에 컴백 싱글 "Ego"가 발매되었다. 비싼 돈을 들여 뮤직비디오도 제작되었지만, 이 곡은 영국 34위, 미국 34위로 저조한 성적을 거두어 큰 반응을 모으지 못했다. 이후 엘튼 존은 1978년 3월부터 "Ego"를 녹음한 영국 버크셔 주의 "Mill" 스튜디오에서 8월까지 12집 A Single Man를 작업했다. 버니 토핀은 1977년에 떠났기에 1960년대 말부터 알고 지냈던 작사가 "개리 오스본"을 영입해 버니 토핀 대신에 엘튼 존의 작사 파트너로 맡아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반년 정도 천천히 작업된 A Single Man은 1978년 10월에 발매되었고, 미국 15위, 영국 8위로 기록되었다. 미국에선 10위 안에 진입하지 못한 첫 앨범이 되었고, 북미와 영국에선 성공적이었던 전작들에 비해 처진 성적을 거두었지만, 유럽에선 좋은 반응을 얻었다.[14] 싱글은 "Part-Time Love"[15] "Song For Guy"[16]가 발매되었고, "Part-Time Love"는 빌보드 21위, 영국 15위로 기록되었다. "Song For Guy"는 영국에서 4위로 기록,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크게 히트치게 되어 침체기 기간때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곡 중 하나가 되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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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부터 화려한 복장과 안경을 내려두었고, 1977년에 이어서 칙칙한 옷과 베레모를 착용했다. 기존의 이미지 탈피를 위한 시도였다고.[18] 그리고 창법도 약간 바꿔지기 시작했다. The Thom Bell Sessions을 작업하던 시기에 프로듀서 "톰 벨"은 엘튼 존에게 너무 높게 부른다는 이유로 보컬 톤을 좀 낮추라고 조언했고, 엘튼 존 본인도 너무 높게 부른다는 점을 인지하여 톰 벨에게 잠시 보컬 레슨을 받았다. 특유의 하이톤 보컬은 여전했지만, 1976년에 비하면 톤이 약간 낮다. 좀 더 깊으면서 소울 있는 창법으로 불렀다. 이전에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던 깊은 보컬을 이 시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1980년대부터 제대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1977년 11월 3일 웸블리에선 다신 공연을 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지만, 다행히 이후 생각을 바뀌어 약 1년 뒤인 1978년 10월 14일 뉴욕과 10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작은 공연을 열었다. 무대에서 진행하는 투어 활동을 다시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한 건 1979년부터였다. 퍼쿠션 레이 쿠퍼와 같이 피아노 반주에 타악기가 들어가는 독특한 형식의 2인조 투어를 열었고, A Single Man의 이름을 사용한 투어를 진행했다.[19] 1979년 2월 5일 스웨덴부터 시작해서 1979년 12월 7일 호주 퍼스까지 10개월 동안 진행되었고, 유럽, 북미, 오세아니아를 돌아다니면서 200개의 공연을 진행했다.[20] 1979년 5월엔 이스라엘소련에 처음으로 순회 공연을 진행한 서양 뮤지션이 되기도 했다. 소련에선 5월 20일부터 28일까지 머물었고, 당시 공연의 일부분 실황과 8일간 지내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고, A Single Man이 "Elton John Sings' In Russian"로 제목이 수정되어 발매되기도 했다. 소련에서 발매된 첫 서양 뮤지션의 앨범인 셈.[21]

1977년 9월에 작업되었지만, 불만족스러운 사운드로 인해 2년 간 보류하고 있던 The Thom Bell Sessions을 사운드 엔지니어 클라이브 프랭크스와 같이 프로듀싱을 맡아 리믹스했고, 1979년 6월에 "Are You Ready For Love", "Mama Can't Buy You Love", "Three Way Love Affair" 총 3곡으로 수록된 EP로 발매되었다. "Are You Ready For Love", "Mama Can't Buy You Love"은 1979년 4월, 1979년 7월에 각각 싱글로 발매되었다. "Are You Ready For Love"는 영국에서 44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었지만, "Mama Can't Buy You Love"는 빌보드 9위, 캐나다 10위, 뉴질랜드 20위,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1위로 기록되어 꽤 히트쳤다. 이 곡은 1980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고의 R&B 보컬 부문에 올랐지만, 노미네이트에 그쳤다. 참고로 1977년에 녹음된 나머지 3곡 "Nice And Slow", "Country Love Song", "Shine On Through"[22]은 1989년 2월에 확장판 The Complete Thom Bell Sessions로 발매되기 전까진 12년 동안 미발매로 보류되었다.[23]

투어 활동을 잠시 중단한 1979년 8월부터 새 앨범들 작업에 들어갔는데, 독일 뮌헨의 Musicland 스튜디오에선 13집 Victim Of Love, 프랑스 니스의 Superbear 스튜디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Sunset Sound 스튜디오에선 14집 21 AT 33을 작업했고, 서로 같은 기간에 작업되었다. Victim Of Love은 처음으로 엘튼 존이 작곡에 참여하지 않았고, 실베스터 르베이 등의 전문 작곡가들이 곡을 작곡했다. 디스코 열풍에 철저히 따라간 사운드로 작업되었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했고, 극악스러운 완성도로 인해 역대 엘튼 존 앨범들 중에서 Leather Jackets와 같이 최악의 앨범으로 꼽히게 되어 흑역사로 자리 잡았다. 1979년 11~12월에 타이틀 트랙 "Victim Of Love", 척 베리의 대표곡을 디스코로 커버한 Johnny B. Goode가 싱글로 발매되었고, "Victim Of Love"는 빌보드 33위로 기록, Johnny B. Goode는 차트 진입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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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년 뒤, 1975년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이 극장에서 미국 데뷔 5주년을 기념하는 공연들을 진행했다.[2] 엘튼 존이 커버한 버전은 2년 뒤 1976년에 싱글로 발매되었다.[3] 나이절 올슨과 디 머리는 5년 뒤 1980년 21 AT 33 투어로 다시 합류했다.[4] 출처[5] 1976년 3월 Blue Moves를 작업하면서 작곡된 곡이고, 가사가 없고 멜로디만 있던 미완성곡이었다. 톰 벨과 작업하면서 개리 오스본이 마저 가사를 작사해서 완성했다.[6] 10월 말에는 더 머펫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7] 1일 전인 11월 2일에는 아르헨티나의 팝 가수 크리스 디 버그가 여기서 공연을 진행했다.[8] 데이비 존스턴은 1973년부터 로켓 레이블에서 솔로 활동을 잠시 하기도 했었다.[9] 그래서 이 공연에서 엘튼 존이 왓포드 FC를 헌정하는 의미로 "The Goaldigger's Song"을 부른 것이다.[10] 이때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의 선율을 연주한 것으로 보인다.[11] 당시 경호원 중 한명이 한 관객에게 엘튼 존은 기분이 아주 안좋으니 말을 걸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12] 위 사진만 봐도 엘튼 존만 얼굴이 어둡다. 엘튼 존의 은퇴선언으로 인해 이 공연을 끝으로 결성된 밴드는 하루 만에 해산했다.[13] 사실 Blue Moves 발매 이후로 버니 토핀과 사이가 조금 소원해져 1977년에는 둘이서 작업한 곡이 Nice And Slow 하나 밖에 없다. 버니 토핀은 1977년 여름부터 1978년까지 앨리스 쿠퍼와 협업을 가졌다.[14]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가 1976년 당시 유독히 유럽에서 큰 반응을 모은 곡이고, 프랑스에서의 인지도도 70년대 말부터 커지기 시작했다. 12집은 프랑스에서 2위로 기록되었고, 1979년 초에 발매된 Return To Paradise가 프랑스 싱글 차트 2위로 기록되었다는 말이 있다. Song For Guy는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엘튼 존 곡들 중 하나.[15] 처음으로 싱글로 발매된 개리 오스본 작사의 곡이다.[16] 엘튼 존의 첫 연주곡 싱글이기도 하다.[17] 영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엘튼 존의 싱글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빌보드 110위로 기록되어 처음으로 100위 안으로 진입되지 못한 싱글이 되었다.[18] 베레모는 1979년까지 착용했지만, 그 후로 다시 쓰지 않았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거의 안경을 착용 안한 채 활동했지만, 가끔씩 안경을 착용한 경우도 있었고, 1985년부터 다시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했다.[19] 1977년 5월 1~7일 영국 런던에서 먼저 이런 식으로 진행한 적 있었다.[20] 그리스, 덴마크, 서독, 동독,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스페인, 아일랜드 등의 거의 가본적 없거나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에서 공연들을 진행했었다. 9~11월 미국에서 투어를 진행했을땐 Back In The USSA로 표기 되었다.[21] 수록곡 Big DipperPart-Time Love이 각각 동성애, 간통에 관련된 가사로 인해서 금지곡으로 처리되었지만, "Part-Time Love"은 당시 투어의 레파토리였고, 소련 공연에선 제외하지 않았다.[22] 이 곡은 예외로 1978년에 재녹음되어 12집 A Single Man에 수록했다.[23] Nice And Slow는 로켓 레이블 사의 여가스 룰루가 1978년에 커버한 버전으로 먼저 공개된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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