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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22:24:50

야마토 유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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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남극 국기.svg
남극의 영유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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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국가가 공식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나, 남극 조약으로 실질적 통치·분쟁이 유보되고 있는 지역
: 남극 조약 조건부로 영유권 주장이 동결되어 공식화하지 않은 지역
: 남극 조약 이전 국가 또는 민간에 의해 영유권이 선언되었다가 철회된 지역
: 영유권이 주장되지 않은 지역
<rowcolor=#fff> 유형 국가 지역명
영국 영국령 남극 지역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령 남극
칠레 칠레령 남극 지역
뉴질랜드 로스 속령
호주 호주령 남극 지역
프랑스 프랑스령 남방 및 남극 지역(테르아델리 지구)
노르웨이 퀸모드랜드·페테르 1세 섬
브라질 브라질령 남극
나치 독일 노이슈바벤란트
일본 제국 야마토 유키하라
없음 마리버드랜드 }}}}}}}}}

파일:Flag_of_the_Imperial_Japanese_Antarctic_Expedition.svg.png
시라세 노부 원정대의 기.
1. 개요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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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토 유키하라([ruby(大和,ruby=ヤマト)][ruby(雪原,ruby=ユキハラ)])는 1912년 일본 제국의 탐험가 시라세 노부([ruby(白瀨,ruby=シラセ)] [ruby(矗,ruby=ノブ)], 1861.07.20.~1946.09.04.) 등으로 구성된 남극 원정대가 탐험하고 명명했던 남극 일대의 지명으로, 남위 80° 5′ 0″, 서경 156° 37′ 0″의 로스 빙붕의 일부로 확인된다.

야마토일본의 옛이름이자 다른 이름이고, 유키하라(雪原)가 설원을 가리키므로 “일본 설원“을 뜻한다.

야마토 유키하라가 위치한 로스 해 일대는 한때 뉴질랜드가 영유권을 주장했던 로스 속령에 해당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2. 역사

1861년 출생인 시라세 노부는 일본 육군 소속의 군인으로, 1892년 전역 후에는 전문 탐험가로서 활동하며 당시로서 개척되지 않았던 쿠릴 열도를 탐사했으며, 격오지에 캠프를 만들어 장기 야영하거나 알래스카로 밀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괴혈병과 폭풍우 등으로 대원들이 여럿 실종,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원래 최종적으로 북극점을 탐사하고자 했으나, 로버트 피어리 등이 이미 북극점을 탐사했다는[1] 소식을 듣고 목표를 남극점으로 바꾸었다. 그는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호응받지 못하고 성금을 모아 탐사를 준비했으며, 1912년 1월 시바우라에서 카이난마루([ruby(開南丸,ruby=カイナムマル)])호를 타고 호주 시드니뉴질랜드를 거쳐 남극에 도달했다.

시라세 탐험대는 약30명(28명이 유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 사할린 아이누인 시스라도가(로마자: Sisratoka, 가나: シㇱラトカ, 1875 · 1876 ~ ?)-일본식 성명하나모리 신기치([ruby(花守,ruby=ハナモリ)] [ruby(信吉,ruby=シンギチ)])-와 야요마네구흐(로마자: Yayomanekuh, 가나: ヤヨマネクㇷ, 1867~1923.07.09.)-일본식 성명야마베 야스노스케([ruby(山邊,ruby=ヤマベ)] [ruby(安之助,ruby=ヤスノスケ)])- 등이 포함되었다. 탐사대는 당시 가장 널리 이용되던 루트 중 하나인 로스해 루트로 로스 빙붕에 발을 내딛었으며, 본래 남극점을 정복하려 했으나 계획을 철회하고 남위 80도 05분 00초, 서경 156도 37분 00초 지점까지 남하했다. 시라세는 이 지점에 깃발을 꽂고 황거를 향해 요배했으며 야마토 유키하라라는 이름을 지었다.
파일:Yamato Yukihara.png
야마토 유키하라 위치.
지도에서 알 수 있듯, 실제 대륙이 아니라 빙붕이다.

시라세 본인은 일본의 야마토 유키하라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으나, 그가 탐사했던 곳은 땅이 아니라 빙붕 위 얼음이었을 뿐인데다 그의 주장은 영토 확장에 적극적이었던 당대 일본 정부에서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대 영국 등이 남극 대륙상에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일본 정부에서 '남극에 대한 각국의 탐사 및 선언 등은 각국의 영유권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와 별개로 이들의 '탐험' 자체는 애국의 상징이 되어 일본 국내에서 확장주의의 프로파간다로 널리 인용되었다. 1935년 11월 22일자 일본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기사는 "시라세 중위가 남극 탐험 당시 '점령 명명(占領命名)'한 '카이난만([ruby(開南灣,ruby=カイナムワン)]/[ruby(開南湾,ruby=かいなんわん)])', '오쿠마만([ruby(大隈灣,ruby=オホクマワン)]/[ruby(大隈湾,ruby=おおくまわん)])', '야마토 유키하라' 3곳 지명을 미국 지리학회가 승인하였다. 이 명칭이 세계지도에 등록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 지명이 아직도 국제 지명으로 남아 있다.

그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정부에 영유권 주장에 대해 건의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정하면서 남극의 영유권은 완전히 부정되었으며, 주권 회복 이후에도 일본은 오히려 남극의 평화 이용을 추구하는 남극조약 체결에 참여하였다.

1965년에 그가 탐험하던 로스 빙붕 지역 일대의 해안선이 '시라세 해안(白瀬海岸, Shirase Coast)'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2012년에 일본 국립극지연구소(国立極地研究所)에서 시라세 노부의 남극 원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야마토 유키하라를 공식 지명으로 등재하는 것을 추진하였다.


[1] 나중에는 피어리 역시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