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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2-08 19:02:26

야리히 반 리아우케마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야리히 반 리아우케마
Jarich van Liauckema
파일:Portret_van_Jarich_van_Liauckema.png
성명 야리히 반 리아우케마
Jarich van Liauckema
출생 1558년 12월 17일
스페인령 네덜란드 프리슬란트 리아우케마주 섹스비에룸
사망 1642년 8월 24일
네덜란드 공화국 프리슬란트 섹스비에룸
아버지 셸테 반 리아우케마
어머니 엘 반 데케마
배우자 슈요크 반 카밍하
자녀 엘, 트린
직위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 장성, 쥣펀 총독.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네덜란드의 귀족.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 스페인군에 가담해 네덜란드 공화국과 대적했지만, 12년 휴전 협정 성립 후 네덜란드 공화국에 귀순했다.

2. 생애

1558년 12월 17일, 스페인령 네덜란드 프리슬란트 리아우케마주 섹스비에룸에서 지역 유지인 셸테 반 리아우케마와 세 번째 아내 엘 반 데케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569년 바라델의 대리 그리트만( grietman: 지방 행정관이자 판사)을 맡다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발발했을 때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가 1577년 반란군의 공격을 피해 올덴잘로 도주했고, 1579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야리히는 1580년 프리슬란트에서 플란데런으로 망명한 뒤 스페인군에 입대했다. 그 후 소위를 역임하다가 1582년 처남 티테 반 카밍하와 함께 요한 밥티스트 폰 탁시스의 군대에 배속되어 한 개 중대 지휘를 맡아서 스틴베이크 공략전에 참여했다. 또한 1585년 겨울에 프란시스코 베르두고가 프리슬란트로 탁시스를 파견했을 때, 탁시스 휘하 대위를 맡아 1586년 1월 17일 보크숨 전투에서 덴마크인 스틴 말테센이 동원한 프리지아 민병대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588년 봄 포위전 도중에 탁시스가 전사한 후, 야리히가 그의 뒤를 이어 쥣펀의 총독이 되었으며, 이 시기에 중령으로 진급했다. 1591년 초, 스페인군이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병사들에게 급료를 제대로 주지 못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자,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는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쥣펀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그는 9,000보병과 1,000기병을 선박 100척에 싣고 아이셀강을 따라 그곳으로 진군했다. 1591년 5월 19일 쥣펀에 도착한 마우리츠는 포위 공격에 착수했고, 야리히는 이에 맞서 항전하다가 적군이 대포 30문을 일제히 발사해 쥣펀 시에 큰 타격을 입히자, 전의를 상실하고 5월 30일에 항복했다.

쥣펀을 적에게 내주고 풀려난 후, 야리히는 그가 정당한 이유 없이 도시를 넘겨줬다고 여긴 프란시스코 베르두고의 신임을 잃었다. 베르두고는 보고서에서 야리히의 이름을 언급하길 거부했다. 또한 그는 측근들로부터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를 만나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다. 1594년 쿠보르던을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한 뒤, 베르두고는 트벤터에 있는 군대와 함께 주둔하면서, 야리히와 보병 400명을 흐로닝언으로 보냈다. 야리히는 흐로닝언에서 도시 동쪽의 슈이텐슈이버스크바르티에에 주둔했던 스페인군 900명도 지휘했다.

1594년 5월 22일, 마우리츠의 군대가 흐로닝언 인근 헬프만에 도착했다. 이에 야리히는 네덜란드 총독이 있는 브뤼셀에 구원을 요청했고, 네덜란드 총독은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1]는 구원군을 보내주겠다고 밝혔다. 이후 흐로닝언 내에서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평화 협상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 의견 충돌이 심해지자, 슈이텐슈이버스크바르티에의 스페인 군인들이 협상을 방해하기 위해 도시에 들어왔다. 야리히는 군인들이 민간인들과 충돌하는 걸 가까스로 저지했고, 시의회와 연대를 유지했다.

그 후 마우리츠가 흐로닝언 공방전에 착수했고, 야리히는 이에 맞섰지만 구원이 끝내 오지 않고 7월 15일 네덜란드군이 라벨린을 폭파하자, 어쩔 수 없이 평화 협상에 나섰다. 7월 23일 항복 조약이 체결되었고, 도시는 네덜란드군의 손에 넘어갔다. 야리히는 군인들이 완전히 무장하고 깃발을 휘날리고 북을 치며 트벤터에 있는 베르두고의 군대로 호송되는 조건을 걸고 귀순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을 온전히 이끌고 올덴잘로 갈 수 있었지만, 라인강을 건너 계속 가야 했다. 3개월 동안 강 북쪽에서 군사 행동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리히가 흐로닝언을 떠난 뒤 추가적인 군 경력에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15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야리히의 군사 경력은 리아우케마주의 가택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었는데, 당시 그는 네덜란드 총독 알브레히트 7세 밑에서 여전히 중력으로 복무했다. 1604년, 야리히는 처남 아담 반 파펜로드와 함께 레이우아르던으로 여행을 가서 여동생 안나와 그녀의 남편 체프케 반 고슬링가의 묘비를 의뢰했다. 처남 위츠 반 카밍하의 서신에 따르면, 야리히는 1605년 파더보른에 있었다. 1611년, 야리히는 가족과 가재도구를 가지고 브라반트로 여행하겠다는 요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1609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야리히는 프리슬란트로 돌아갔다. 그는 1614년 가문의 영지인 리아우케마 주를 되찾으려 했다. 1580년 네덜란드 반란군 지도자 디에데릭 소노이가 리아우케마주를 파괴한 후, 리아우케마 주는 나중에 재건'되었고, 야리히의 큰 누나 슈주크가 두 번째 남편 오프케 반 파이츠마와 함께 리아우케마주로 이사했다. 1599년 그녀가 죽은 후, 그녀가 첫 번째 남편 홈 반 캠스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티알링 반 캄스트라기 리아우케마 일대를 물려받았다. 1614년 티알랑이 사망한 직후, 야리히는 자신이 마땅히 리아우케마주를 상속받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처음에는 소용이 없었지만, 1618년에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게 증명되면서 리아우케마 총독을 맡게 되었다.
야리히는 가톨릭 신자로 남았지만, 1633년 네덜란드 공화국군 사령관 에른스트 반 나소디츠의 장례식에 참석했기에 개신교 인사들과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가톨릭의 사명에 헌신했다. 가령, 리아우케마 주의 가옥 기록 보관소에는 가톨릭 신자의 법적 지위에 관한 여러 문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는 아마도 자신과 가톨릭 공동체의 지위를 방어하기 위해 이 문서들을 수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618년에 투옥된 사제의 석방 운동을 벌였고, 1633년에는 메펜에서 대항종교개혁의 지도자이자 난민인 예수회 사제 니콜라스 크렙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1642년 8월 24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824년 섹스비에룸 교회에 야리히의 장례식 안내판이 존재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3. 가족


[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