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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9 22:12:58

앤서니 드 루시

성명 앤서니 드 루시
Anthony de Lucy
생몰년도 1283년 ~ 1343년 5월 20일에서 6월 10일 사이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컴벌랜드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컴벌랜드
아버지 토머스 드 루시
어머니 이사벨라 드 볼테비
형제 토머스
배우자 엘리자베스
자녀 토머스, 조앤, 루시
직위 코커머스의 루시 남작, 컴벌랜드 보안관, 아일랜드 보안관, 베릭의 수호자이자 스코틀랜드의 순회판사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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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생애 대부분을 스코틀랜드인과의 항쟁으로 보낸 인물이다.

2. 생애

그의 가문은 링컨셔에 토지를 소유했던 토머스 멀튼에게서 기원한다. 토머스 멀튼은 제1차 남작 전쟁에서 헨리 3세 편에 섰고, 내전이 끝난 뒤 헨리 3세에 의해 잉글랜드 북부 수석 부관이 되었다. 그는 브루프의 휴 드 모빌의 딸이자 컴벌랜드의 에그레몬트와 코커머스 남작인 리처드 루시의 미망인인 에이다와 두 번째로 결혼했으며,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을 에이다가 리처드 루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과 결혼시켰다. 토머스 멀튼의 아들들 중 한 명인 앨런 멀튼은 아내의 권리에 따라 파프캐슬의 영지 절반을 얻었다. 앨런 머튼의 아들 토머스는 성을 루시로 개명했다.

토머스 드 루시는 컴벌랜드의 주요 토지 소유자였으며, 컴벌랜드의 스코틀랜드 귀족 윌리엄 피츠던컨과 요크셔의 스키튼 남작부인 앨리스 드 루밀리의 딸인 아마벨 피츠윌리엄의 증손자였다. 그는 아내 이사벨라 드 볼테비의 지참금으로 랭클리의 영지완 노섬벌랜드의 여러 토지를 받았다. 앤서니는 1283년에 토머스 드 루시와 이사벨라 드 볼테비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301년 상속 재산 일부인 컴벌랜드와 아일랜드의 일부 영지를 아버지에게 받았다. 형 토머스는 1305년에 사망했고, 1308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가족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당시 컴벌랜드는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았다. 앤서니는 1309년과 1311년에 스코틀랜드 서부 변경지대에서 분견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군의 침략에 맞섰다. 1314년 배넉번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기사 작위를 받았고, 배넉번 전투 당시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의 휘하에서 스코틀랜드군과 대적했다. 배넉번 전투 참패 후 보스웰 성으로 피신했지만, 보스웰 성이 함락된 후 생포되었고, 1315년 초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때까지 억류되었다.

1315년 말 헥섬의 방어를 맡았으며, 스코틀랜드 영토를 꾸준히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316년 11월부터 1317년 11월까지 서부 국경지대의 방어를 맡았다. 그는 빠른 기동성을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해 경기병 분견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그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큰 명성을 얻었다. 1318년 7월 20일, 앤서니는 컴벌랜드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기존에 잉글랜드 북부 방위를 맡았던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는 새롭게 떠오른 앤서니와 컴벌랜드 및 웨스트모어랜드에서의 영향력을 놓고 경쟁했다. 1319년 4월, 하클레이는 앤서니의 뒤를 이어 컴벌랜드의 봉나관이 되었다. 같은 해, 둘 다 군대를 이끌고 베릭 탈환전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수 년간 종종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 지역의 다양한 역할을 맡는 등 함께 복무했다. 앤서니와 앤드류는 남작으로서 1321년 5월 15일에 잉글랜드 의회 소환장을 받았다.

1322년 3월 16일, 앤드류 하클레이는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든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생포한 뒤 처형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앤드류는 라이벌인 앤서니가 반군에 동조했다고 비난했고, 왕의 명령을 참칭해 앤서니의 소유물을 몰수했다. 에드워드 2세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앤드류를 질책하고 루시 가문에 영지를 돌려주라고 강요했지만, 앤드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왕의 법정에 앤서니를 상대로 소송전을 제기했다.

1323년 초, 앤드류 하클레이가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로버트 1세와 단독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드워드 2세는 격분해 앤드류 하클레이를 반역자로 규탄했다. 앤서니는 2월 25일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앤드류를 체포한 뒤 재판관에게 넘겼고, 3월 3일에 앤드류를 처형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연금 100파운드와 코커머스 영지, 그리고 앨리스 드 루밀리의 후손으로서 패프캐슬 영지를 받았다. 또한 앤서니는 칼라일 성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어 1328년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으며, 1323년 2월 11일부터 7월 23일까지 컴벌랜드의 보안관을 역임했다.

1331년 2월 27일,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6월 3일 아일랜드에 도착한 그는 아일랜드 영지의 통제력이 많이 느슨해지고 현지 게일인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관리들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걸 보고 엄격한 통제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에드워드3세가 미성년일 때 게일인 귀족들에게 내린 모든 특권을 취소했고, 잉글랜드 왕실의 통제에 잘 따르지 않던 초대 데스먼드 백작 모리스 피츠토머스 피츠제럴드와 윌리엄 버밍엄을 체포해 더블린 성에 가뒀다. 1332년 버밍엄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자 곧바로 교수형에 처했다. 여기에 관리들의 명령을 어기는 자들을 모조리 처형하거나 감옥에 가뒀으며, 세금을 가차없이 거둬들였다. 이에 아일랜드에서는 그의 가혹한 통치를 혐오한 게일인들의 봉기가 빗발쳤다.

1332년 8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재개되자,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와 오랫동안 전투를 벌인 바 있던 앤서니를 소환해 스코틀랜드 국경지대를 지키도록 했다. 1333년 3월 24일에 스코틀랜드 국경에 도착한 앤서니는 분견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약탈을 감행했다. 로크마벤 성 수비대가 약탈을 마치고 철수 중이던 그들의 진로를 차단했지만, 앤서니는 이들을 격파하고 돌아갔다. 1334년 6월부터 9월까지 베릭 성을 방어했으며, 뒤이어 서부 국경지대로 옮겨졌다. 1335년 에드워드 3세와 에드워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으며, 1336년 5월 베릭의 보안관과 잉글랜드 왕국이 통치하는 스코틀랜드 지역의 순회 판사로 선임되어 1337년 말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 또한 베릭셔의 얼스턴 영지를 포함한 스코틀랜드의 여러 영지를 받았다.

1336년, 앤서니는 컴벌랜드와 웨스트모어랜드에서 모집한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남서부를 약탈했고, 1337년에는 갤러웨이를 습격했으며, 컴벌랜드를 침략한 스코틀랜드군을 요격했다. 11월에는 베릭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에든버러를 포위한 적군을 몰아냈다. 1338년 5월 다시 컴벌랜드 보안관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에 퍼스를 점령했다. 의회가 앤서니를 소환하려 했을 때, 컴벌랜드 주민들은 왕에게 그를 소환했다간 스코틀랜드인들의 침략을 막을 사람이 없으니 소환하지 말라고 청원했고,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받아들여 그가 계속 현지에 남아있게 했다.

1340년 8월, 런던에 스털링 성을 탈환하기 위한 군대를 모았다고 보고했지만, 왕실이 군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원정이 실제로 감행되지 않았다. 1341년 11월 보안관에서 물러났지만, 1432년 6월 보병 30명과 궁수 30명으로 구성된 분견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1343년 5월 20일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유지를 위한 위원으로서 선임되었지만 얼마 안 가 사망했다. 6월 10일, 앤서니의 상속인인 토머스 드 루시는 자기 재산을 왕의 손에 넘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