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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1272d><colcolor=#fff> 리투아니아 제1·4대 대통령 안타나스 스메토나 Antanas Smetona | |
출생 | 1874년 8월 10일 |
사망 | 1944년 2월 9일 (향년 69세) |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 |
직업 | 정치인 |
재임기간 | 초대 대통령 |
1919년 4월 4일 ~ 1920년 6월 19일 | |
제4대 대통령 | |
1926년 12월 19일 ~ 1940년 6월 15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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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의 독재자이다. 20세기 초반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다룰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2. 생애
2.1. 학창 시절
1874년 8월 10일 러시아 제국 치하 리투아니아의 우크메르케라는 빌뉴스[1] 북서쪽, 카우나스[2] 북동쪽의 두 도시 사이에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885년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 형편이 안 좋았음에도 가족의 지원과 교육을 받았다. 한때 가족의 바램으로 카우나스의 사모기티아 신학교에 다녔으나 결국 현 라트비아의 옐가바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고등학교에서 만난 요나스 야블론스키스, 빈차스 쿠디르카와 함께 비밀 리투아니아 학생회라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반차르주의 학생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반정부 단체에서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제9고등학교로 편입하여 졸업했다.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고 나서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하여 리투아니아어 서적을 출간하다가 단기간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1902년 대학을 졸업하고 빌뉴스 농업 은행에서 일하면서 1904년 소피야 호다카우스카이테(Sofija Chodakauskaitė)와 결혼했다.
2.2. 초기 활동
리투아니아 민주당의 빌뉴스 당 대표가 되었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리투아니아어 신문 '빌뉴스 신보(Vilniaus žinios)'의 부사장을 맡았으며 1905년에서 1906년까지 주간지 '리투아니아 농민(Lietuvos ūkininkas)'을 편집하였다.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리투아니아 구호 협회 중앙위원회의 부서기장, 후에 서기장이 되었고 독일 동부전선 사령관에게 리투아니아의 자주 국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문서를 전달하였다. 1917년 '리투아니아의 메아리(Lietuvos aidas)'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리투아니아의 독립의지를 고취하였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혁명으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1917년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열린 빌뉴스 국가 평의회에 참석했는데 1919년까지 의장직을 맡았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괴뢰 리투아니아 왕국이 성립되는 동안 그는 독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돌며 리투아니아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1919년 독일 제국이 몰락하자 귀국해 리투아니아 국가평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리투아니아 독립 전쟁 동안 대통령을 지내고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2.3. 독재
1926년 쿠데타를 일으켜 3대 대통령 카지스 그리뉴스를 몰아낸 데 이어 권한대행을 맡은 스툴긴스키스마저 몰아내고 리투아니아의 4대 대통령으로 재취임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신헌법을 제정하고 1929년 총리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Augustinas Voldemaras)까지 몰아내어 절대권력을 손에 쥐었다. 1936년 국민들의 요구로 허수아비 의회를 세울 때까지는 의회도 없이 전권을 휘둘렀다.국가주의자로서 폴란드어 학교들을 폐쇄하고 폴란드인들의 강제 동화를 밀어붙였고 러시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지만 늘어나는 국내 불안, 메멜란트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나치 독일, 그리고 공업화로 성장한 소련의 위협은 소국 리투아니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찼다. 1938년 메멜란트를 독일에 반환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후 잠시 권력을 유지했으나 리투아니아는 결국 발트 3국 점령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
2.4. 망명
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이 가시화되자 독일 동프로이센주로 건너가 나치 독일 정부의 허가를 받아 베를린에 정착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을 의식한 독일 정부에 의해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지당했고 다른 리투아니아 인사들과의 접촉도 매우 경계받았다. 이에 독일의 미국 대사관에 연락하여 미국으로의 망명 허가를 요청하였고 미국 정부는 민간인 자격으로 입국한다는 조건 하에 이를 승인하였다.그는 이를 받아들여 베른, 리스본, 리우데자네이루를 거쳐 뉴욕에 도착했지만 현지의 리투아니아 교민들과 리투아니아 외교관들은 권력을 잃은 독재자에게 더 이상 호감을 가지지 않았고 결국 클리블랜드에 정착했다.
1944년 보일러 과열로 집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유독가스로 인해 사망했다.
3. 평가
독립운동가로서 리투아니아의 독립에 이바지하였고 초대 대통령을 지냈으나 후에 독재자로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이승만과 꽤 흡사하다.[3] 하지만 독재자로서 정적들을 탄압하고 국가주의자로서 비리투아니아계들도 탄압하였으며 권력욕에 눈이 멀어[4] 공업화, 경제 발전이나 해외 투자 등을 제한하여 1940년 리투아니아가 멸망할 때까지 리투아니아는 경제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고 억압적인 독재 때문에 현 리투아니아인들의 평가는 그리 좋지만은 않다.아이러니하게도 후에 자신이 독립시킨 나라를 소련에 팔아먹은 안타나스 스녜츠쿠스와 이름이 같다.
[1] 당시 명칭은 '빌나'.[2] 당시 명칭은 '코브노'.[3] 이승만은 1875년생이고 스메토나는 1874년생으로 한 살 차이다.[4] 당시 리투아니아는 농업국가였고 스메토나의 주 지지층도 농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