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에 나선 주민들과 이를 통제하기 위해 출동한 경기도 경찰국 소속 기동대가 대치하고 있다.
Black, Black, Black... we will show you our right.
검둥이, 검둥이, 검둥이... 우리의 권리를 보여주마!
WE DON'T NEED ANY NIGGERS
GO BACK TO COTTON FIELD
우리는 더이상 깜둥이를 원하지 않는다. (깜둥이들은) 목화밭으로 가라!
-안정리 주민 일동
검둥이, 검둥이, 검둥이... 우리의 권리를 보여주마!
WE DON'T NEED ANY NIG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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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이상 깜둥이를 원하지 않는다. (깜둥이들은) 목화밭으로 가라!
-안정리 주민 일동
1. 개요
1971년 7월 9일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안정리에서 주민들과 인근 주한미군 기지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 소속 흑인 병사들 사이에서 빚어진 대규모 폭력사태.당시 미군 클럽 내 흑인 차별을 문제삼아 흑인 병사들이 물건을 부수고 한국인을 폭행하는 등의 난동이 있었고 난동 직전에 한 흑인 병사가 저지른 한국인 택시 기사 살인 사건까지 겹쳐, 이에 대한 반발과 분노로 주민과 상인들에 의해 흑인 병사들에 대한 집단 폭행들이 이루어졌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 '한국인에 의한 인종차별'로까지 문제가 되었다.
2. 사건 내용
당시 기지촌 클럽[1]들은 미군의 피부색에 따라 "흑인 클럽", "백인 클럽"으로 나뉘어 출입이 제한되었고[2] 또 상대하는 미군의 피부색이 어떠한가에 따라 미군 위안부 여성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나뉘기도 했다.[3]그렇지 않아도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이나 블랙 파워 같은 것이 미 본토에서 들끓고 있었던 1971년 7월 9일 흑인 병사들은 자기들에 대한 차별에 대한 항의로 기지촌 클럽을 돌아다니며 한국인 업주와 종업원을 폭행하고 내부 집기를 부수며 난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80여명의 주민이 부상당했다. 결국 주민과 상인들은 흑인 미군에 대한 반발로 낫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면서 그들을 쫓아냈고 이에 그치지 않고 집단으로 거리를 몰려다니며 길에서 눈에 띄는 흑인들을 습격하여 린치를 가하기까지 하였다.
사실 일부 흑인 병사들의 상점 도둑질 등으로 인해 당시 안정리 주민과 상인들 역시 이들에 대한 불만이 쌓이며 흑인에 대한 이미지 역시 점차 안 좋아지고 있었다.[4] 흑인들은 백주 대낮에 상점의 쇼윈도를 깨고 물건을 쥐고 튀는 일도 가끔 있었다. 거기다가 그 갈등의 극한점에서 한 흑인 병사에 의해 한국인 택시 기사가 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도 모자라 위와 같은 흑인 난동까지 벌어지자 극한에 달했던 주민들의 분노는 폭발하고야 만 것이었다.
주민과 상인들에 의한 일종의 자경단 활동이 며칠간[5] 이어진 뒤 미군 헌병과 경기도 경찰국 소속 기동대가 함께 출동해 공포탄·최루탄 등을 쏘면서 주민들을 진압하였고[6]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주민들은 흑인들에 대한 공격은 멈춘 채 영업을 하지 않고 시위를 이어나갔다. 결국 그해 12월 정부는 ‘기지촌 정화대책’을 발표하였다.
당시 이 사건은 보도 통제로 인해 거의 기사화되지 못했다. 반면 미국 의회의 흑인 의원들은 흑인 병사들에 대한 안정리 주민과 상인들의 불만 내용도 제대로 파악 못 한 채 '한국인에 의한 흑인 차별 사건'이라고 규정한 뒤 한국에 대한 원조를 끊는 등의 모종의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하며 거센 항의를 하였다.
3. 평가
흑백갈등이 흑인-한국인 갈등으로 이어졌고 사건 발생 초기에는 공권력의 관여가 없었던 점까지 LA 폭동과 유사하다. 1992년 LA 폭동 당시 평소에 백인들에게 차별을 당해 온 흑인들이 그 스트레스와 불만을 자기들보다 사회적 위치가 더 아래라고 생각되는 한국인들에게 풀었다는 것이 주된 비판 견해인데 이런 권력 관계가 그보다 21년 전인 1971년에 대한민국의 한 작은 기지촌 안정리에서 앞서 작동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1971년의 미군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이미지가 1992년보다 더 좋을 리 없었고[7] 특히 흑인들은 기지촌에 와서 "본국에서의 억눌림"에 대한 해방감을 느끼는 동시에 자기들 밑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고 여겨지는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8]4. 여담
- 사건 당시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에서 KATUSA(카투사)로 근무했던 어느 소설가가 제대한 뒤에 한 주간지에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연재하였으나 현재 작가명, 소설 제목, 주간지명, 연재 기간, 연재 종료 이후 단행본으로의 출간 여부 등이 일체 불명이다. 모든 것이 불명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워낙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소설이 발굴되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이 사건 자체가 재조사, 재조명되어 좀더 본격적으로 역사화되기를 기원한다.
5. 참고 자료
[1] 이 미군 전용 클럽의 별칭은 "홀(hall)"이었다. 이곳에서는 맥주, 위스키와 럼 등 국산 술들이 미군 판매용 특별 면세 혜택을 받아 매우 저렴한 대신 미군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한국인은 미군이 동반하면 출입이 가능하였다. 그런데 미군들은 안주는 별로 안 시키고 겨우 맥주 한두 캔 정도만 마셔 가며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든지 춤을 추든지 하여 클럽 주인들은 술과 안주를 많이 시켜 수입을 올려 주는 한국인들을 암암리에 손님으로 받아들이곤 하였다.[2] 클럽 안의 음악도 백인 클럽은 포크송, 컨트리 뮤직, 로큰롤, 스탠더드 팝 중심이었고 흑인 클럽은 블루스, 재즈, 소울, R&B 중심이었다.[3] 백인 상대 여성은 흑인 상대 여성이 될 수 있어도 한 번이라도 흑인을 상대했다고 소문이 난 여성은 다시 백인을 상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는 낙인이 찍혔다.[4] 하지만 상점의 매상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도 흑인 병사들 쪽이었다. 적지 않은 월급을 받는 동시에 영외에서는 자유롭게 사복을 입을 수 있었던 당시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하였다. 마스크의 짐 캐리 의상처럼 화려한 원색 의상과 모자를 기지촌 양복점에서 맞추어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놀거나 쇼핑하는 흑인들의 모습은 그때 기지촌의 흔한 풍경이었다. 더 많은 돈을 뿌려 주는 흑인들에게 고마워하면서도 이러한 과소비 성향을 비웃었던 게 당시 주민과 상인들의 양가적인 감정.[5] 대략 3~4일?[6] 어쨌거나 전시가 아닌 평시에 발생한 상황이고 시위에 나선 이들 역시 주둔국 시민인 까닭에 미군 당국은 섣불리 개입할 수 없었다. 겸사겸사 이 기회에 한국인들의 손을 빌려 흑인들의 기를 꺾어 놓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7] 1970년대초 한국의 1인당 2024년의 인도,아프리카에서 경제력 좀 되는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8] 실제로 당시 미군 병사들은 흑백을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너희 한국인은 우리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니 우리를 잘 대해 줘야 한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6.25 전쟁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미군들의 소비가 안정리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던 당시에는 대다수의 한국인들 사이에서 미군에 대한 고마움과 지지가 팽배했기에 미군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