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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5:57:06

안정리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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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에 나선 주민들과 이를 통제하기 위해 출동한 경기도 경찰국 소속 기동대가 대치하고 있다.
Black, Black, Black... We will show you our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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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둥이들은 필요 없다. (깜둥이들은) 목화밭으로 돌아가라!

1. 개요2. 배경
2.1. 주한미군 감축2.2. 미군 내 인종차별2.3. 기지촌 주민들의 불만
3. 전개4. 관련 기사5. 반응
5.1. 한국5.2. 미국
6. 여파7. 여담8. 참고 자료

1. 개요

1971년 7월 9일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안정리[1]에서 주민들과 인근 주한미군 기지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 소속 흑인 병사들 사이에서 빚어진 대규모 폭력사태.

당시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기지촌 클럽 내 흑인 차별을 문제삼아 흑인 병사들이 물건을 부수고 한국인을 폭행하는 등의 난동이 있었고, 이에 대한 반발과 분노로 기지촌 주민과 상인들이 흑인 병사들에 대한 집단 폭행과 시위를 하며 이루어진 사건이다. 즉, 미군 내에서 기승했던 흑인과 백인 사이 인종 갈등이 흑인과 기지촌 주민 사이 인종 갈등으로 전이되며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 '한국인에 의한 인종차별'로 문제시되었고, 후에 박정희 정부기지촌정화운동을 본격화하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다.

2. 배경

2.1. 주한미군 감축

1969년 7월 25일 미국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 선언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에 있어 새로운 변화를 예고했다. 미국의 새로운 대외정책에 따라 주한미군은 휴전 이후 63,000명(실질 주둔병력은 58,000 내외)의 병력을 유지해오다가 1971년 3월 27일 미 제7사단 철수로 20,000명을 감축함으로써 병력은 43,000명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미 제7사단의 철수에 이어 한국에서 미 제2사단을 포함한 미 제1군단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미군 감축으로 미군의 경제력을 매개로 유지되어 온 기지촌 역시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1970년 7월 이미 기지촌 지가는 절반으로 하락, 미군부대 종업원 해고, 상가 폐업 등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 미군 주둔으로 획득한 외화는 직접 군납 1억 달러와 불법 PX 경제 등을 제외하고도 연간 1억 6천만 달러로 대한민국 전체 외화 수입의 20%에 가까웠다.[2] 안정리에는 당시 970명의 성판매 여성과 4,759명의 주민, 캠프 험프리에는 500여 명의 흑인병사를 포함한 1,700명의 미군, 그리고 12개의 클럽이 있었다.

미군 감축에 대응하여 박정희 정부율곡사업과 같이 자주적 전력증강사업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추가적인 미군 감축이 진행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2.2. 미군 내 인종차별

1950년대에서 1960년대를 걸쳐 미국 본토에서 들끓었던 미국 흑인 민권 운동과 흑인 인권 향상 요구는 주한미군 부대의 흑인 병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흑인 병사들은 부대 내에서 백인 병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장교와 고위 간부들은 백인이었으며, 백인 우월주의적 태도와 차별이 존재했다. 흑인 병사들은 승진, 직무 배치 등에서 차별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차별은 그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에 따라 흑인 병사들 사이에서 블랙 파워와 같은 흑인 정체성을 강조하는 운동이 확산되었고, 때로는 백인 병사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영내 흑백갈등은 고스란히 영외로 옮겨졌다. 기지촌 주민들은 주도권을 쥔 백인 입장에서 흑인을 차별적으로 대우하곤 했다. 당시 기지촌 술집과 클럽[3]들은 인종 갈등을 차단하고자 하는 미군의 요청에 의해 미군의 피부색에 따라 "흑인 클럽", "백인 클럽"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는데[4], "흑인 클럽"은 "백인클럽"에 비해 시설적으로 열악했으며, 대우와 시선 역시 좋지 않았다. 미군 위안부 여성들 사이에서는 상대하는 미군의 피부색에 따라 암묵적으로 계급이 나뉘기도 했다.[5] 이러한 차별적 대우에 대해 흑인 병사들은 백인 병사들과 빈번한 폭력적 갈등을 보이거나 "백인 클럽"으로 가 한국인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2.3. 기지촌 주민들의 불만

일부 흑인 병사들의 상점 도둑질과 폭력행위 등으로 인해 당시 안정리 주민들과 상인들의 흑인에 대한 이미지가 점차 안 좋아지고 있었다.[6] 흑인들이 백주 대낮에 상점의 쇼윈도를 깨고 물건을 쥐고 튀는 일도 종종 있었으며, 흑백갈등으로 인한 흑인 병사의 폭력 사건과 집단행동이 계속해서 늘어갔다. 이러한 일들이 잦아질수록 기지촌 주민들의 장사는 점차 어려워졌고, 이에 따른 불만도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1년 7월 9일 오후 10시경 흑인 병사 약 80명이 "백인클럽" 타피스 홀을 습격하고, 안정리 일대에서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가게를 때려부수고 주민에게 폭행을 하는 등 집단난동을 벌여 큰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하였고[7], 결국 주민들의 분노는 폭발하고 만다.

3. 전개

1971년 7월 9일 오후, 평택군 팽성면 안정리에서 흑인 병사와 백인 병사 간의 갈등이 촉발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흑인 병사들이 안정리 수원여관 앞길에서 백인 병사가 흑인 병사와 말다툼 끝에 돌을 던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흑인 병사 약 80~100명이 보복을 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같은 날 10시경부터 약 1시간 30분 동안, 미군 K-6[8]K-55[9] 기지 소속 흑인 병사들은 안정리의 술집과 홀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백인 병사들이 출입하는 전용 술집과 홀 5곳(대표적으로 ‘타피스’ 홀)을 목표로 몽둥이와 칼, 깨진 유리병 등을 휘둘러 실내 집기를 부수고 시설을 파괴했다.

특히, 이들은 백인 전용 홀에 더 나은 밴드와 시설이 있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벌였으며, 이후 기지촌 내 한국인 주민들에게도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 측 추산 2천여만 원 상당의 재산 피해와 7명이 중상, 80여 명이 경상을 입는 등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난동 소식이 전해지자 미군 헌병 약 100명과 한국 경찰기동대 80여 명이 급히 출동해 최루탄을 사용하며 진압에 나섰다.[10] 그러나 흑인 병사들이 부대로 도망치거나 마을로 흩어져 새벽까지 수색전이 이어졌다.

다음 날인 7월 10일, 피해를 입은 안정리 주민 약 3,000명이 상점 문을 닫고 기지 정문 앞에 모였다. 주민들은 "깜둥이들은 필요 없다. 목화밭으로 돌아가라" 등의 인종차별적인 문구의 플랜카드를 들고 항의하며 미군 기지 사령관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이에 미군 당국은 기지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완전무장한 병력 200여 명을 배치했다. 소동 과정에서 미군 헌병은 주민들에게 최루탄 100여 발과 M16 소총 50여 발을 발사해 주민들을 해산시켰다.

4. 관련 기사

平沢(평택)서 黒人兵士(흑인병사)들 集団乱動(집단난동), 조선일보 | 1971.07.10

9일 밤 10시쯤부터 약 1시간 30분 동안 미군 K-6 기지와 K-55 기지 소속 흑인병사 약 80명이 평택군 팽성면 안정리에서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집단난동, 술집들을 때려 부수고 닥치는 대로 주민에게 폭행을 가해 김광식(38·타피스홀 지배인) 씨 등 7명이 중상, 80여 명이 경상을 입은 불상사가 일어났다. 미군헌병 1백여 명과 한국경찰기동대 80여 명이 급거출동, 최루탄을 쏘아 난동을 진압했으나 흑인병사들은 부대와 마을로 도망쳐 새벽까지 수색전이 벌어지는 등 안정리 일대는 유혈과 비명과 최루탄가스로 뒤범벅, 주민들은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샜다. 기지촌 주변에서 종종 흑백분규를 일으켜온 흑인병사들은 이날 오후 5시쯤 안정리 수원여관 앞길에서 백인병사가 흑인병사와 시비 끝에 돌을 던졌다는 사실을 전해듣자 보복을 하기 위해 백인전용 홀을 차례로 습격한 뒤 한국인들에게까지 행패를 부렸다. 중상자 중 김광식 씨는 기물파괴에 항의하다가 칼에찔려 미군 545병원을 거쳐 헬리콥터편으로 부평 121후송병원으로 옮겼으나 위독하다.
平澤基地村(평택기지촌)서 黒人(흑인) 美兵(미병)들 集團(집단)난동, 경향신문 | 1971.07.10

미군 기지촌에서 9일 밤 미군인간의 흑백분규가 일어나 흑인 병사들이 한국인이 경영하는 점포를 마구 때려 부수고 주민들에게도 행패를 부려 쌍방이 5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2천여만 원의 재산 피해(피해자 측 추산)를 내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주민들은 미군들의 이러한 난동에 항의, 10일 상오 상점 문을 닫고 데모를 벌였다.

9일 하오 9시 40분쯤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안정리에서 이웃 미 제○부대 소속 흑인병사 1백여 명이 몽둥이와 칼, 깨어진 유리병 등을 휘두르며 ‘타피스’ 홀 등 백인 미군 전용 5개 소의 홀에 난입, 집기 등 실내장치를 닥치는 대로 때려부순 후 주민들에게도 행패를 부려 ‘타피스’ 홀 지배인 김광식(38) 씨 등 한국인 종업원 3명이 중상, 50여 명이 경상을 입었다. 흑인병사들은 자기들이 출입하는 홀보다는 백인들이 출입하는 홀이 밴드 등 시설이 좋은 데 불만을 품어 이날 백인들이 술을 마시며 놀고 있는 곳에 난입, 난동을 부렸다.

흑인병사들의 난동으로 큰 재산피해가 나자 이를 지켜보던 주민 2천 5백여 명은 이들에게 돌을 던지며 기지 정문까지 쫓아갔는데 기지 미 헌병 1백여 명이 출동해 주민들에게 1백여 발의 최루탄과 M16 소총 50여 발을 발사, 하오 11시 반경 주민들을 해산시켰다.

상점 문을 닫은 안정리 주민 3천여 명은 낮 12시 다시 기지 정문 앞에 모여 “흑인들은 목화밭으로 돌아가라”는 등 플래카드를 들고 기지 사령관과의 면담을 요구하기도 했다. 미군 당국은 기지 정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완전무장한 미군 2백여 명을 배치했다. 이 소동으로 미군 흑인병사 3명도 중경상을 입었다.

한편 난동사건에 격분한 주민 5백여 명은 10일 상오 6시 반부터 1시간 동안 "흑인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기지 정문에서 데모를 벌이다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피해를 입은 5개 홀 업주들은 피해액이 2천여 만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너무 큰 검은 傷處(상처), 경향신문 | 1971.07.13

미군 흑백병사의 충돌로 생긴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안정리 기지촌 불상사는 3일이 지나도 가시지 않은 분노 속에 행패로 박살이 나고 뒤엎어진 흔적이 그대로였다.

현지 진상조사에 나선 한국인권옹호협회는 피해 현장을 돌아보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었고 난동 병사들의 소속 부대인 캠프 험프리 부대장 존 C 매크워더 2세 대령 등을 만난 뒤 "이 난동은 묵과할 수 없는 비인도적 행위로 주동자 색출 처벌과 피해보상을 요구한다"고 했다. 또 국제인권옹호한국연맹도 현지 조사 뒤 주한유엔군 사령관 마이켈리스 대장에게 항의문을 보내고 ①난동 책임자 색출 처벌 ②보상(약 3천만 원) ③금후의 조치 등을 요구했다.

이 조사단들은 미군 헌병들이 이 난동에 항의하면서 부대 앞에 몰려든 주민들을 해산한다고 1백여 발의 총을 쏘았다(9일 하오 11시~10일 상오 2시 사이)는 주민들의 주장에 따라 조사한 결과 이 총탄이 국제양행(주인 방호용·안정리123-6)의 쇼윈도와 윤언년 씨(39·안정리산10)가 경영하는 술집 유리창을 꿰뚫는 등 공포 아닌 수평 발사도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총알 자국과 50여 개의 탄피를 증거물로 삼기로 했다.

세븐클럽 주인 박연희 씨(46)를 대표로 한 주민 자체 피해조사반들은 한결같이 "흑인 병사들은 계획적으로 홀을 부쉈다"는 주장인데 가장 피해를 크게 입은 루피스의 경우 9일 밤 9시 반쯤 한창 스트립쇼가 무르익어갈 무렵 흑인 병사 50~60명이 몰려와 무대장치, 전자오르간, 악기, 의자, 술병 등 닥치는대로 뒤엎고 때려 부쉈다. 40분 만에 물러났던 이들은 두 번째로 또 30명가량이 몰려와 난동을 부렸으며 세 번째 몰려와서는 지붕에까지 올라가 소란을 떨었다. 1시간 반 동안의 난동을 겪는 동안 루피스홀만도 전자오르간, 스테레오 장치, 냉방 장치 등 1천3백만 원의 피해를 입었고 다른 4개 홀도 2백만~8백만 원의 피해를 내 모두 3천3백여만 원의 피해를 냈다고 피해자들은 주장했다.

사건 발생 3일이 지난 13일 현재 미군들의 외출이 금지되어 조용해진 거리엔 미국 CBS 방송 등 외국 기자들이 취재 활동을 했고 미8군 법무감실의 매거리 대위 등이 현장 진상조사에 바빴다.

5. 반응

5.1. 한국

사건 직후 한국 신문은 사건 원인을 “흑인병사가 품고 있는 열등감의 빗나간 과열 현상”으로 진단하면서 주민들의 억울함을 지지하는 기사가 실렸다. 또한 “검둥이는 서럽다. 그러나 기지촌 주민은 더 서럽다”라는 식당 주인의 말 등을 인용하여[11], 사건의 배경으로 흑백 간 인종감정, 흑인 전용 홀의 낙후한 시설, 백인 전용 홀 업자 간 과잉경쟁, 기지촌 경기침체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의 보도 통제로 인해 사건 이후의 후속 처리나 논평 등은 거의 기사화되지 못하였다.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이 이미 감축된 상황에서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주한미군의 추가 감축이 이루어진다면 박정희 정부의 입지와 대한민국의 안보 측면에서 득될 것이 없다는 판단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5.2. 미국

미8군 심리작전부대의 판단은 기지촌 주민들을 감싸던 한국 언론과 달랐다. “한국인들은 차별적 관행으로 기존 인종 문제를 악화”, “한국인은 일반 미군에 대해, 특히 흑인에 대해 종종 격렬하게 시위" 등의 워딩으로 기지촌 주민들을 인종갈등의 가해자로서 규정하였다.

미군 당국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열흘간 군인들의 외출을 금지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미군에 대한 처벌이지만, 실제로는 기지촌 주민들과 한국 정부에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기지촌 주민들의 대다수가 주소비층인 미군에 생계를 의지하는만큼 미군의 외출금지(오프리밋, off-limits)는 사실상 기지촌 전체에 대한 영업정지와 같은 위력을 가졌기 때문이다.[12][13] 미군은 안정리 사건 이후 오프리밋 방식과 한국 정부에 대한 압박을 통해 클럽의 인종차별을 강하게 규제했고 오프리밋의 위력을 아는 기지촌 주민들은 이에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6. 여파

6.1. 한미관계에 미친 영향

미국 의회의 흑인 의원들은 안정리 주민들의 불만 내용과 사건의 전말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해당 사건을 ‘’'한국인에 의한 흑인 차별 사건'’’으로 규정하고, 한국에 대한 원조 중단 등의 조치를 요구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특히, 7월 14일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1억 달러[14] 추가 군원 제공을 다룬 브룸필드 수정안이 12대 14의 근소한 표차이로 부결되는 등 한국에 직접적인 불이익이 가해졌다.[15]

로널드 델럼스 의원은 미국 언론기관에 배부한 개인성명에서 “안정리 사건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흑인 병사에 대한 차별 대우는 오래된 일이며, 한국정부에서 이러한 문제를 경솔하게 다루며 인종차별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한국 정부가 흑인 병사들에 대한 대우 문제를 적절히 처리할 때까지 어떠한 대(對)한 지원도 보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한국인이 흑인을 차별한 것에 대해 보복적 조치로 반대표를 던졌다는 요지이다.[16] 델럼스 의원 외에도 적지 않은 미 의회 의원들이 한국에 대한 미군 주둔과 개입에 의문을 제기하며, 한국 정부와 미군 양측에 기지와 기지촌을 둘러싼 변화를 요청했다.

6.2. 기지촌정화운동

미군 철수와 군원 감축 등 연달아 한미관계가 흔들리는 듯한 조짐이 드러나자 박정희 정부는 큰 위협을 느낀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과 반공주의를 내세워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미국의 지지와 미군 주둔이 핵심적이었기 때문이다. 안정리 사건 이후, 주한미군과 미국으로부터 한국 정부에 기지촌 문제를 해결하라는 압박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부는 한국 정부에서 흑인 병사 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개선 의지가 있음을 반드시 보여줘야 했고, 이를 위해 꺼내든 카드가 기지촌정화운동이었다.

기지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정부는 미군 상대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단속과 성병 검사 및 치료를 강화했으며, 기지촌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종차별금지교육도 실시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지촌정화운동 문서 참고.

한편, 언론은 정부의 입장에 발맞춰 마약, 밀수, 무질서, 기동단속반 설치 등 기지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기지촌이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기지촌 주민들은 범죄자 등과 같이 부정적으로 묘사되었고, 한국 국민들에게 기지촌과 기지촌 주민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를 통해 기지촌을 한국 사회로부터 게토화시킨 것이다.

결국, 미군 내 인종 갈등이 기지 밖 기지촌으로 전이되며 발생한 안정리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기지촌 주민들은 졸지에 가해자로 지목되며 사건의 책임을 온전히 떠안아야만 했다.

7. 여담


8. 참고 자료



[1] 현재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2] 1970년, 미군 철수 이후 대책에 관한 국회 질의 답변에서 경제기획원 장관이 답변한 내용에 따름[3] 이 미군 전용 클럽의 별칭은 "홀(hall)"이었다. 이곳에서는 맥주, 위스키와 럼 등 국산 술들이 미군 판매용 특별 면세 혜택을 받아 매우 저렴한 대신 미군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한국인은 미군이 동반하면 출입이 가능하였다.[4] 클럽 안의 음악도 백인 클럽은 포크송, 컨트리 뮤직, 로큰롤, 스탠더드 팝 중심이었고 흑인 클럽은 블루스, 재즈, 소울, R&B 중심이었다.[5] 백인 상대 여성은 흑인 상대 여성이 될 수 있어도 한 번이라도 흑인을 상대했다고 소문이 난 여성은 다시 백인을 상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는 낙인이 찍혔다.[6] 하지만 상점의 매상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도 흑인 병사들 쪽이었다. 적지 않은 월급을 받는 동시에 영외에서는 자유롭게 사복을 입을 수 있었던 당시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하였다. 마스크짐 캐리 의상처럼 화려한 원색 의상과 모자를 기지촌 양복점에서 맞추어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놀거나 쇼핑하는 흑인들의 모습은 그때 기지촌의 흔한 풍경이었다. 더 많은 돈을 뿌려 주는 흑인들에게 고마워하면서도 이러한 과소비 성향을 비웃었던 게 당시 주민과 상인들의 양가적인 감정.[7] 平澤서 黒人美兵 80명亂動, 매일경제 | 1971.07.10[8] 캠프 험프리스[9] 오산 공군기지[10] 현재도 미군 기지 밖의 사건에 대해서는 한국 경찰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나 (기지촌에서 발생한) 미군 또는 미국 시민권자가 관련된 경우에는 미군 군사경찰이 사건 해결에 관여하곤 한다. 특히 이 당시에는 영외인 기지촌까지 미군 경찰력이 개입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11] 평택 黒人兵士亂動서 본 實態 黒白紛糾┄ "基地村民은 더 서럽다", 동아일보 | 1971.07.13[12] 기지촌은 미군 부대 밖,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이므로 미군이 경찰권과 사법권을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는데, 이때 오프리밋은 미군 측에서 우회적으로 기지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13] 미군 위안부였던 손영순(가명) 할머니는 "색시 생활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가 그때라니까. 우리는 다 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어. 근데 미군들이 안 나오니까 어떡해. 먹고살 길이 막막했지”라고 말했다.[19][14] 1970년과 1971년에 걸쳐 각각 5천만 달러[15] 差別은 우리가 당하고 있다, 조선일보 | 1971.07.21[16] "對韓追加軍援 부결된건 韓國人의 黑人 차별 때문" 美黒人議員..., 경향신문 | 1971.07.16[17] 1970년대초 한국의 1인당 2024년의 인도,아프리카에서 경제력 좀 되는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18] 실제로 당시 미군 병사들은 흑백을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너희 한국인은 우리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니 우리를 잘 대해 줘야 한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6.25 전쟁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미군들의 소비가 안정리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던 당시에는 대다수의 한국인들 사이에서 미군에 대한 고마움과 지지가 팽배했기에 미군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