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아카시 불꽃축제 압사 사고 明石花火大会歩道橋事故 | |||
<colbgcolor=#000> 발생 일시 | 2001년 7월 21일 | ||
발생 위치 | 효고현 아카시시 아사기리역 남측 육교 | ||
유형 | 압사 사고 | ||
원인 | 통행 수단 및 통제 인원 부족 | ||
인명 피해 | 사망 | 11명 |
부상 | 183명(또는 247명)[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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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1년 7월 21일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 아사기리역 남쪽 출구 방면 육교에서 발생한 압사 사고.2. 상세
당시 아카시시에서는 사고 발생 하루 전인 7월 20일부터 '제 32회 아카시시민 여름축제 불꽃놀이 대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축제 첫날은 평일이었기 때문에 다소 혼잡은 있었지만 큰 사고 없이 지나갔는데 결국 주말이 겹치는 이튿날에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7월 21일 오후 8시 30분경 아사기리역 남쪽 출구로 이어지는 다리에서 역에서 나오려는 인파와 불꽃축제를 즐기고 돌아가던 인파가 겹쳐 위 사진과 같이 어마어마한 혼잡이 발생했고 결국 군중 붕괴가 일어나 11명이 압사하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다.사고 원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사고 발생지의 지형 구조에 있었다. 불꽃축제가 개최된 오오쿠라 해안과 오오쿠라 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아사기리역 사이에는 국도 2호와 산요 본선, JR 고베선을 낀 열차 승강장이 차지하고 있었고 보행자가 다닐 수 있는 길은 오직 아사기리역 남쪽 육교 하나뿐이었다. 남쪽 육교를 이용하지 않고 아사기리역으로 가는 길은 동쪽 건널목을 건너거나 서쪽 보도교를 건너 접근하는 방법이 있지만 둘 다 최소 1km를 더 걸어서 멀리 돌아가는 길이었던 탓에 역까지 직통으로 가는 남쪽 육교에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경비 부실에 있었다. 아카시 불꽃축제의 경비는 민간경비회사 '니시칸'(현 JSS 오사카지부)과 효고현 경찰이 담당했는데 조사 결과 니시칸은 경비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2000년 12월 31일 같은 장소에서 개최됐던 '21세기맞이 카운트다운 불꽃축제'의 계획서를 돌려막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심지어 그 계획서마저 다른 행사에 쓰였던 것을 운용한 물건이라 카운트다운 불꽃축제 당시에도 제대로 경비가 안 되어 부상자가 발생한 바 있었다. 카운트다운 불꽃축제의 인파는 약 5만 5천명이었고 아카시 불꽃축제의 인원은 약 13만명이었는데 5만 5천명의 인파를 관리 못 해 부상자를 내고도 똑같은 계획서를 2배 이상 규모의 행사에 때웠으니 인명 사고가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효고현 경찰은 경비계획서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대충 통과시켰으며 폭주족 및 경범죄 단속에 293명을 배치하고 인파 관리에는 36명을 배치하는 등 인파 관리에 소홀한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아카시경찰서장은 "혼잡 경비가 하는 일이 뭐가 있냐? 아무것도 안 하잖아." 라며 인원 감축을 자행했고 최종적으로는 고작 16명만이 인파 관리에 투입되었다. 인원 감축에 불안감을 느낀 경비본부 지휘관은 서장에게 혼잡 경비의 중요성을 호소했지만 서장은 "무슨 일이 있으면 기동대를 출동시키면 돼."라며 지휘관의 의견을 찍어눌렀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날 때까지 기동대가 출동하는 일은 없었다.
3. 이후
유족들은 아카시시와 효고현 경찰, 니시칸을 상대로 고소했고 긴 법정공방 끝에 약 5억 6800만엔의 손해배상 명령과 관계자의 실형 선고를 받아냈다. 그런데 당시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경비본부 지휘관과 니시칸 사장, 아카시 시청 직원 3명에게만 실형이 선고되었고 정작 상술한 망언을 내뱉으면서 인파 관리 인원을 감축한 최고책임자 경찰서장과 현장을 상시감독하여 사고를 방지할 의무를 태만한 부서장은 처벌을 면했다. 유족 측은 서장과 부서장을 상대로 고베검찰심사회를 통해 기소상당(起訴相当)[2]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기소상당이 들어오는 족족 불기소를 때리며 유족 측의 항의에는 귀를 막는 태도로 일관했다. 기소상당과 불기소가 반복되는 끝없는 개미지옥에 빠졌던 유족들은 2010년에 법률이 개정되어 '2회 이상 기소상당이 의결되었을 경우 강제기소한다'는 조항이 생기고 나서야 겨우 부서장을 재판에 부칠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부서장은 2007년에 이미 사망한 서장을 방패로 내세워 "잘못을 저지른 건 서장이고 나는 옆에서 보좌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최고재판소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부서장을 면소(免訴)처리함으로써 부서장의 책임이 묻힌 채 사건이 종결되고 말았다.비록 경찰서장과 부서장 둘이 사고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결말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 사고는 일본 사회에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남겼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경찰 및 경비회사의 행태가 폭로되면서 전국적으로 경비 재점검을 실시했고 다른 불꽃축제나 콘서트 등의 행사들도 대부분 경비가 부실하다는 사실이 밝혀져 각지에서 행사가 무더기로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경비업무에는 아무런 권한이 없어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기존 법률의 취약점과 여태까지 체계적인 대응책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혼잡을 처리해 왔던 사실이 드러나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몰아넣었고 시민 여론과 정치권이 한 목소리가 되어 현행법률의 개선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2002년에는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혼잡경비 매뉴얼이 정립되었고 2005년에는 경비업법과 국가공안위원회규칙의 대대적인 개정이 이루어져 경비업무의 책임이 강화되었다.
4. 기타
- 사고 이후 육교 끝자락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왼쪽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는 무릎 꿇은 채 벽에 기대어 축 늘어져 있는 듯한 어린아이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 사망자 11명 중 9명은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이었고 두 명은 70대 노인이었다. 유족 대표 시모무라 세이지는 "두 살 배기 아들이 내 품에서 짓눌려 죽어갔다"며 사고의 끔찍함을 증언했다.
- 70대 노인 사망자 중 한 명인 쿠사카에 리츠코는 사고 당시 유모차에 타고 있던 아기[3]를 구하고 사망한 후 사회공헌지원재단으로부터 일본재단상이 수여되었다. 아이의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육교를 지나던 중 사고에 휘말려 아이와 엄마가 떨어지게 되었는데 리츠코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유모차를 감쌌지만 유모차 위를 덮칠 정도로 압박이 심해지자 아기를 꺼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서 인파에 깔려 사망했다고 한다. 살아난 아기와 아기의 부모는 사고 이후 리츠코의 남편을 찾아갔는데 처음에 아이의 엄마는 '저렇게 사람 많은 곳에 왜 아기를 데려왔냐' 고 꾸중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4] 리츠코의 남편 요이치로는 아이를 손자처럼 너무나도 예뻐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뉴스에 인터뷰를 하면서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 사고 당시 육교에 설치된 CCTV 영상이 기록된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는데 사고 직후까지 멀쩡히 존재했던 이 비디오테이프는 어느새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유족 측은 비디오테이프의 존재를 알아내어 진실규명을 요구했지만 경찰서장과 부서장은 "테이프 같은 건 없다"며 끝까지 잡아떼었고 결국 비디오테이프의 행방은 수수께끼로 남고 말았다. 당시 아카시 경찰서에 재직했던 한 전직 경찰관이 "내가 비디오테이프를 부서장에게 제출했다. 부서장은 비디오테이프를 받아들더니 일단 맡아두겠다며 맨 아래 책상 서랍에 넣었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부서장이 증거인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찰관은 "부하인 내가 함부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며 그 동안 진실을 숨겼던 경위를 밝혔고 유족 측 변호사는 "그 비디오테이프만 있었어도 부서장은 유죄판결을 받았을 것"이라며 부서장에게 동조한 경찰관의 행동을 강하게 비난했다. 음성 기록은 일부나마 남아 있는데 "아이가 죽는다구요"라며 울부짖는 여성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다.
- 일본에서는 사람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넘어지는 현상을 쇼기에 빗대어 '쇼기패 무너뜨리기(将棋倒し)'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는데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 사고를 보도하면서 해당 표현을 인용하자 일본쇼기연맹측에서 "쇼기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며 항의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NHK는 쇼기연맹의 항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달리 대체할 단어가 없어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 넘어지는 사태"라는 식으로 길게 풀어서 보도했고 이후 군중 눈사태(群衆雪崩)라는 단어를 만들어 해당 표현을 대체하게 되었다.
- 사고 직후 언론 등지에서 '금발로 염색한 청년들이 뒤에서 고의적으로 민 탓에 사고가 터졌다', '이 청년들이 육교 지붕 위에 올라가 소란을 피웠다'는 등의 보도가 나왔는데 실제로는 지붕 위에 올라간 금발 청년들은 육교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사고 사실을 알리며 '119에 신고해 달라', '보도교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고 외치던 중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니시칸 사장이 지어낸 허위사실을 언론에서 그대로 받아 적으면서 생긴 해프닝으로, 진실이 알려진 뒤 책임회피를 위해 어설픈 잔꾀를 부린 니시칸 사장과 사실관계 확인도 안 하고 마구잡이로 기사를 내보낸 기레기들은 분노한 시민들에게 실컷 욕을 먹었다.
- 아카시 불꽃축제 사고 이전의 카운트다운 불꽃축제 당시 육교 상황을 촬영한 영상이 존재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아비규환이었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내세우지 않아 기어이 인명사고를 낸 아카시시와 경비업체 그리고 효고현 경찰은 제정신이 아니라고밖에 할 수 없다.
- 유족대표 시모무라 세이지는 2023년 10월 29일 이태원 압사 사고 1주기를 맞아 한국 이태원과 시민광장을 방문하여 "같은 사고를 겪은 유족으로서 마음이 아프다"며 슬퍼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시급히 원인 규명을 해서 두 번 다시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 피해자와 유족들에게는 장기간에 걸친 지원이 필수적이고, 최대한 빨리 상담센터를 열어서 심리적 케어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함과 동시에 "일본 또한 경비 실태를 재점검하고[5] 혹시라도 일본인 피해자가 있다면 최대한 지원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
[1] 2010년 최고재판소 판결문에는 부상자 수가 183명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NHK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247명이라고 표기하는 등 부상자 수 표기에 차이가 있다.[2] 검찰이 불기소처분한 사건에 이의를 제기하면 검찰심사회에서 해당 불기소 건의 심사에 들어간다. 심사위원의 3분의 2(8명) 이상이 기소할 필요가 있다(기소상당), 또는 더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불기소불상당)고 판단했을 경우 검찰 측에 재수사 조치가 들어가는데 검찰이 또다시 불기소처분을 할 경우 재심사에 들어간다.[3] 당시 생후 2개월(2001년 5월생), 야마시타 쇼마.[4] 실제로 주변에서도 엄청나게 혼났고 아기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리츠코가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고 한다.[5]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에 시부야 할로윈 인파에 대한 일본 경찰의 대응을 해당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한국에서 일어난 이태원 압사 사고의 여파로 일본도 경찰 및 민간 경비업체의 인원을 증강하였고 일본 시민들도 아무래도 경찰의 통제에 더 잘 따르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전에도 곳곳에 배치된 일명 DJ 폴리스, 스크럼블 교차로의 통제, 경찰관들이 시부야 곳곳의 좁은 골목들을 수시로 순찰하며 인파를 통제하는 등 이태원 사고를 겪은 2022년 한국의 언론들이 주목한 인파 통제의 수단들을 이전에도 꾸준히 시행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