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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19:04:07

아이자와 다다히로

파일:아이자와다다히로.jpg

相澤 忠洋

1926년(다이쇼 15년) 6월 21일 - 1989년 5월 22일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日本人の祖先の生活に思いを馳せ、孤独の中から到達した岩宿こそ、私という一人の人間に刻まれた二十三番目の年輪であった。
「岩宿」は、青春の日の輝かしい思い出であり、また私の人生の記念碑でもある。
일본인의 선조의 생활을 생각하며 달려, 고독 속에서 도달한 이와주쿠야말로 나라는 한 인간에게 새겨진 23번째 연륜이었다.
'이와주쿠'는 청춘의 눈부신 추억이고, 내 인생의 기념비이기도 하다.
아이자와 다다히로 회고록 「이와주쿠의 발견(岩宿の発見)」에서
일본고고학자로, 일본의 구석기 시대에 대한 조사의 단초를 열었던 학자로 일본 열도의 구석기 문화를 처음으로 발견해 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뒷날 얻게 된 불멸의 명성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 그는 고고학 전문 교육은 고사하고 청년학교만 마치고 바로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1944년에는 일본 해군에 징집되었고, 이듬해 전쟁이 끝나고 자신이 살던 기류[1]로 돌아왔다. 군마 현에서 행상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고, 구석기 유물을 발견한 것은 1946년의 일이다.

원래 일본 열도에서는 그전까지 구석기 시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은 없었던 듯하다.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지 않은 것은 아니고 그러한 시대가 인류사에 존재했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일본 제국 패망 이전에는 "천황보다 오래된 역사가 있을 수 없다"라면서[2] 알게 모르게 일본 열도에서의 구석기 연구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아이자와가 살던 군마 현이 있는 간토 지방은 화산 분화가 격렬해서 구석기 시대 인간이 살 수 있는 자연 환경이 아니었다고 여겨져서, 일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몬 시대로 여겨졌다. 나오라 노부오 등에 의한 구석기 발견 보고가 있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냐"라는 격렬한 비판만 듣곤 했다.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행상을 하면서 짬짬이 독학으로 고고학을 익혀서 석기 채집에 힘썼는데, 군마 현 기류 시 이와주쿠 적토[3]에서 흑요석으로 된 석편을 발견하고, 어쩌면 이것이 구석기 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짬을 내서 독자적으로 조사에 몰두해, 1949년 초여름에 그곳에서 흑요석 창날 석기를 발견한다.
산으로 오르는 좁다란 길 가까이 와서 적토의 단면에 눈길을 줬을 때 흙 속에 반쯤 파묻힌 이상한 것이 보였다. 다가가서손으로 만져보고 손끝으로 약간 움직였다. 아주 조금 적토가 밀렸는데도 바로 뽑혔다. 그것을 눈앞에서 본 순간 나는 엉겁결에 큰소리를 지를 뻔했다. 정말로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멋진 흑요석제 창날 모양을 한 석기가 아닌가. 완전한 형태를 갖춘 석기였다.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이자와의 회고록 ‘이와주쿠의 발견’ 고단샤, 1969년

1949년 8월 아이자와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당시 학생이던 고고학자 세리자와 조스케(芹沢長介)[4]를 찾아가 자신이 채집한 양면 조정 찌르개나 소형 돌칼 같은 석기를 보여 주었는데, 세리자와 역시 아이자와가 가져온 석기가 분명히 구석기 유물임을 알아 보았고, 즉시 메이지 대학의 교수 스기하라 소스케(杉原荘介)[5]에게 연락했다.

화산 활동이 활발했을 간토에서, 그것도 화산 분화로 퇴적된 적토에서 석기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말에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고, 이거 보통 일 아니라는 생각에 스기하라 교수는 아이자와가 석기를 찾아냈다는 기류 시로 왔고, 9월 11일 - 13일까지 아이자와가 그 구석기 유물을 찾아냈다는 이와주쿠 현지에서, 스기하라, 세리자와, 오카모토 오사무(岡本勇), 아이자와 등 6명이 소발굴[6]을 실시했다. 11일 당일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집요하게 발굴에 파고든 끝에, 스기하라의 손에 의해 달걀 모양의 구석기가 발굴되었다. 오후 4시 45분의 일이었다.
“발굴에 성공, 그저 눈물뿐. 스기하라”
발굴 당시 스기하라가 연구실로 보낸 전보

스기하라가 찾아낸 그 구석기는 훗날 날 부분 간돌도끼(刃部磨製石斧)라고 명명된다. 9월 20일 도쿄로 돌아온 스기하라는 이 발굴 결과를 일본의 주요 신문에 발표했다. 10월 2일부터 10일에 걸쳐, 다시금 스기하라 교수를 대장으로 하는 메이지 대학이 중심이 된 발굴조사대가 이와주쿠 유적의 본격적인 발굴을 실시했다.

그 결과, 구석기의 존재가 확인되고, 조몬 시대보다 더 이전에 토기나 돌촉을 수반하지 않는 석기 문화가 일본 열도에 존재했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이 되어, 일본 열도의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증명되게 되었다. 일본 열도에 사람이 살게 된 것도 순식간에 1만 년 전이라는 갱신세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와주쿠 유적은 3만 년 전의 것으로 일본 열도의 구석기 시대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서 일본의 주요 사적지가 되었다. 현재에도 일본에서는 자국의 구석기 역사를 설명하면서 시대 구분을 무토기시대(無土器時代), 선토기시대(先土器時代),[7] 그리고 이와주쿠 시대(岩宿時代)로 분류하기도 한다. 행상 한 사람이 일본 열도의 잊혀진 역사 하나를 발굴해 낸 것이다. [8]

하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발견이 대서특필되는 와중에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일본 학계나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무렵 일본 전국에 사학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각지 대지주나 대상인, 혹은 지주들이거나, 아니면 교원, 의사, 관료 같은 식자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일본 열도의 역사를 발견해낸 어마어마한 공적을 세웠음에도 학력도 재산도 없었던 아이자와 다다히로를 당시 학계에서는 "장돌뱅이 주제에(行商人風情が)" 등으로 멸시하며 그의 공적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메이지 대학에서 펴낸 편찬의 발굴 보고서에서도 단순 '조사 안내 및 알선자'로만 이름이 올라 있었고, 구석기 시대의 발견은 모두 발굴 조사를 주도한 스기하라 소스케의 공적으로 발표되었다. 심지어 학계 일부 인사나 기류 시 현지 주민들 가운데는 아이자와를 이름이나 팔고 다녔다느니, 사기꾼이라느니 하는 사실무근의 비방까지 나돌았다.

일본의 이와주쿠 유적이 발견되고 18년 뒤인 1967년에야 아이자와에게 제1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吉川英治文化賞)이 수상되었고, 1989년에 사망했을 때는 훈5등 서보장을 수여받았으며, 이와주쿠 유적이 위치한 닛타 군(新田郡) 가사카케 촌(笠懸村)[9]에서는 그를 '명예촌민 제1호'로 추켜세웠다.

1991년에는 아이자와 다다히로 기념관이 개관하였으며, 아이자와 다다히로의 아내[10] 치에코(千恵子)가 그 관장을 맡고, 명예 관장은 생전 그와 함께 이와주쿠 유적을 발굴해냈던 세리자와 소스케가 맡았다. 그리고 재야 고고학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아이자와 다다히로 상이 창설되었다.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밀려난 뒤에도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계속해 자신의 연구 활동을 해나갔고, 만년에 이르러서도 아이자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를 찾아 나쓰이도 유적(기류 시)의 발굴에 힘을 쏟는 등 고고학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3. 기타

후지무라 신이치 날조 사건 당시, 일본 학계 내에서는 "일본 구석기 시대에 대한 조사의 단초를 열었던 아이자와 다다히로로 고고학 연구가 돌아가야 한다"고 격정을 토로한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고.[11]


[1]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원래 도쿄 하네다 출신인데 가마쿠라로 잠시 이주했다가, 이듬해 1935년(쇼와 10년)에 부모가 이혼하여 그 후 아버지와 함께 군마 현 기류로 이주하였다.[2]창조설 신봉자들이 "성경보다 오래된 역사는 있을 수 없다"며 고고학으로 확인된 공룡의 존재나 인류의 진화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였다.[3] 간토 지방의 적토는 관동 롬(loam) 층으로 불리며 1만여 년 이전까지 주위의 화산 분화에 의해 퇴적된 지층을 말한다.[4] 1919~2006. 일본의 고고학 교수로 당시에는 메이지 대학 대학원생이었다. 훗날 도호쿠 대학 교수가 된다. 아이자와는 세리자와로부터 고고학상 조언을 들으러 종종, 기류에서 도쿄까지의 약 120km를 자전거로 당일치기로 왕복하기도 했으며, 평생의 스승이 되었다.[5] 1913~1983[6] 본 조사에 앞선 예비 조사[7] 아직 일본에서 조몬 시대보다 이전의 역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에는 조몬 시대 이전의 시대를 선토기시대 또는 무토기시대라고 불렀다.[8] 여담이지만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적인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발굴된 것은 이와주쿠 유적이 발굴되고부터 30년 뒤인 1978년의 일이다. 물론 1934년에 식민지 조선의 함경북도 종성군에 위치한 동관리라는 마을에서 철도 공사 중에 한반도 최초의 구석기 유적인 동관리 선사유적이 발굴되긴 했지만, 일본은 이를 외면했다. 여기에는 전쟁 전의 일본에서의 구석기 유적 연구에 대한 은근한 백안시도 있었지만, 일본보다 발전이 뒤떨어진 조선에서 내지(본토) 일본보다 먼저 구석기가 전개되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편견도 있었다.[9] 2006년에 인근 마을들을 통합하여 미도리 시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인근 마을들을 통합하여 새로 시를 세운 것인데, 이때 시의 이름 후보로 이와주쿠 시(岩宿市)도 있었다고. 이름의 유래는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이와주쿠 유적이다.[10] 아이자와 다다히로는 생전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처음 결혼한 것은 1955년이고 1973년에 첫 아내가 사망하여 4년 뒤에 재혼했다.[11] 아이자와 다다히로 상 수상자 가운데는 후지무라 신이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구석기 유물 조작이 탄로나면서 상을 박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