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white><colcolor=#dd0c39> 폴란드 제2대 국내군 부사령관 아우구스트 에밀 피엘도르프 August Emil Fieldor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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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5년 3월 20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라쿠프 | ||
사망 | 1953년 2월 24일 (향년 57세) | |
폴란드 인민공화국 바르샤바 모코토프 수용소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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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군인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폴란드군 | |
복무 기간 | 1910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준장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라트비아 독립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1. 개요
폴란드의 군인이다.2.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라쿠프에서 독일계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폴란드 독립운동에 참가해 준군사조직인 소총수연맹 소속이였다. 부사관교육을 수료했다.1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예하 폴란드군단 소속으로 1916년 상사로 진급했고 1년 뒤 장교후보생이 되었고 이탈리아 전선으로 배치되었다가 탈영 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 군사기구에 들어갔다.
폴란드가 독립한 이후 폴란드군에 들어갔고 장교로 임관해 중기관총 중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소비에트 전쟁 당시 다우가프필스, 지토미르 전투에 참가했고 전쟁의 향방을 가를 비아위스토크 전투에도 참가해 공을 세웠다.
전후 1928년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대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32년 중령으로 진급후 빌뉴스 인근에서 대대장임무를 수행했다. 1938년 제12보병사단 제51보병연대장이 되어있었다. 폴란드 침공이후 라돔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했고 고향까지 퇴각했다. 프랑스로 건너가기위해 슬로바키아를 통과했으나 억류되었고 풀려나 프랑스로 이동해 폴란드 서부군이 되었다.
1940년 대령으로 진급하고 망명 정부의 지시로 바르샤바로 돌아와 무장투쟁단을 결성하고 사보타주를 펼쳤다. 규모가 폴란드 국내군으로 확대되어 국내군 산하 전환부서 케디프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바르샤바 지역 친위대, 질서경찰지도자인 프란츠 쿠체라를 암살하는데 성공했다.
소련이 반격을 가할 시기 소련의 통치에도 반대하며 반소투쟁도 전개했다. 바르샤바 봉기 당시 준장으로 진급하고 국내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전쟁 이후 사령관 레오폴트 오쿨리츠키가 해산 명령을 내려 국내군은 해산되었다.
소련군을 피해 발렌티 그다니츠키라는 가명으로 지내다가 NKVD에게 체포되어 우랄산맥에서 유형을 받았다. 1947년 석방되어 가명을 유지하며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평범하게 살았다. 1948년 반공인사들이 사면되었고 병무청으로 가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부하들까지 잡아 고문을 시켜 벨로루시 지역 파르티잔을 살해한 혐의까지 씌워졌다.
결국 재판을 받고 1952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2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시신은 암매장되었고 1953년 스탈린주의자들이 퇴출되었음에도 기소만 중지되었고 명예는 회복되지 않았다. 민주화된 이후 1989년 3월 재심에서 무죄가 되어 명예를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