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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9:56:25

아와국(난카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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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현재 지명

1. 개요

아와국([ruby(阿波国, ruby=あわのくに)], 구자체: 阿波國)은 난카이도에 속한 율령국이다. 현재의 도쿠시마현에 해당한다.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지자 아시카가 씨의 일문인 호소카와 씨가 시코쿠에 거점을 만들게 되었고 호소카와 서류 중 하나가 아와슈고를 맡아 아와국을 다스려나가기 시작했다. 해운을 이용한 운반업이 발달하였으며 목재와 을 이용한 상업으로 상당한 부를 쌓는 것에도 성공했던 지역. 이렇듯 지금과는 다르게 상업적, 문화적으로 매우 번성하였던 곳이 이 아와였다.

2. 역사

1336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무로마치 막부를 창설하자 아와에 아와 슈고로서 호소카와 카즈우지(細川和氏)를 입부시켰고 아와 슈고는 호소카와 씨가 세습하게 되었다.

오닌·분메이의 난이 일어난 전란의 시대. 아와 호소카와 씨의 당주는 호소카와 시게유키였다. 전란이 막 끝나자 시게유키는 출가하며 아들 마사유키에게 당주의 자리를 넘겨주었으나 가문을 지탱하는 우치슈들은 마사유키를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마사유키가 막부의 인정을 받았음에도 우치슈들의 반감이 끊이질 않자 마사유키는 지역의 코쿠진이자 슈고다이를 맡고 있는 미요시 씨를 중용하기로 하였다. 미요시 씨의 당주인 미요시 유키나가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는 곧 마사유키의 중신이 되어 우치슈들과 여러번 갈등을 빚으며 대립해 나갔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우치슈들은 기나이(機内)에서 아와로 하향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호소카와 씨는 이 반란을 심상치않게 보았고 다른 계통의 호소카와 씨에게 까지 원군을 요청하여 겨우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 마사유키는 사망하였고 뒤를 이은 아들 요시하루마저도 요절하자 요시하루의 아들인 유키모치가 아와 호소카와 씨의 당주로 취임하였다. 한편 기나이에서는 호소카와 종가의 당주인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아들이 없기에 양자를 모집했는데 여기에 유키모치의 동생인 호소카와 스미모토가 선발되어 안그래도 격이 높은 아와 호소카와 씨를 더욱 빛내줄 기회를 잡게 되었다. 유키모치는 조부 마사유키를 위해 힘써준 유키나가를 스미모토의 보좌역으로 붙여주었고 스미모토는 유키나가와 함께 상락해 종가의 당주가 되기위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후계자 쟁탈은 결국 마사모토가 피살될 정도의 극심한 무력투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스미모토와 유키나가는 패전과 승전을 거듭하며 아와에 귀국했다 다시 출진하는 등 쟁탈전에서 이기기 위해 분전하였으나 다른 후보자인 호소카와 타카쿠니에 의해 유키나가는 결국 패배하여 자결했고 스미모토 또한 동년에 아와에서 사망하여 아와 호소카와 씨는 종가의 당주가 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절망도 잠시 유키나가의 아들인 미요시 모토나가가 스미모토의 아들인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보좌하여 기나이로 출진했다. 모토나가는 기나이의 호족들과 호응하여 타카쿠니를 격파하고 자결시키는 것에 성공하였으며 하루모토와 전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츠나를 옹립하여 아와 코쿠진들로 구성된 후에 사카이 바쿠후라 불릴 중앙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한편 유키나가와 모토나가가 기나이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할 때 아와 호소카와 씨의 당주인 유키모치가 요절하였고 아들인 모치타카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기나이를 제압한 아와 세력이었으나 이들은 곧 사이가 틀어져 모토나가는 사망하고 사카이 바쿠후는 붕괴하였다. 모토나가를 잃어버린 하루모토는 곧 타카쿠니의 유지를 이은 우지츠나의 공격을 받거나 잇키 세력에게 공격받는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아와로 하향했던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가 하루모토와 잇키 세력을 중재해주었기에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나가요시는 기나이에 틀어박혀 하루모토를 지원해주었으나 그의 동생 미요시 짓큐는 아와에 남아 모치타카의 가신으로서 아와의 통치를 지원해 주었다. 나가요시가 구원을 요청하자 다른 동생들과 함께 시코쿠의 군세를 이끌고 기나이에 상륙하는 등 형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않았다. 기나이에 상륙한 짓큐는 이 당시 잠시 이즈미국에 거처하며 기나이에서 세력과 인맥을 쌓는 시간을 가졌다.

1549년, 나가요시는 반목한 하루모토를 박살내고 아시카가 씨 마저 쫓아내는 것에 성공하여 미요시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에 짓큐는 1551년에 아와로 귀국하였다. 나가요시는 아시카가 씨와 화의를 맺었으나 곧 심한 불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짓큐는 기나이에 둥지를 튼 동생 소고 카즈마사를 불러 켄쇼지에서 아와슈고 모치타카를 자살로 몰아넣고 그의 아들 호소카와 사네유키를 당주로 않혀 자신의 주가인 아와 호소카와 씨를 사실상 괴뢰화시켰다. 나가요시 또한 아시카가 씨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짓큐는 다시 한 번 시코쿠의 군세를 이끌고 형을 도와주기 위해 기나이로 상륙했다.

1558년, 미요시 씨와 아시카가 씨의 전쟁은 화의로 끝이 났다. 짓큐는 이에 형에게 반감을 품게 됐지만 곧 화해하고 1560년의 카와치국 공략에 시코쿠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승리, 자신의 본거지를 카와치 타카야 성으로 옮기겼으며 아와와 사누키국의 통치는 자신의 가신인 시노하라 나가후사에게 맡겼다.

1561년, 미요시 포위망이 발생하자 짓큐는 시코쿠의 군세를 이끌고 1562년 3월 5일에 하타케야마 타카마사의 군세와 맞섰으나 네고로슈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게 되어 시코쿠 세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패전 이후 아와에선 나가후사와 미요시 야스나가가 군세를 정비해 기나이에 재상륙하였고 포위망을 견뎌내는 데 성공하였다. 짓큐의 빈자리는 그의 아들인 미요시 나가하루가 잇게 되었으며 야스나가는 연명장을 작성해 나가하루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나가후사는 직접 나가하루 옆에서 통치를 보좌해줌에 따라 새로운 아와의 시대가 열렸다.

한편 기나이 미요시 씨는 잇다른 공신의 죽음과 당주 나가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결국 미요시 산닌슈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대립이 시작되자 야스나가와 나가후사는 산닌슈측을 지원해주며 히사히데를 열세로 몰아넣었다. 특히 나가후사는 아와로 사카이 바쿠후 괴멸 이후 피난왔던 아시카가 요시츠나의 후손인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새로운 쇼군으로 만들 플랜을 짜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요시히데가 쇼군이 되어 아와 출신 지도자가 탄생하였으나 오다 노부나가가 상락하자 그에게 패배하여 산닌슈와 아와 미요시 씨는 아와로 도망치게 되었다.

이후 아와 미요시 씨와 산닌슈는 계속해서 오다 씨에게 전쟁을 걸며 기나이 복귀를 노력하였고 노부나가 포위망이 발생하자 적극적으로 오다 타도에 참가했으나 여러 요인으로 인해 패배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자 아와 미요시의 당주 나가하루는 오다 씨와 강화를 맺길 원하였다. 하지만 나가후사는 계속해서 항전을 주장하는 주전파였기에 1573년에 그를 공격해서 자결로 몰아넣은 다음 노부나가에게 강화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결과는 기각, 미요시 씨는 중신 하나를 잃은 꼴이 되었으며 이 이후로 미요시 씨가 기나이에 진출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나가하루는 노부나가와 화친하기 위해 자신들과 깊은 관계에 있던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관계도 끊어버렸던지라 미요시 씨는 시코쿠에 고립되었다. 이에 나가하루는 어떻게든 기나이에 연줄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 짓큐와 친분이 있는 니치코와 적극적인 교류를 시작하였으며 그의 종교를 위해 쇼즈이 종론을 열어 그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1] 1575년, 야스나가가 오다 씨에게 항복하자 나가하루는 다시 노부나가에게 화친의 서장을 보냈으나 이번에도 기각당하였다.

또한 동년부터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아와 침공이 시작되었다. 남부의 코쿠진들은 모토치카의 침공에 속절없이 무너졌으며 미요시 씨를 이탈하려는 코쿠진들도 등장할 정도였다. 나가하루는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지만 1577년, 노부나가와 모토치카에게 포섭된 사네유키에게 공격받아 자결하게 되어 아와 미요시 씨는 단절되었다.

3. 현재 지명


[1] 주로 군키모노에선 이 쇼즈이 종론을 민간인에게 법화종을 강요한 나가하루의 실정이라고 묘사하지만 1차 사료에는 그저 불교 계통의 종교 회담을 한 사실만이 묘사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