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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14:02:50

아리랑 제3편

나운규아리랑 시리즈
아리랑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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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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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제3편 (1936)
파일:아리랑 제3편 포스터.jpg
<colbgcolor=#46606e><colcolor=#fff> 감독|각본 나운규
제작 차상은
기획 나운규
주연 나운규, 신일선, 전택이, 윤봉춘
촬영 이신웅
조명 최진
편집 양주남
음악 김범진
미술 이영춘
제작사 한양영화사
개봉일 1936년 5월 15일
개봉관 단성사

1. 개요2. 출연진3. 줄거리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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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운규의 《아리랑》, 《아리랑 후편》에 이은 3번째 작품. 발성영화(유성영화)로 제작되었다. 나운규가 이 영화가 만들어진 지 1년이 지난 1937년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오리지널' 아리랑 시리즈는 "아리랑 제3편"으로 막을 내렸다.

이 영화의 필름 역시 전작들처럼 현재는 유실된 상태이다.

2. 출연진

3. 줄거리

미친 오빠 영진(나운규)을 데리고 의지할 곳 없는 영희(신일선)는 사립소학교 훈도로 있는 오빠 친구 김선생(윤봉춘)을 찾아와서 비누질 품팔이로 겨우 생활을 이어갔다. 그 해 그 근처에는 수리조합 공사가 시작되고 측량하러 온 기사 태준(전택이)이는 영희의 아름다움을 보고 가까이 하려고 하였으나 양복 입은 사람을 싫어하는 미친 영진이 때문에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 때에 이 동리로 흘러들어온 엉터리 의생(김덕심)을 태준이가 꾀어 영진의 병을 고친다는 핑계로 영진이를 가두어 버렸다. 거리낄 것이 없게 된 태준이는 그 날부터 자기집처럼 영희의 집을 나들며 영희를 못살게 굴었다. 어느날 밤 태준이가 혼자 사는 영희의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죽기를 기쓰고 막았으나 여자 혼자 몸으로 어쩔 수 없었다. 영희는 최후로 식도를 들고 막으려고 하다가 태준이의 실수로 영희가 칼을 맞고 쓰러졌다. 살인한 태준이는 담을 넘어 몸을 감추고, 미친 영진이가 외치는 소리에 동리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집에 가 옷을 바꾸어 입고 다시 나타난 태준이는 범행을 김선생에게 밀어버리려고 했으나 때는 늦었다. 현장을 일일이 본 미친 영진이가 뛰어 나와 쫓겨 달아나는 태준이를 지붕에서 죽였다. 두 주검을 앞에 놓고 이때까지 떠들던 동리 사람들 입에는 말이 끊겼다. (동아일보조선일보 1936년 2월 7일)

4. 평가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다음은 당시의 관람평.
대체 아리랑 제3편에서 나운규가 보여주려 한 것은 무엇인가. 컴컴하고 더러운 화면, 불유쾌한 녹음은 설비의 불완전으로 핑계해 버릴지라도 아리랑 제1편에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간 오늘날 2편보다 낫기는 고사하고 1편에서 보여준 그 정조와 리듬은 어디다 다 집어치워버리고 신파 활극을 다시 되풀이하는 책임은 누가 져야 옳을 것인가? 소위 토-키[1]라고 하면서 에로큐-숀[2]을 조금도 모르는 - 이것은 조선 배우들이 다 그렇다 - 연출은 기가 막히거니와 나씨의 '킹콩' 흉내(미친 사람은 그런 괴성으로만 표현될 것인지!)에 있어서는 불쾌를 지나쳐 증오의 감을 갖게 하였다. 신일선의 재기는 석일(昔日)의 발랄했던 신선미를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그 평면적인 연기로 그대로 재기를 꾀하는 것이 일종 연민의 느낌을 주었다. 아리랑 제1편에서 그 아름다운 정조에 감격했던 사람들에게는 나운규, 신일선, 윤봉춘 기억에 새로운 이들의 이름에서 상기되는 아름다운 상상을 향락하는 편이 사진[3]을 보는 편보다 훨씬 유쾌할 것이다.(매일신보 1936년 5월 27일)


[1] 발성영화[2] elocution[3] 영화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