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의 아리랑 시리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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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제3편 (1936) | |
<colbgcolor=#46606e><colcolor=#fff> 감독|각본 | 나운규 |
제작 | 차상은 |
기획 | 나운규 |
주연 | 나운규, 신일선, 전택이, 윤봉춘 |
촬영 | 이신웅 |
조명 | 최진 |
편집 | 양주남 |
음악 | 김범진 |
미술 | 이영춘 |
제작사 | 한양영화사 |
개봉일 | 1936년 5월 15일 |
개봉관 | 단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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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운규의 《아리랑》, 《아리랑 후편》에 이은 3번째 작품. 발성영화(유성영화)로 제작되었다. 나운규가 이 영화가 만들어진 지 1년이 지난 1937년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오리지널' 아리랑 시리즈는 "아리랑 제3편"으로 막을 내렸다.이 영화의 필름 역시 전작들처럼 현재는 유실된 상태이다.
2. 출연진
- 나운규 - 최영진 역
- 신일선 - 영희 역
- 윤봉춘 - 김선생 역
- 전택이 - 태준 역
- 현방란 - 옥순 역
- 김덕심 - 의생 역
- 차상은 - 정송 역
- 남궁선 - 동리 처녀 역
- 김병한 - 구장 역
- 이동호 - 경관 역
3. 줄거리
미친 오빠 영진(나운규)을 데리고 의지할 곳 없는 영희(신일선)는 사립소학교 훈도로 있는 오빠 친구 김선생(윤봉춘)을 찾아와서 비누질 품팔이로 겨우 생활을 이어갔다. 그 해 그 근처에는 수리조합 공사가 시작되고 측량하러 온 기사 태준(전택이)이는 영희의 아름다움을 보고 가까이 하려고 하였으나 양복 입은 사람을 싫어하는 미친 영진이 때문에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 때에 이 동리로 흘러들어온 엉터리 의생(김덕심)을 태준이가 꾀어 영진의 병을 고친다는 핑계로 영진이를 가두어 버렸다. 거리낄 것이 없게 된 태준이는 그 날부터 자기집처럼 영희의 집을 나들며 영희를 못살게 굴었다. 어느날 밤 태준이가 혼자 사는 영희의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죽기를 기쓰고 막았으나 여자 혼자 몸으로 어쩔 수 없었다. 영희는 최후로 식도를 들고 막으려고 하다가 태준이의 실수로 영희가 칼을 맞고 쓰러졌다. 살인한 태준이는 담을 넘어 몸을 감추고, 미친 영진이가 외치는 소리에 동리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집에 가 옷을 바꾸어 입고 다시 나타난 태준이는 범행을 김선생에게 밀어버리려고 했으나 때는 늦었다. 현장을 일일이 본 미친 영진이가 뛰어 나와 쫓겨 달아나는 태준이를 지붕에서 죽였다. 두 주검을 앞에 놓고 이때까지 떠들던 동리 사람들 입에는 말이 끊겼다.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1936년 2월 7일)
4. 평가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다음은 당시의 관람평.대체 아리랑 제3편에서 나운규가 보여주려 한 것은 무엇인가. 컴컴하고 더러운 화면, 불유쾌한 녹음은 설비의 불완전으로 핑계해 버릴지라도 아리랑 제1편에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간 오늘날 2편보다 낫기는 고사하고 1편에서 보여준 그 정조와 리듬은 어디다 다 집어치워버리고 신파 활극을 다시 되풀이하는 책임은 누가 져야 옳을 것인가? 소위 토-키[1]라고 하면서 에로큐-숀[2]을 조금도 모르는 - 이것은 조선 배우들이 다 그렇다 - 연출은 기가 막히거니와 나씨의 '킹콩' 흉내(미친 사람은 그런 괴성으로만 표현될 것인지!)에 있어서는 불쾌를 지나쳐 증오의 감을 갖게 하였다. 신일선의 재기는 석일(昔日)의 발랄했던 신선미를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그 평면적인 연기로 그대로 재기를 꾀하는 것이 일종 연민의 느낌을 주었다. 아리랑 제1편에서 그 아름다운 정조에 감격했던 사람들에게는 나운규, 신일선, 윤봉춘 기억에 새로운 이들의 이름에서 상기되는 아름다운 상상을 향락하는 편이 사진[3]을 보는 편보다 훨씬 유쾌할 것이다.(매일신보 1936년 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