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7 09:00:29

전택이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보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1995년
이름 전택이
분야 영화
보관문화훈장(3등급)

田澤二
1912년 6월 10일 ~ 1998년 3월 2일(향년 85세)

1. 개요2. 생애3. 작품 목록4. 수상경력5. 참고 자료

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 본명은 전용탁(田溶鐸).

한국 영화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며, 배우 노경희의 남편으로 알려졌다.

2. 생애

1912년 경성부에서 태어나 경성사범부속국민학교양정고등보통학교를 각각 졸업했다. 1929년경 극단 '야명가극단'에 입단한 뒤 '문외'와 '황금좌', '신무대' 등지를 돌며 연기 경력을 쌓고 1935년에 조선극장 지배인이던 김한을 알게 된 계기가 되어 나운규 감독의 영화 <강 건너 마을>에서 본격 데뷔했다. 이후 <아리랑 제3편(1937)>, <청춘부대(1938)>, <국경(1939)>, <복지만리(1941)> 등 숱한 영화에서 주/조연을 맡아왔고,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자유만세(1946)>, <수우(1948)> 등을 필두로 1967년 <지상에서 영으로>까지 배우 생활 동안 총 115편의 영화에 나오며 개성 있고 활달하면서 코믹한 연기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1955년 <춘향전>에선 부인 노경희(1927~1995)와 동반으로 방자와 향단 역을 동반으로 맡아 화제가 됐다. 1958년에 <애정무한>의 연출을 맡아 감독으로 데뷔하여 총 4편을 남겼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53년에는 영화연기연구회를 발족한 뒤, 1955년에 대한영화배우협회(현 한국영화배우협회)로 발전시켜 1956년까지 초대 회장을 맡아 한국 영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뒤에도 한국영화배우협회 상임고문 등을 맡으며 후배들을 지원하는 등의 여러 일을 맡다가 1998년 3월 2일 낮 1시 50분, 서울시 중구 인현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서울중앙병원 영안실에서 영화인협회장으로 거행됐으며, 유족으로는 4남 1녀가 있다.

3. 작품 목록

4. 수상경력

5. 참고 자료



[1] 미국 공보원이 제작한 교육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