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양주남 梁柱南|Yang Junam | |
출생 | 1912년 3월 8일 (생존 중일 경우 [age(1912-03-08)]세) |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 |
사망 | 미상 (향년 86세 이상)[1] |
본관 | 제주 양씨 |
학력 | 경성 마포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 신명고등보통학교 (졸업) |
가족 | 아버지 양재연 (1920년 사망) |
5촌 종숙부 양원장 6촌 재종형 양주동 (1903년 ~ 1976년) | |
배우자 김능안(金陵岸)[2] | |
슬하3남 2녀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상사 |
데뷔 | 1932년 경성촬영소 연구원 1기 |
은퇴 | 1978년 국방홍보원 명예고문위원 직위 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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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편집감독, 군인. 현존하는 대한민국 유성영화 중 2번째로 오래된 작품인 미몽의 감독으로 유명하다.2. 활동
한국 전쟁 시기에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에 정훈부사관으로 임관하여 활동을 하면서 상사로 전역했다.1932년부터 1978년까지 활동한 영화계 원로이다. 1978년 은퇴 후 경기도 안산시에서 칩거생활하면서 지냈다.
1998년에 양주남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장인 양주남 감독이 개봉되기도 하였다.
2019년 12월 18일에 익스트림무비 사이트에서 여전히 살아계신다는 댓글이 있었다. 2022년 8월 27일에 MLBPARK 사이트에서 1936년 한국영화 미몽 출연자 중에서 110세 나이로 생존자 감독으로 알려졌으나 단순 추측이다.
1998년 영화 잊혀진 장인 양주남 감독에 출연한 이후 20년 넘게 그의 근황이나 부고 등이 들리지 않고 있다.[3] 현 시점에서는 살아있으면 [age(1912-03-08)]세인 만큼 이미 사망하고 가족들만 아는 채 조용히 장례를 치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근래에는 100세 이상 되는 노인들이 제법 많이 있지만 현재조차도 110세 이상 초백세인은 정말 보기 드물며[4] 그냥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뉴스에 나올 일이기 때문. 만약에 생존중이라면 현재 세계 최고령 남성이 된다. 물론 사망했다 쳐도 마지막 행적이 1998년 86세였으니 장수한 것은 맞다.
3. 연출 작품
3.1. 영화
- 동작동 어머니 (1966) - 편집
- 계룡산 (1966) - 편집
- 하늘 보고 땅을 보고 (1965) - 편집
- 처가살이 (1965) - 편집
-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 (1965) - 편집
- 사랑아 울리지 마라 (1965) - 편집
- 마포 사는 황부자 (1961) - 편집
- 밀양 아리랑 (1961) - 감독, 편집
- 대지의 어머니 (1960) - 감독, 편집
- 그대 목소리 (1960) - 편집
- 회정 (1960) - 편집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1959) - 편집
- 목포의 눈물 (1958) - 편집
- 마도의 향불 (1958) - 편집
- 종각 (1958) - 감독
- 심정 (1958) - 편집
- 눈 나리는 밤 (1958) - 편집
- 모정 (1958) - 감독, 편집
- 항구의 일야 (1957) - 편집
- 배뱅이굿 (1957) - 감독, 편집
- 논개 (1956) - 편집
- 유전의 애수 (1956) - 편집
-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1956) - 편집
- 처녀 별 (1956) - 편집
- 청춘 (1953) - 편집
- 최후의 유혹 (1953) - 편집
- 베일 부인 (1952) - 편집
- 태양의 거 (1952) - 편집
- 공포의 밤 (1952) - 편집
- 정의의 진격 (1951) - 편집
- 삼천만의 꽃다발 (1951) - 편집
- 나라를 위하여 (1949) - 녹음, 편집
- 성벽을 뚫고 (1949) - 녹음, 편집
- 풍랑 (1949) - 편집
- 대지의 아들 (1949) - 편집
- 마음의 고향 (1949) - 녹음, 편집
- 민족의 절규 (1948) - 편집
- 희망의 마을 (1948) - 녹음
- 여명 (1948) - 녹음, 편집
- 사랑의 교실 (1948) - 편집
- 푸른 언덕 (1948) - 편집
- 수우 (1948) - 편집
- 국민투표 (1948) - 녹음
- 바다의 정열 (1947) - 편집
- 새로운 맹서 (1947) - 편집
- 자유만세 (1946) - 편집, 녹음
- 사랑의 맹서 (1945) - 편집
- 거경전 (1944) - 편집
- 나는 간다 (1942) - 편집
- 풍년가 (1942) - 녹음, 편집
- 집 없는 천사 (1941) - 녹음, 편집
- 승리의 뜰 (1940) - 편집, 녹음
- 수업료 (1940) - 녹음, 편집
- 미몽 (1936) - 감독, 편집
- 아리랑 제3편 (1936) - 편집
4. 관련 문서
[1] 1998년 이후 근황이 전해지지 않는다.[2] 잊혀진 장인 양주남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는 부인은 정완석이라고 나온다.[3] 참고로 말하면 연극배우 출신 성우 이춘사(1925년생)도 근황이 들리지 않아 생사 불명인 상태다. 그나마 1977년 이후 소식이 없는 이춘사와 달리 양주남은 1998년까지는 근황이 알려졌다.[4] 전세계에 고작 320여명에 불과하다. 특히나 평균수명이 여성보다 낮은 남성들은 더더욱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