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76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일어난 폭력사건.2. 배경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제1야당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이 열렸다. 원래는 당 총재인 유진산이 대선후보로 유력했지만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나서면서 돌풍을 일으키고 역시 40대인 이철승과 김대중도 출마를 선언하면서 유진산의 위신은 추락했다. 결국 유진산은 자신이 후보지명권을 가진다는 조건으로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범주류로 분류되던 김영삼과 이철승 중에서 김영삼을 후보로 지명했다.하지만 실제 경선에선 1차 투표에서 1위는 김영삼, 2위는 김대중, 3위가 이철승이 되었다. 이러자 김대중은 이철승과 접촉해서 대권후보-김대중/당권-이철승 조건으로 양자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결국 김대중이 2차 투표에서 이철승의 지지를 바탕으로 신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통령 선거에서 박빙의 차이로 박정희가 이기고 말았다. 곧이어 유신이 벌어지고 박정희의 견제로 김대중이 정치에서 배제되면서 신민당 내에서는 이철승의 기대와 달리 김영삼이 큰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74년 당수 유진산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해 8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김영삼은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선명 노선을 내세웠다. 그러나 19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의 영수회담 이후 선명 노선이 약화되고 김옥선의 관제데모 발언 파동 당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서 당 내부에서 그에 대한 반대가 커졌다.
3. 진행
1976년 5월 신민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해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영삼은 연임을 통해 당내 불신임 여론을 불식시키고 자신의 단일지도체제를 공고히 하려 했다. 이에 이철승은 최고위원제를 도입해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비주류를 규합했다.차지철 경호실장이 직접 실무를 맡아서 참여 하의 개혁이라는 온건 노선을 내세운 이철승 의원을 지원했다. 신민당 내에서 세력이 밀리던 이철승은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게 되자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판을 뒤엎을 계획을 세웠다.[1][2] 그리고 자신의 측근들을 시켜서 당시 서울에서 한참 뜨고 있던 26세의 조직폭력배 김태촌을 포섭했다. 당시 고향에서 자신의 조직원들을 데리고 상경했던 김태촌은 서울에 먼저 진출해 있던 조양은과 무자비한 세력싸움을 벌이면서 조폭 세계에서 한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이철승 의원에게 ‘사람만 죽이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뒤탈이 없도록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전해들은 김태촌은 고향 광주에서 자신의 조직원들과 고등학교 불량학생들까지 300여명을 전당대회 5일 전에 서울로 급하게 불러올렸다. 이들은 서울 종로 일대의 여관에 분산 투숙했으며 이들이 먹고 자고 노는 모든 비용은 전부 이철승 의원이 대주었다.
그리고 김태촌은 이철승의 측근으로부터 다음의 세 가지를 지시받았다.
- 당의 직인을 탈취할 것.
- 직인 탈취에 실패하면 대의원 명부를 불태워서 대의원을 다시 선출하게 만들 것.
- 당직자들을 인질로 잡고 5월 25일까지 농성해서 전당대회를 무산시킬 것.
당시 이철승은 명백하게 당 내 세력구도에서 김영삼에게 밀리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당 대의원들이 모두 투표를 하면 패배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깡패들을 동원해서 김영삼계 대의원들을 못 들어오게 막고 자기 지지자들만 모아서 전당대회를 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면 당연히 김영삼도 따로 전당대회를 열 텐데 이럴 경우 선관위와 법원은 당의 직인을 가진 쪽을 합법 전당대회로 인정해 주게 된다.[3] 따라서 이철승은 1단계로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당의 직인부터 탈취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전당대회를 사흘 앞둔 5월 22일 김태촌은 부하 수백명을 흉기로 무장시켜서 김영삼과 당직자들이 머물고 있는 종로구 관훈동 신민당사를 대낮에 습격했다. 무슨 홍콩 느와르 영화도 아니고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조폭 수백명이 대낮에 국회의원들이 머무는 야당 사무실에 테러를 가하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당사를 습격한 깡패들에 경악한 친김영삼 계열의 국회의원들은 김영삼과 함께 총재실로 대피해 사무실 집기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버텼다. 김태촌은 김영삼에게 죽기 싫으면 항복하라고 을러댔지만 악에 받칠 대로 받친 김영삼은 항복하지 않고 버텼다. 당시 김영삼은 "깡패놈들에게 맞아 죽어? 내 기어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철승 의원을 매장하고야 말겠다."고 외치면서 저항했다고 한다.[4] 실제로 김태촌의 증언에 따르면 폭력배들이 도끼로 문을 부수고 난입했으나 김영삼은 끝까지 버텼고 김태촌이 흉기를 들고 위협하려 하자 주변의 친김영삼계 의원들이 억지로 김영삼을 끌고 뒷문으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이에 적절한 착지를 못한 김영삼은 결국 다리를 다쳐 비서의 등에 업힌 채로 병원에 실려갔다.
김태촌은 흉기로 위협해서 직인과 대의명부의 행방을 찾거나 김영삼 총재를 납치하려 했는데 김영삼이 오히려 역으로 드세게 나오며 끝까지 버티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렸는데 오히려 뛰어내려서 절뚝거리는 김영삼을 보며 안심했다고 한다.
김태촌이 이끄는 조폭 수백여 명은 결국 신민당사를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당사를 뒤졌지만 직인을 찾아내지 못했고 대신 대의원 명단을 포함해서 서류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당사에 남아 있던 국회의원과 당직자들을 두손 들고 무릎을 꿇게 하는 등 인질로 잡았고 5월 25일까지 농성하기 위해서 술과 담배, 음식, 음료수들을 반입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집기들을 모두 부숴서 당사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등 준비도 철저했다.
그리고 경찰은 이 모든 과정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김영삼계 당직자들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조폭들이 당사를 완전 점거한 뒤에야 늦장 출동했고 그 마저도 '당내문제이니 경찰은 개입하지 말라'는 이철승계 당직자의 이야기만 듣고 곧바로 철수해 버렸다.
한편 이런 상황은 방송을 통해서 전국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다.
그리고 5월 22일 밤늦게 김태촌과 조폭 300여명은 이철승의 지시로 경찰들의 호위 하에 안전하게 철수해서 숙소인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흘 뒤인 5월 25일 전당대회에서는 다시 이철승이 동원한 서방파(김태촌) 조폭들이 전당대회장이었던 서울 시민회관에 난입해서 또한번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들은 김영삼 측 대의원들을 전당대회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았고 전당대회에서는 당연히 이철승 의원이 대표로 당선되었다.
사실 이때는 이철승계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예상한 김영삼계 주류 쪽에서도 조폭을 동원해서 미리 대회장을 봉쇄하려고 했지만 전당대회장 경비 명목 하에 출동한 경찰의 방해로 실패했다. 주류쪽이 조폭을 동원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대회장에서 이들을 모두 강제로 끌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철승이 동원한 서방파 조폭들은 신민당 청년당원들이라면서 경찰의 호위 속에 대회장에 입장했다.[5] 그리고 이들은 주류쪽에서 대회장 진입을 시도하자 미리 준비한 각목으로 두들겨 패서 모두 쫓아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의 용병 조폭들과 김태촌의 부하 조폭들 사이에서 크게 패싸움이 일어났다. 양측 모두 마치 검투사처럼, 검 대신 각목을 들고 싸웠기 때문에 이 사건이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이라 명명되게 되었다. 당연히 경찰은 당내 문제라면서 외면했고 방송은 조폭들의 난투극으로 엉망이 된 전당대회를 전국에 실시간 중계했다.
이러자 전당대회장에서 밀려난 김영삼계 주류 대의원들은 신민당사에서 따로 전당대회를 개최했고 김영삼이 총재에 당선되었다. 계파에 따라 따로 전당대회를 치르고 두 명의 총재가 나온 상황이 되면서 신민당은 분당 위기에 처했다. 결국 분당을 막기 위해 양자를 중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에 주류측이 비주류측의 최고위원제 도입에 찬성하고 이전의 총재 선거는 무효로 하며 이충환을 총재 대행으로 하여 9월 15일 통합 전당대회를 치르는 데 양측이 합의했다. 그리고 통합 전당대회에서는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45%를 득표하며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2차 투표로 넘어갔고 2차 투표를 앞두고 이철승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에서 사퇴한 정일형 때문에 역전당하며 결국 이철승이 총재가 되었다.
4. 사건 그 뒤
이철승이 동원했던 조폭들 중에서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물파손, 폭력 등의 혐의로 수십여명이 체포되긴 했지만 다음날 모두 훈방처리되었다. 그리고 이철승이 당권을 쥐는 데 큰 공을 세운 김태촌은 신민당 노동국 차장이 되었으며 국회의원 공천 약속까지 받게 되는 등 앞날이 트이는 듯했으나 이듬해인 1977년 다른 폭력 사건으로 결국 체포되었다. 결국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것이다.그리고 이철승도 정치적으로는 장기적 손해였는데. 당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말이 유신정권 참여 하의 중도 개혁이지 실상은 관제야당 행동만 하다, 1979년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에게 밀렸고. 이후로도 1988년 까지는 다선을 하긴 했지만 대통령 직선제가 되면서 대선주자로써 참여는 커녕 그저그런 다선의원에 머물렀다.
그리고 17년 뒤인 1993년 2월 25일, 김영삼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철승과 김태촌의 입장에서 보면 모골이 매우 송연한 일이다. 이철승은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보수단체 시위에 참여하는 행적을 보였고 김태촌은 노태우 정부 시절 체포되어 문민정부 시절 내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2020년 4월 16일 유튜브 방송에서 [아닌밤중 주진우] 조폭과 결탁한 권력들_신민당 습격사건편을 해설한 주진우[6] 기자가 이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에 참가했던 조폭들을 직접 취재하여 당시 정황을 물어보았는데 "국회의원 그것들 별거 아니더구먼. 우리가 쳐들어가서 '야, 너희들 다 무릎꿇어!'라고 외치니까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국회의원 뱃지를 떼라고 하니까 모두 순순이 떼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당시 총재였던 김영삼의 목에 낫을 들이댔다고. 다만 이 사건에 참가했던 다른 조폭의 증언으로는 낫까지는 안 들이댔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갑자기 달아나서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고 한다.
김태촌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맨 앞에서 흉기로 위협하며 당총재를 납치하려고했는데 김영삼이 당시에 오히려 조폭들에게 "깡패놈들에게 맞아 죽어? 나는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 도망 안 간다, 같이 죽겠다. 내 기어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철승 의원을 매장하고야 말겠다." 라며 일갈했고 문이 부서지자 친 김영삼계 의원들은 뒷문으로 뛰어내렸는데 김영삼 본인은 버텼다고 한다. 이에 약이 올라 위협하려 흉기를 들어올렸으나 김영삼이 "까라"고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친김영삼계 황낙주 의원이 김영삼에게 달려들어 강제로 뒷문으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타의에 의해 강제로 떨어진 김영삼은 다리가 부러져 곧바로 병원에 실려갔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
웹툰 저승파견고용직에서 잠시 언급된다. 목두기의 대상이 된 악인 중 한 명으로 나오는 최기동이 최초로 저지른 악업이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사건 당시 선봉에 서서 도끼로 문을 부수고 폭력배들이 난입하는 길을 터 준 것으로 묘사된다. 이때 조직폭력배 두목의 눈에 띄면서 수하로 일하며 각종 악행을 저지르다 악업을 초과하게 된다.[1] 원래 이철승은 해방 직후에 정치깡패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본인은 우익 학생운동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그가 했던 활동이란 게 주먹패들을 데리고 좌익계 인사들을 테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2] 사실 이철승만 이런 것은 아니고 해방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좌우를 막론하고 청년운동, 학생운동이란 게 나중에 가면 전부 이런 정치깡패, 테러 활동으로 변질된 게 사실이다. 야인시대로 유명한 김두한도 대한청년단에 소속되어 백색테러를 일삼고 다니면서 정치깡패로 성장하고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드라마에서는 미화가 심하게 되어 김두한을 마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 청년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김두한이나 이철승 같은 주먹패들은 지금 와서 보면 그냥 정부의 개처럼 일하는 정치깡패였다.[3] 당의 직인이 가지는 위상은 2016년 새누리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를 생각해 보면 된다. 흔히들 김무성 옥새런, 옥새 들고 나르샤라고 부르던 사건. 이것도 새누리당에서 (비박계) 김무성 당대표와 (친박계) 공천관리위원회가 공천 문제로 대립하던 와중에 직인이 핫아이템으로 떠오른 사건이다.[4] 김영삼은 대통령 재임기의 화끈한 행적들로도 유명하지만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에도 한 성깔 하고 거침없는 행보를 많이 보여주었다. 차에 산성액을 맞는 테러를 당하고도 박정희 정부를 비판했고 목숨까지 건 단식 농성을 하면서 전두환 정부에 맞섰다.[5] 당시 신민당 청년국장이 이철승계 당직자로 서방파 조폭들을 관리하고 있었다.[6] 원래 조폭과 종교 전문 담당 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