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성여(聖汝) |
본관 | 아주 신씨[1] |
출생 | 1927년 12월 15일[2]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3] | |
사망 | 1986년 12월 9일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32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신두수는 1927년 12월 15일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서 아버지 신종철(申鍾哲, 1896. 10. 1 ~ 1983. 6. 19)과 어머니 배옥이 (裵玉伊, 1900. 7. 7 ~ 1990. 8. 4) 배상규(裵祥奎)의 딸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주군 경주면(현 경주시) 황남동으로 이주하였다.경주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4년 4월, 그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에 가입하였다. 명성회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개탄하고 이정선(李貞善)·권태염(權泰琰)·정현모(鄭賢模)와 함께 정세를 틈타 무장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이다. 신두수는 명성회의 기관지 「새벽」의 논설주필로서 일제가 연합군에 의해 곧 패망한다는 논조의 논설을 써서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새벽」잡지를 일본어와 한글로 간행하여 대구사범학교·경주중학교·안동농림학교 등의 학생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한편, 같은 해 11월에는 조선회복연구단과 연합하여 1945년 2월 17일 무장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자금조달과 동지규합에 진력하였다. 신두수는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지령에 따라 비밀리에 파견된 이회술(李會述)과 안동농림학교 학생 손성한 등과 함께 학병 및 징용을 거부하고 돌격대를 조직하여 후방교란 작전의 일환으로 일본군 무기고 기습작전 등을 계획하던 중에 그해 3월 초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신두수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5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다음날인 1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해방 후에는 의성군 봉양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1986년 12월 9일 별세하였다.
200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2002년 11월 1일 그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