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승영준(承永俊) |
자 / 호 | 영준(英俊) / 해천(海川) |
본관 | 연일 승씨[1] |
출생 | 1889년 5월 6일[2] |
평안도 정주목 신안통 안흥리[3] (현 평안북도 정주시 신안리) | |
사망 | 1975년 2월 9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8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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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승영제는 그의 둘째 남동생이며, 독립유공자 승치현은 그의 5촌 당숙이다. 독립유공자 승병일은 그의 조카[4]이다.
2. 생애
승준현은 1889년 5월 6일 평안도 정주목 신안통 안흥리(현 평안북도 정주시 신안리)에서 아버지 승지홍(承址弘)과 어머니 녹주 전씨(麓州 全氏) 사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5]에서 박장호, 조맹선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담하여 인서(仁西) 총관(總管)이 되어 패왕조(覇王槽)의 독립단 유력인사로서 지방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1921년에는 통화현(通化縣) 팔도구(八道溝)[6]에 대한독립단의 지단 설치 및 독립단원의 훈련과 식량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에는 만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8.15 광복 후 귀향하였고, 첫째 남동생[7] 승영기(承英基)와 족질(族姪) 승원빈(承元彬) 등과 함께 고향에 정주중학교(定州中學校)를 설립했다.
그러다가 우익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피해 월남하여 서울특별시에 자리를 잡고 거주했으며, 1975년 2월 9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승준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5월 10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1] 행단파(杏壇派) 28세 현(鉉) 항렬.[2] 연일승씨대동보 행단파 277쪽에는 1890년 7월 7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연일 승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승계련·승병일·승영제·승영호·승진·승치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승병일의 아버지 승영기(承英基, 족보명 승민현承民鉉)는 본래 승준현의 첫째 남동생이나, 자식이 없던 5촌 당숙 승치현에 입양되었으므로, 승영기의 차남인 승병일은 족보상으론 7촌 재종질(再從姪)이 된다.[5]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6]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通化市) 퉁화현(通化縣) 바다오거우촌(八道溝村).[7] 출생 이후 5촌 당숙인 승치현에 입양되었기에 족보상으로는 6촌 재종제(再從弟)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