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승회균(承晦均) |
족보명 | 승영진(承永震) |
자 / 호 | 명여(明汝) / 춘악(春岳) |
본관 | 연일 승씨[1] |
출생 | 1890년 9월 20일 |
평안도 정주목 신안통 안흥리[2] (현 평안북도 정주시 신안리) | |
사망 | 1931년 |
중국 지린성 | |
묘소 | 평안북도 정주시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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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승병균은 그의 첫째 남동생이며, 독립유공자 승영호는 그의 6촌 재종제(再從弟)이다.
2. 생애
1890년 9월 20일 평안도 정주목 신안면 안흥리(현 평안북도 정주시 신안리)에서 아버지 승계목(承啓睦)과 어머니 영천 김씨(永川 金氏) 김용조(金龍祖)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0년 남만주 환인현(桓仁縣)[3]으로 이주한 뒤, 1913년 동지 김진호(金鎭浩)·곽봉조(郭鳳祚)·김규환(金奎煥)·이시열(李時說) 등과 함께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조직,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환인현에 배달학교를 설립해 청년들에게 교육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창했다.
1920년 11월 11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세계혁명단체 대표자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그해 편강렬, 양기탁 등이 중심이 되어 봉천성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4]에서 조직한 의성단(義成團)에 가입하여 길림(吉林), 봉천, 장춘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 영사관, 만철병원 등을 습격해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다. 1925년 단장 편강렬이 하얼빈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자 그의 후임으로 의성단 단장이 되어 항일무장 활동을 계속하였다. 또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에 참가하여 정의부를 조직하고 김호·윤덕보(尹德甫) 등과 그 재정분과위원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1931년경 지린성 강남공원에서 중국 측 일제의 주구 밀정이었던 이종형[5]에 의해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승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