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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2 08:33:33

스포루스

스포루스
라틴어: Sporus
생몰년도 미상 ~ 69년
출생지 로마 제국 미상
사망지 로마 제국 로마
지위 해방노예
국가 로마 제국
가족 네로(첫번째 남편)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두번쨰 남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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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제5대 황제 네로남총.

2. 생애

현대의 여러 학자는 '스포루스(Sporus)'라는 이름은 씨앗 또는 정액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σπόρος(spóros)'에서 유래했으며, 그가 거세된 뒤에 붙은 별명이었을 거로 추정한다. 다만 영국 역사가 데이비드 우즈(David Woods)는 2009년 논문 <네로와 스포루스>에서 스포루스는 사비니족에서 유래한 라틴어 스푸리우스(spurius, 사생아)와 비슷하며, 네로는 이 이름의 그리스어 이름인 스포루스로 불렀을 거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스포루스는 티베리우스의 손자이자 포파이아 사비나의 조카였을 지도 모르며, 네로는 왕위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그를 거세하고 아내로 삼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네로가 마음에 들어했던 청년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일각에서는 그가 로마 부자들에게 구매된 뒤 소년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 그리고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거세된 푸에르 델리카투스(Puer delicatus)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디오 카시우스는 그를 해방노예의 자녀라고 밝혔다.

타키투스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네로는 64년 사투르날리아 축제 동안 피타고라스라는 남성 해방노예와 결혼해 며칠간 지냈는데, 피타코라스가 신랑을, 네로는 신부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65년 포파이아 사비나가 급사한 뒤, 네로는 자신의 정부였던 스타틸리아 메살리나를 66년에 황후로 삼았다. 그해 말 또는 67년, 네로는 포파이아 사비나와 무척 닮았던 스포루스를 거세하고 스포루스와 공식적으로 결혼한 뒤, 로마 황후의 예복을 입고 대중 앞에 나타나도록 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스포루스는 "지참금과 신부용 베일을 포함한 모든 통상적인 의식을 거쳐" 결혼하기 전에 여장을 하고 황후에게 어울리는 보석을 차려입었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는 여기에 더해 네로는 피타고라스와 일시적으로 결혼했지만 스포루스와의 이번 결혼은 공식적이었으며, 로마인들도 공개적으로 그들의 결혼을 축하했다고 설명했다.

수에토니우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네로와 스포루스가 사람들 앞에서 공개 키스를 하고 서로의 몸을 대놓고 만지는 등 음란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고 묘사하면서, 한 로마인은 "도미티우스(네로의 아버지)에게 그런 아내가 있었더라면 인류에게 행운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포루스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스포루스는 네로에게 프로세르피나하데스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이 새겨진 돌이 달린 반지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스포루스가 자신을 강제로 거세하고 결혼한 네로에게 악감정을 품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 후 네로는 스포루스를 그리스로 데려갔다가 다시 로마로 다려왔고, 네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귀부인 칼비아 크리스피닐라를 스포루스의 의상 관리자로 삼았다. 그리고 68년 2월 사투르날리아 행사 때 지난날 자신의 '남편'으로 삼았던 피타고라스를 아내 역으로, 스포루스를 남편 역으로 삼았다. 그러던 68년 7월 원로원프라이토리아니에게 버림받은 네로가 도주할 때 세 해방노예 에파프로디투스, 네오피투스, 파온과 함께 그를 따랐고, 스포루스는 네로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본 뒤 그의 시신을 수습해줬다고 한다.

68년 말,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새 황제 갈바가 아직 로마에 도착하지 않을 때 정변을 일으켜서 자기가 황제가 되기로 작심했다. 그는 자신이 칼리굴라 황제의 사생아라고 밝히며, 네로의 합법적인 후계자로서 황위를 계승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네로의 거세된 남자노예이자 동성애인인 스포루스를 아내로 삼고, '포파이아'라고 불렀다. 그러나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은 칼리굴라의 사생아라는 님피디우스의 주장을 전혀 믿지 않았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인정한 갈바가 그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황제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님피디우스를 잡아죽였다.

일부 기록은 스포루스가 69년에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황제와 결혼했다고 밝혔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오토가 자살한 후 새 황제가 된 비텔리우스는 스포루스를 검투사 경기장에서 대중의 오락을 위해 프로세르피나가 강간당하는 장면을 재연하는 데 써먹으려 했다. 이에 스포루스는 치욕을 피하기로 마음먹고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