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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해킷 Steve Hackett | |
<colcolor=#fff><colbgcolor=#000> 본명 | 스티븐 리처드 해킷 Stephen Richard Hackett |
출생 | 1950년 2월 12일[1] ([age(1950-02-12)]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핌리코 | |
국적 | 영국 |
소속 | 제네시스 (1971 – 1977, 탈퇴) |
장르 | 프로그레시브 록, 클래식 음악, 팝 록, 월드 뮤직 |
사용 악기 | 기타, 보컬, 베이스, 키보드, 하모니카 |
활동 기간 | 1968년 – 현재 |
1. 개요
영국의 기타리스트. 제네시스 소속의 기타리스트로 유명하다.
2. 생애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전 가족이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갔지만 영국에 대한 향수병에 시달리던 어머니 때문에 얼마 안가 영국으로 돌아왔다. 어렸을적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등의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였으며 조금 더 커서는 존 메이올, 로버트 존슨 등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를 접했다. 다른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비틀즈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1970년 피터 가브리엘이 멜로디 메이커지에 개시한 제네시스 멤버 모집 광고를 보고 필 콜린스와 함께 제네시스 오디션을 봤고,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다. 제네시스로서 그가 나타난 첫 공연은 1971년 런던 시티 칼리지 공연이다. 이후 피터 가브리엘이 탈퇴하고 필 콜린스가 밴드의 주도권을 잡을때도 별 문제 없이 밴드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이내 필 콜린스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보다 상업적인 음악을 하고 싶었던 필 콜린스와 달리 스티브 해킷은 클래식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정통 프로그레시브 록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1977년 스티브 해킷은 제네시스를 떠나 솔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솔로 활동은 피터 가브리엘, 필 콜린스 등과는 달리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수준 높은 음악성으로 평론적으로는 매우 좋은 평가를 얻었다. 최근에는 제네시스 활동과 자신의 솔로 활동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2005년 원년 멤버 5인방의 재결성 논의가 있었을때 다시 제네시스 가입 직전까지 갔지만, 피터 가브리엘이 불참하는 바람에 그 역시 불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피터 가브리엘이 빠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최근인 2014년에는 BBC의 다큐멘터리인 "Genesis: Together and Apart"에서 자신의 분량이 너무 적었다고 공개 비판하였으며, 2020년 7월에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3. 평가와 영향력
제네시스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전인 1977년[2]에 제네시스에서 탈퇴했기 때문에, 프로그레시브 록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영향력은 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평론가들과 록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기타리스트로 불릴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기타리스트로 꼽힌다.
흔히 록 음악에 태핑 기법을 도입한 사람으로 에디 밴 헤일런이 꼽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에디 밴 헤일런이 1978년 Van Halen 앨범에서 태핑을 선보이기 수년 앞서서 스티브 해킷은 제네시스의 음악에 태핑 기법을 도입하였다. 재즈를 제외한 다른 음악 장르에서 태핑 기법을 도입한 것은 스티브 해킷이 거의 처음이라고 한다. 밴 헤일런이 1980년대 헤비 메탈 밴드중 세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크게 성공한만큼, 스티브 해킷의 인지도가 에디 밴 헤일런의 발끝만도 못미쳐 묻혔을 뿐이다. 그러나 에디 밴 헤일런은 스스로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기타리스트로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그리고 스티브 해킷을 꼽았다. 직접적으로 그에게서 태핑 기법의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만큼, 스티브 해킷의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과 록 음악을 결합한 시도 역시 후대의 프로그레시브 메탈, 네오 클래시컬 메탈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 두 분야에서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러시의 알렉스 라이프슨과 잉베이 말름스틴[3]이 모두 스티브 해킷의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스티브 해킷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등의 클래식 음악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에릭 클랩튼, 존 메이올, 피터 그린, 지미 페이지 등의 블루스 음악가들로부터도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 외에 대중 음악가로는 비틀즈와 킹 크림슨의 영향력을 언급하였다.
4. 여담
- 지미 페이지, 슬래시, 믹 테일러 등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깁슨 레스폴 사용자로 꼽힌다.
- 프로그레시브 록 기타계의 "두 스티브"중 한명이다. 나머지 한명은 예스와 아시아에서 활동했던 스티브 하우. 둘은 같이 슈퍼밴드 GTR에서 활동한 바 있다.
- 유독 한국에서 표기가 들쭉날쭉한 사람이다. "스티브 해킷"이 자주 쓰이지만 그 외에도 "스티브 하켓" "스티브 해켓" "스티브 하킷" 등 수많은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
- 결혼은 총 세번했다. 두번째 아내와는 이혼 과정에서 로열티 및 저작권 문제가 생겨 수년간 법적공방을 벌여야했다.
- 폴란드계 영국인이다. 가족이 1차 세계대전 도중 독일과 러시아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 난민 사태 당시 난민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