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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강인한 왕(Силни) |
출생 | 1308년 |
세르비아 왕국 | |
사망 | 1355년 12월 20일 (향년 43세) |
세르비아 제국 프리즈렌 | |
재위 | 세르비아 국왕 |
1331년 ~ 1346년 | |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차르 | |
1346년 ~ 1355년 | |
아버지 |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 |
어머니 | 불가리아의 테오도라 |
형제 | 두스만 네마니치, 시메온 우로시, 옐레나 네마니치 수비치, 테오도라 네마니치 |
배우자 | 불가리아의 엘레나 (1332년 결혼) |
자녀 | 스테판 우로시 5세, 테오도라 우로시 |
가문 | 네마니치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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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왕국의 제8대 국왕이자 세르비아 제국의 건국자. 발칸 반도의 상당 부분을 석권하고 동로마 제국을 정복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며, 세르비아 성문법을 제정하는 등 내치에도 힘을 기울이면서, 세르비아 최전성기를 이룩한 명군이다.2. 생애
2.1. 초년기
1308년경 당시 제타 공작을 맡았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와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스밀레츠의 딸인 테오도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314년, 아버지 데찬스키는 조부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토벌대에게 체포되었다. 밀루틴은 스코페 지하 감옥에 갇힌 데찬스키에게 실명형을 선고했다.[1] 이후 두샨은 아버지, 어머니, 친형제 두스만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되었다. 두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자라면서 동로마 제국의 선진 문화와 제도 및 황제가 사는 화려한 궁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1320년 밀루틴의 용서를 받은 아버지와 함께 귀국한 두샨은 1321년 10월 29일 밀루틴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아버지에 의해 "젊은 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 후 두샨은 수년간 군사 분야에서 많은 성공을 거뒀다. 1329년 보스니아 반샤그의 반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가 세르비아 왕국의 영역인 자후믈례를 공략한 뒤 트레비네와 코나블리를 침공한 걸 응징하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출진해 프리보이 인근에서 보스니아군을 대파했다. 스테판 2세는 투 도중 말이 죽는 바람에 낙마했고, 가신인 부크 부코슬라비치가 말을 건네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부코 슬라비치는 스테판 2세를 대신해 세르비아군에 맞서 항전했지만 끝내 전사했다. 1330년 7월 28일, 벨버즈드 전투에서 중기병 2,000명을 이끌고 불가리아군을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를 처단했다.[2]
1331년, 두샨과 아버지 데찬스키 사이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했다. 당시 데찬스키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회피하자, 세르비아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여서 부와 명예를 확보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여기고 국왕에게 반감을 품고 두샨을 꼬드겼다. 아들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게 된 데찬스키는 아들의 근거지인 제타로 군대를 보내 스키다르를 약탈했다. 이후 부자는 보야나 강을 두고 대치하다가 1331년 4월에 라구사 공화국의 중재로 극적으로 화해했다. 그러나 3개월 뒤 데찬스키가 소환령을 내리자, 두샨은 부친이 자기를 불러다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판단하고, 자기가 선수를 치기로 결심해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부친이 머물고 있던 네로디믈례를 습격했다. 스테판 우로시 3세는 가까스로 도피했으나, 추격대가 따라붙으면서 페트리치에서 사로잡힌 뒤 투옥되었다. 그해 9월 8일 두샨이 세르비아의 새 국왕으로 즉위했고, 11월 11일 즈베칸 성에 갇혀있던 데찬스키가 사망했다. 공식적으로는 병사했다고 발표되었지만, 세간에는 두샨이 사람을 시켜 아버지를 시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2.2. 확장 정책
두샨은 즉위 직후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시작했다. 1332년 7월 말 불가리아의 새로운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의 누이이며 크란의 데스포티스 스라치미르의 딸인 엘레나와 결혼해, 발칸 반도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불가리아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후 보스니아 반샤그와도 평화협약을 맺었고, 라구사 공화국과도 펠예삭 반도와 스톤 시를 라구사에 넘기는 대가로 8천 두카트를 일시적으로 받고 5백 두카트를 매년 공물로 받는 조건으로 협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세르비아의 서부 및 동부 전선을 평화롭게 한 뒤, 두샨은 남쪽의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단행하기로 했다.1333년, 두샨은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세르비아군은 스트루마 강에 도달해 스트루미카를 함락했다. 그해 말, 테살로니키 총독으로서 테살로니키 및 서부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를 관장하던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가 권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음해하는 공작을 폈다가 발각되자 세르비아로 망명했다. 두샨은 그를 환대하고 선봉대 지휘관을 맡겼다. 시르얀니스는 1334년 봄에 스토리아와 그 일대의 요새 여러 곳을 점령해 두샨에게 넘겼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스프란체스 팔레올로고스를 테살로니카 일대의 총독으로 임명해 시르얀니스를 유인한 후 생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334년 8월 23일, 시르얀니스는 소수의 가신과 함께 스프란체스의 초대를 받아 진영에 들어갔다가 급습을 받고 살해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에 책임을 물어 스프란체스에게 견책 처분을 내렸다가, 곧 취소하고 대 스트라토페다르크의 서열로 승격시켰다.
한편 두샨은 시르얀니스의 협력에 힘입어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뒤 테살로니키를 포위했다. 그러나 시르얀니스가 살해된 뒤 동로마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1334년 8월 26일 안드로니코스 3세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세르비아는 이 협약에서 마케도니아를 돌려주는 대가로 스트루미카, 프릴레프, 오흐리드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동로마 제국은 헝가리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세르비아 왕에게 보조군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동로마 제국과 화해한 뒤, 두샨은 헝가리 왕국과 보스니아 반샤그로 눈길을 돌렸다. 1334 ~ 1337년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보스니아 반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에 맞서 여러 군사 작전을 이끌었지만, 기록이 부실해서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헝가리군이 북부 세르비아를 침공했다가 격퇴되었고, 자후믈례와 네레트바의 많은 귀족이 두샨의 주권을 인정한 것만은 분명하다.
1341년 6월 15일, 안드로니코스 3세가 붕어했다. 그 후 어린 아들 요안니스 5세가 황위에 올랐다. 이후 새 황제의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안나와 안드로니코스 3세의 동료였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의 갈등이 불거진 끝에 1341년 10월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두샨은 동로마 제국의 내분을 최대한 이용해 이득을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기에게 의탁한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보호해주겠다고 나섰고, 선의의 표시로 칸타쿠지노스가 디디모티쿰으로 돌아가는 길에 용병 부대를 붙여줬다.그러나 중도에 세레스에서 가로막히자 포위 공격했으나 전염병이 돌아 정예병 1,500명이 몇 주 만에 죽는 바람에 세르비아로 도망쳤다. 1343년, 칸타쿠지노스는 두샨의 지원을 받고 재차 군대를 일으켜 국경 지대를 돌파하고 디디모티쿰까지 진군했다.
칸타쿠지노스의 위세가 갈수록 강해져서 곧 동로마 황위를 쟁취할 것처럼 보이자, 두샨은 제국의 내전을 좀더 끌기 위해 칸타쿠지노스 대신 사보이아의 안나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해 9월, 갓 다섯 살된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를 요안니스 5세의 누이와 약혼시키고 군사적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1344년, 두샨의 군대는 칸타쿠지노스의 도움 요청을 받은 스미르나 통치자 우무르 베이의 군대와 맞붙었다. 5월 하반기, 세르비아 보이보드 프렐류프가 이끄는 세르비아 분견대는 세레스 시 동쪽의 스테파니아나 전투에서 우무르 베이의 튀르크군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이 패배는 세르비아의 마케도니아 지방에 대한 진격을 막지 못했고, 1345년 가을 세레스를 비롯한 할키디키 반도 전체가 두샨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여기에 테살로니키를 제외한 발칸 서부 일대의 동로마 제국 영역을 정복했으며, 에게 해의 섬 지역도 공략하고자 강력한 해군을 갖춘 베네치아 공화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2.3. 세르비아 제국 선포
1343년, 두샨은 "세르비아, 알바니아, 해안가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요새화된 도시 크루이치에 헌장을 보내며, 자신을 "불가리아의 왕"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1345년 9월 25일, 세레스를 공략한 뒤 이곳에서 회의를 열어 자신을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차르"(цар Срба и Грка / Βασιλέως και αυτοκράτορας Σερβίας και Ρωμανίας)라고 선언했다. 이윽고 1346년 4월 16일 부활절, 두샨은 스코페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뒤 세르비아 총대주교 요아니키예 2세의 주관하에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차르로 즉위하였다. 또한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를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왕"으로 임명해,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며, 이복 형제인 시메온 우로시와 처남 요반 아센을 데스포티스로 삼았고, 뎨얀 드라가스와 브란코 말데노비치를 세바스토크라토르에 선임했고, 군 지휘관 프렐류프와 보히나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이 새로운 명칭은 동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대다수 나라들의 인정을 받지 않았고, 오직 베네치아와 라구사 공화국만이 그를 황제로 인정했다. 이에 두샨은 동로마 제국을 좀 더 압박하기로 마음먹었다. 세르비아군은 1347년 초부터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아이톨리아, 아카르나니아를 향한 공세를 벌인 끝에 1348년 말에 이 모든 땅을 점령했다. 두샨은 이 정복지의 총독으로 이복형제 시메온 우로시를 임명했다. 1348년 테살리아를 정복하고 프렐류프를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보이나를 드라마 총독으로 선임했다. 그 후 전유럽이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도록 하려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베네치아와 군사 동맹을 맺고 수륙 양면에서 도시를 협공하려 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두샨이 너무 강해지면 위험하다고 여겼기에, 두샨의 거듭된 설득과 회유를 뿌리쳤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칼리스토스 1세는 두샨과 요아니키예 2세를 파문했다.
1349년, 보스니아 반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는 두샨이 발칸반도 남부 일대를 공략하는 데 관심이 쏠린 틈을 타 약탈부대를 파견해 코나블레와 트라브니야를 황폐화했다. 이에 격노한 두샨은 1350년 군대를 소집해 보스니아를 침략할 준비를 했다. 스테판 2세는 정면 대결로는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두샨을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적을 험준한 지역으로 유인한 뒤 습격해 무너뜨리기로 했다. 그러나 두샨은 적군의 유인책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고 보스니아 지역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대거 끌어들였고, 스테판 2세는 보보바츠에 고립되어 세르비아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에 위치한 보보바츠 공략에 애를 먹은 데다, 보스니아인들의 유격 전술에 고전했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6세가 소규모 병력을 일으켜 칼키데스 반도를 점령한 뒤 베리아와 보덴을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샨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스테판 2세는 빼앗겼던 영역을 되찾은 뒤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의했고, 두샨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두샨의 후계자 스테판 우로시 5세와 스테판 2세의 딸 엘리자베타가 결혼하기로 했고, 자후믈례 일대는 지참금으로서 세르비아에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테판 2세는 약속을 깨고 1353년 6월 엘리자베타를 헝가리 왕 러요시 1세와 결혼시켰다.
얼마 후, 동로마 제국에서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 사이에 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두샨은 요안니스 5세를 지지했고, 오스만 술탄국은 요안니스 6세를 지지했다. 1352년, 세르비아군은 디모티카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격파되었다. 이후 두샨은 오스만 술탄국이 갈리폴리 시에 거점을 확보하고 발칸 반도로 넘어오는 것을 경계해 이들을 물리칠 방안을 모색했고, 교황에게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조직하자고 제안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1354년,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가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했다. 두샨은 베오그라드에서 루드니크 산지에 대한 공격을 가하는 헝가리군에 대적했지만, 그들의 강력한 전투력에 고전했다. 이에 교황의 우위를 인정하겠다고 밝혔고, 러요시는 만족하며 수도로 귀환했다.
2.4. 내치
1331년 두샨이 아버지 데찬스키를 상대로 정변을 일으킨 직후, 제타 공국의 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두샨은 세르비아 정교회와 코토르 등 해안 도시들의 도움에 힘입어 1332년 반란을 진압하고 반복되는 반란의 온상인 제타 공국에 대한 왕실의 통제를 강화했다. 이후 두샨은 국가를 동등한 두 부분으로 나눠서 통치하기로 했다. 세르비아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북부 지역은 세르비아 왕의 전통적인 방식으로서 통치되었고, 당시에 '로마인'으로 일컬어진 그리스인이 주로 거주하는 남부 지역은 로마 생활 방식에 따라 통치되었다. 이후 '세르비아의 왕, 로마의 황제(rex Rasie, imperator Romanie)'라는 문구가 세르비아 왕실이 발행한 동전에 새겨졌다.두샨은 제국 각지를 다스리는 귀족들에게 데스포티스, 세바스토크라토르라는 동로마 제국식 칭호를 하사했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정기적으로 바치며, 전시에 군대를 적절하게 파견한다면, 그들이 해당 지역에서 자치권을 광범위하게 누리는 것을 허용했다. 동시에, 새롭게 정복된 동로마 제국 영토의 지역 귀족들은 통치에 널리 참여했으며, 그들이 기존에 보유했던 영지 및 영주권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347년부터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아니었던 지역에서도 동로마 제국 모델을 기반으로 한 권력 구조가 도입되었으며, 황제의 총독(cephalia)이 현지에 부임해 군사와 행정 업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1349년 5월 21일, 두샨이 소집한 스코페 공의회에서 세르비아 최초의 성문법인 <스테판 두샨의 법>(Законник Стефана Душана)이 발표되었다. 두샨은 이 법은 백성들이 내세를 위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데 도움이 주는 것에 목적을 둔다고 밝혔다. 1349년 발표 당시 155개 조항이 들어갔고, 1354년 세레스에서 66개 조항이 추가된 이 법전의 초점은 교회 업무, 형법, 공공질서 유지에 있었고, 재산 문제는 관습법 위주로 적용되었고 규제를 훨씬 덜 받았다. 또한 세르비아의 관습법과 동로마 제국의 법률을 대거 삽입했다. 처음 38개 조항은 교회와 관련이 있으며 중세 세르비아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를 다루는 반면, 그 다음 25개 조항은 귀족과 관련이 있었다. 두샨의 법전은 세르비아 제국이 이어지는 동안 헌법으로 취급되었고, 세르비아 제국이 무너진 후에도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주도하에 세르비아 전역에서 계속 통용되다가 1459년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전역을 석권한 뒤 오스만 제국의 법전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두샨 법전은 그르발리와 파슈트로비치 등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르비아 자치구에서도 사용되었다.
한편, 그의 통치 동안 페치 대교구를 중심으로 한 세르비아 교회의 지위가 크게 강화되었다. 1346년 초 스코페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요아니키예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동의 없이 세르비아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여기에 두샨의 정복 덕분에 이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관할권에 있던 아토스와 여러 그리스 교구가 세르비아 교회의 관할권에 넘어갔다. 1347년, 두샨이 세레스에서 소집한 공의회는 점령지에 있는 그리스 주교들을 대신해 세르비아인 주교들을 임명하기로 결의했다. 두샨은 1347~1348년 아토스를 순례하며 그곳의 수도원에 선물을 전달하는 등, 여러 수도원에 방문해 상당량의 선물을 기부했으며, 수도원에게 면세 혜택을 부과하고 토지와 마을 소유권을 넘겼다. 1347년 두샨의 명으로 프리즈렌 인근에 건설된 성 대천사 수도원은 규모와 아름다움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타 수도원에 뒤지지 않는다는 호평을 받았다.
2.5. 최후
1354년 말에서 1355년 초, 두샨은 세레스에서 겨울을 보냈다. 1355년 늦봄과 여름은 브레갈리차 강의 오른쪽 강둑에 있는 크루피슈테에서 보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문인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공략하였다. 뒤이어 그동안 육성한 해군까지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1355년 12월 20일, 그는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프리즈렌 인근의 대천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 제국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무능한 후계자 스테판 우로시 5세로 인해 건국 25년 만에 와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그의 유해가 안장된 대천사 수도원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3. 가족
- 불가리아의 엘레나(1315 ~ 1374): 불가리아 제2제국 크란의 데스포티스 스라치미르의 딸,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의 누이. 남편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 사후 1355년부터 1356년까지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를 위해 섭정을 맡았고, 1359년 옐리사베타라는 수도명으로서 수녀가 되었다. 하지만 1365년까지 세레스에서 영지를 경영했고,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1374년 사망할 때까지 여러 수도원 공동체의 재건과 혁신을 감독했다. 사후 세르비아 정교회의 성녀로 시성되었다.
- 스테판 우로시 5세(1336 ~ 1371):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1346 ~ 1355),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1355 ~ 1371).
- 테오도라 우로시: 1351년 오스만 술탄국 술탄 오르한의 후궁이 되었다.
4. 기타
현 세르비아에선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민족주의자들이 허구한날 해대는 소리가 스테판 황제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다.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에서 발칸 지역의 재야 장수 '두샨'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전투/지모 순으로 76/82/73, 병과적성은 보C 궁B 기D 수E, 특기는 건설, 문화, 등용, 돌격, 공성이다. 시나리오 2가 1271년에 시작하기 때문에 두샨을 등용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참고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1337년 시나리오에서 세르비아 국왕으로 플레이할 수 있고 흑사병[3]과 급사만 조심하면 할 만하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지휘관 중 한명이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였던 엔리코 단돌로의 곤손이다. 엔리코 단돌로의 손녀인 안나 단돌로가 스테판 우로시 1세에게 시집을 가 세르비아 왕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스테판 4세에게도 엔리코 단돌로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관련 링크
5. 관련 문서
[1] 하지만 데찬스키는 시력을 잃지 않았다. 본인은 훗날 "신의 은총 덕분에 실명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지만, 집행인들에게 뇌물을 건네서 실명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2] 일부 기록에는 미하일 아센 3세가 낙마 후 체포된 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낙마로 인한 중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하고, 또 다른 기록에는 두샨이 포로로 잡힌 미하일 아센 3세를 손수 쳐 죽였다고 하며, 낙마한 직후 세르비아군의 창에 찔러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3] 흑사병 발생 설정을 역사적인 발생 시기에 맞추면 1337년으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흑사병이 유럽에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