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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7:00:27

메리 스크랜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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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투명 1x10.png파일:이화여자대학교 심볼.svg파일:투명 1x10.png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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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메리 스크랜튼
제2대
루이자 로드와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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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 프라이
제5대
진네트 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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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장자
메리 스크랜튼
Mary Scranton
파일:메리 스크랜튼.jpg
출생 1832년 11월 9일

[[미국|]][[틀:국기|]][[틀:국기|]] 매사추세츠 주 벨처타운
사망 1909년 10월 8일 (향년 76세)

[[대한제국|]][[틀:국기|]][[틀:국기|]]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묘소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직업 선교사
직책 이화학당 당장
자녀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1]
종교 기독교 (개신교, 감리교회)[2]

1. 개요2. 생애3. 기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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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가 하는 일이 이 땅의 사람들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한국에 온 최초의 외국인 개신교(감리교) 여성 선교사.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과, 매향중학교[3]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의 전신인 삼일소학당을 설립했다. 한국 근대 여성교육에 헌신한 공로로 2009년 12월 21일 일반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4], 헨리 아펜젤러[5], 어니스트 베델, 호머 헐버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후세 타츠지, 조지 쇼, 윌리엄 마튼 베어드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전후로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 은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2. 생애

메리 스크랜튼과 이화학당
미국 매사추세츠 주 출신인 메리 스크랜튼은 1885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WFMS)[6]의 파송으로 의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7]과 함께 한국에 왔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에서의 생활은 즐거우며 선교사들의 생활 조건도 훌륭하나, 나는 내 민족(한국인)에게 가서 그들 속에서 살고 싶다"라고 하였다.

1886년 이화학당과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녀관을 설립했고,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동대문감리교회, 아현감리교회, 상동감리교회를 세웠다.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는 1885년 6월 30일 정동에 도착하여, 8월에는 미국공사관 근처에 집회하기 충분한 큰 집 1채를 매입하고 여성선교의 기지로 삼았다. 스크랜튼 선교사는 계속 친구들에게 편지하여 건물과 대지를 구입할 재정을 호소하였고, 오르간전도예배에 필요한 기구들도 요청하여 확보하였다. 이에 따라 1885년 10월 23일에는 정동일대에 19채의 한옥과 6,200평의 대지를 매입하였다. 출처
학생 한 명으로 시작했는데, 그 여인은 한 관리의 으로서, 남편은 이 여인이 영어를 배워 후에 왕비의 통역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인은 3달 만에 우리를 떠났다. 1달 뒤에 소녀가 왔다. 가난 때문이었는데 며칠 후 어머니가 와서 "차라리 굶을지언정 외국인에게 딸을 맡길 수는 없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도 "선교사가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다"란 소문을 냈다. 결국 "딸을 나라 밖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준 후에야 그 어머니는 마음을 놓았다 출처.
1885년 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1년간 입학생이 없었다. 처음에는 학생을 구할 수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한국 여성들의 대부분은 집안일을 배우며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하층민의 딸인 경우 매매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화학당에서 남자 선생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부모들이 딸을 교육시키지 않겠다고 항의함에 따라, 스크랜튼은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휘장을 치고 서로 그 모습을 바라보지 않게 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1886년 5월 31일, 마침내 첫 학생이 입학하면서 교육선교를 시작하였다. 단 1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현재도 이화여자대학교는 Ewha Women's university라는 복수형 대신 Womans university라는 단수형을 사용하고 있다. 출처. 이후로 곧 이어서 3명의 소녀가 입학하게 되었고, 이후 학교는 계속 성장하여 1887년에는 고종으로부터 '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의 “이화학당”(梨花學堂) 이라는 교명(校名)을 받았다.

스크랜튼 부인은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으로서 이후로도 이화학당 업무와 여학생들의 교육, 또한 기독교 발전에 많은 노력을 다했고 1904년까지 교장으로 일했다. 이후로 1905년 내한한 룰루 프라이 당장에게 이화학당의 관리를 맡긴 후 교장에서 퇴임하였다. 이화학당의 성공 노하우를 발판삼아 보시동 수원읍 교회(현 종로감리교회)의 초가집에서 여학생 3명으로 삼일소학당[8]을 개교하였다. 이후 공옥여학교, 매일여학교[9]를 세웠다. 이뿐만 아니라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중앙여학교 등의 설립을 조력하였다. 말년에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유를 받았지만, 그녀는 "조선 땅에서 죽겠다"는 신념이 확고해서 미국으로 가지 않고 평생을 지방을 순회하며 선교와 교육활동을 하였다. 1909년 10월 8일 한국에서 세상을 떠나,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3. 기념 현황

파일:메리스크랜튼 흉상.jpg
이화여자대학교 메리 스크랜튼 설립자 흉상


[1] 1856~1922 본명은 윌리엄 벤튼 스크랜튼으로, 어머니 메리처럼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한국명은 시란돈(施蘭敦).[2]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와 똑같은 감리교 감독교회 소속이다.[3] 본래 여중이었다가 2010년부터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4] 연세대학교 설립자[5] 배재학당 설립자[6] 1869년 설립된 여성해외선교사회는 매사추세츠에 위치한 도시인 보스턴의 트레몬트가를 중심으로 여성 선교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여성선교단체였다. 이 단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개발도상국 여성교육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들에게도 이화여자대학교는 성공사례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출처[7]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은 당시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인재였다. 출처[8] 매향중학교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의 전신. 매향중은 본래 여자중학교였으나 2010년부터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9] 동대문여자보통학교가 되었으나 1942년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