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前 축구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슈타니슬라우스 코비에르스키 Stanislaus Kobierski | |
본명 | 슈타니슬라우스 "타우" 코비에르스키 Stanislaus "Tau" Kobierski | |
출생 | 1910년 11월 15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뒤셀도르프 | |
사망 | 1972년 11월 18일 (향년 62세)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 | |
국적 | 서독 | |
신체 | 173cm, 76kg | |
직업 | 축구선수(아웃사이드 레프트 / 은퇴) | |
소속 | 선수 | TuRU 뒤셀도르프 (1929~1930)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30~1950) |
국가대표 | 26경기 9골(서독 / 1931~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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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전 축구인.2. 생애[1]
2.1. 출생
코비에르스키의 부모는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으로 원래 프로이센 왕국의 포젠[2] 출신이다. 포젠에서 겔젠키르헨을 거쳐 뒤셀도르프에 정착했다.2.2. 선수 생활
2.2.1. 클럽
코비에르스키는 슈바이츠-바이스 06 뒤셀도르프 유스팀에서 축구를 배웠다. TuRU 뒤셀도르프에서 1929년에 데뷔하였고 1930년부터 1941년까지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서 활동하였다.당시 파울 야네스가 이끌던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는 가울리가[3] 니더라인에서 5회 연속 우승에 빛나는 니더라인 지방의 최강팀이었다. 코비에르스키도 독일 축구 챔피언십 39경기에서 10골, 참메르포칼에서는 18경기 13골을 넣으며 포르투나의 성공에 큰 보탬이 되는 활약을 했다.
코비에르스키 역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의 유일한 우승 기록 멤버 중 한 명이며 그 외에도 1941년에는 베를린 연합팀 주장으로 뛰기도 했다. 하지만 코비에르스키는 2차 대전 시기에 소련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1949년에 다시 독일에 돌아왔다. 39살의 노장이었던 그는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오베르리가로 승격시키는 2골을 넣고 은퇴하였다.
2.2.2. 국가대표
코비에르스키의 국가대표 데뷔전은 1931년 9월, 하노버에서 열린 덴마크와의 시합이었고 독일은 4대2로 덴마크를 이겼다. 첫 득점은 1932년 9월의 스웨덴전에 기록하였다.1933년 12월 폴란드전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는데 이 경기는 괴벨스의 나치 프로파간다로 더욱 유명하다.
코비에르스키는 월드컵에도 참가했는데, 1라운드 벨기에전에서 독일 대표팀의 첫 골이자 선제골을 기록하였다. 그는 3,4위전을 제외한 3경기에 출전했다.
코비에르스키의 마지막 A매치는 1941년 핀란드와의 경기였으며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의 활약으로 6대0 대승을 거두었다.
2.3. 이후
코비에르스키는 파울 야네스와 바에슈베일러의 코치를 맡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뒤셀도르프에서 복권 판매점을 운영했고, 1972년에 사망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크로스와 드리블에 능한 클래식 윙어였다.4. 뒷이야기
- 코비에르스키는 1939년 국가사회주의 자동차군단에 가입했다.
5. 수상
5.1. 클럽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1회: 1933(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6(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DFB 포칼 준우승 1회: 1937(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독일 서부 리그 우승 1회: 1931(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가울리가 니더라인 우승 5회: 1935-36, 1936-37, 1937-38, 1938-39, 1939-40(포르투나 뒤셀도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