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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4-02 01:25:31

송성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송성수
宋聖秀[1]로 오기한 자료도 보이며, 유상걸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는 宋秀로 등재돼 있다.]
파일:송성수.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노산(櫓山)
본관 신평 송씨(新平 宋氏)[2]
출생 1905년 11월 13일
전라남도 남평군 저포면 차산리
(現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우산리[3] 차산마을 897번지[4])
사망 1972년 8월 13일 (향년 66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62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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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05년 11월 13일 전라남도 남평군 저포면 차산리(現 나주시 남평읍 우산리 차산마을 897번지)에서 아버지 만회(晩晦) 송해초(宋海初, 1873. 6. 20 ~ 1930. 11. 5)와 어머니 남평 문씨 문호동(文虎洞, 1872. 9. 3 ~ 1944. 12. 22)[5]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남평면 우산리 898번지[6]로 이주했다.[7]

1928년 6월 29일 광주농업학교(現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중 김윤성(金允性), 김재룡(金在龍), 나석현(羅碩鉉), 유상걸(柳上杰) 등과 함께 일본인 교유(敎諭) 겸 기숙사 사감으로 있던 모리오카 마사오(盛岡雅夫)에 대한 배척 운동을 주도했으나, 학교 당국에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배척 운동을 주도한 학생 12명을 퇴학시키자 즉각 동맹휴학에 착수했다. 이때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반대하는 성명서 및 성토문을 내걸었으며, 동맹휴학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동맹휴학 중앙본부를 결성하고 모계부(謀計部)·연락부·동원부·탐정부 등의 부서를 정하여 동맹휴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또한 조선인 교유 최대열(崔大烈)[8]이 동맹휴학에 참여한 학생들의 행동을 탐지하는 활동을 수행하자, 그는 최대열에게 한국민족으로 애국심을 가지라는 내용의 협박 경고문을 보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28년 9월 2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소요, 주거침입, 불법 체포, 상해 등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여 1928년 11월 8일 대구복심법원 형사부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징역 8개월(법정 미결 구류 통산 37일),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출옥하였다.

1931년 12월 19일에 출옥한 그는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에 가입한 뒤 나주군화순군의 책임자가 되어 소작권 쟁의 등 적극적인 농민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체포되었다. 1933년 11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34년 11월 27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 구류일수 73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와 평범한 회사원으로 근무했는데, 1945년 3월 작성된 《昭和二十年(쇼와 20년, 1945)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 特高課(특고과)》에 등재된 것으로 보아 8.15 광복 직전까지도 일본 제국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에는 상경했고, 1972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했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8년 5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2] 군수공파(郡守公派) 22세 수(秀) 항렬.[3] 신평 송씨(新平 宋氏) 집성촌이다.[4]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은 1915년 당시 송성수의 4촌 형 우회(又晦) 송종수(宋鍾秀, 1881. 11. 9 ~ 1955. 3. 13)의 소유였다. 이후 1920년 12월 7일 송성수의 아버지 만회 송해초에게로 소유권보존등기가 이뤄졌고, 1984년 12월 5일에는 송성수의 큰조카 송병호(宋炳虎, 1927. 8. 22 ~ 1995. 12. 24)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1996년 1월 25일 송병호의 부인 울산 김씨 김규숙(金圭淑, 1928. 1. 11 ~ 2010. 9. 4)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2001년 6월 19일 송병호의 장남 청암(淸巖) 송교인(宋敎仁, 1949. 8. 29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돼 현재에 이른다.[5] 문석진(文錫進)의 딸이다.[6]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은 1915년 당시 송성수의 아버지 만회 송해초의 소유였다. 이후 898-1번지는 1980년 8월 25일 송성수의 4촌 형 우회 송종수의 증손자 송명원(宋命元, 1955. 12. 4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898-2번지는 1931년 4월 4일 송성수의 형 유당(柔堂) 송덕수(宋德秀, 1900. 7. 20 ~ 1984. 5. 3)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7] 1945년 3월 작성된 《昭和二十年(쇼와 20년, 1945)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 特高課(특고과)》 참조.[8] 이후 1939년 전라남도청 산업부 농촌진흥과에서 지방산업기수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