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성여자대학교 총장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981b45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근화여학교 설립자 차미리사 | |||
덕성여자대학 학장 | ||||
초대 송금선 | 제2대 박원국 | 제3대 유정렬 | 제4대 한관섭 | |
제5대 유정렬 | 제6대 홍웅선 | 제7대 유정렬 | ||
덕성여자대학교 총장 | ||||
초대 김종서 | 제2대 유정렬 | 제3대 주영숙 | 제4대 김용래 | |
제5대 이강혁 | 제6대 신상전 | 제7·8대 지은희 | 제9대 홍승용 | |
제10대 이원복 | 제11대 강수경 | 제12대 김건희 |
<colbgcolor=#000><colcolor=#fff> 초대 덕성여자대학 학장 송금선 宋今璇 | |||
창씨명 | 후쿠자와 레이코 福澤玲子 | ||
출생 | 1905년 1월 15일 |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사망 | 1987년 10월 24일 (향년 82세) |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자택 | |||
본관 | 여산 송씨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아명 | 송금섬(宋金蟾) | |
호 | 남해(南海) | ||
가족 | 아버지 송우영, 어머니 김명운 배우자 박준섭 장남 박원국 차남 박원영 삼남 박원택 사남 박원경 | ||
학력 |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1] (졸업) 니가타현 카시와자키 고등여학교 (졸업)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가사과 / 졸업) | ||
약력 | 덕성여자대학 초대 학장 |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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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인, 사회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덕성여자대학교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차미리사와는 다르게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2. 생애
2.1. 출생과 유학 생활
1905년 1월 15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1916년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고, 1919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21년 니가타현 카시와자키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1925년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가사과를 졸업했다.2.2. 교육 활동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1925년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메이지대학 정경학부 출신 박준섭과 결혼하려고 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진주로 내려갔다. 1926년 9월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지냈고, 봉건 관습에 도전하고 생활합리화를 실행한다면서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르고 반소매 원피스를 입고 돌아다녀서 사회의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부모를 설득한 끝에 1929년 10월 박준섭과 결혼했으며, 1930년 4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1934년 5월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교수에 임용되었다.2.3. 친일 행적
여성계의 지도자로 부각되고 있던 시점에서 그녀는 각종 친일단체에 가담하며 여성들을 대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 지원을 독려하고, 식민정책을 홍보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반도부인의 생활개선 좌담회'에 참석했고, 1937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관하던 방송선전협의회의 강사로 활동하면서 황국신민화를 위한 부인교육 강좌를 담당했다. 같은 달 조선부인문제연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8월에는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후 간사로 활동했다.1938년 11월 경기도 사회과가 생활개선 확립을 위해 부인부대 10명을 선정하고 경기도 각 군에서 시국강연회를 열었을 때 부인부대의 일원으로 뽑혀 부천에서 강연했다. 1939년 청담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8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각 도에 순회강연반을 파견했을 때 강사로 참여했다.
1940년 8월 차미리사가 일제의 탄압으로 근화여자실업고등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자 그녀를 대신해 교장에 취임했다. 그녀는 취임 순간에 "오랜 역사 속에서 새출발을 기약할 우리 학교이므로 전교생의 큰 뜻을 받들며 총후의 학원으로 황국신민교육의 완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며 학교의 설립자 차미리사의 뜻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그녀는 재정난에 시달리던 학교를 인수한 후, 남편의 도움을 받아 건물을 새로 짓는 등 확충 작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력회의 채권가두유격대로 참여했으며, 전위여성격려대 강사가 되어 충청남도 천안, 대전, 공주 등지에서 '일본 여성의 갈 길'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주도했다. 같은 달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주최로 열린 '부인궐기 촉부 강연대'의 경기도 강사로 참여하여 '전국인식과 징병징용제의 철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으며, 조광사가 주최한 전시국민생활강조좌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같은 달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10월 <매일신보>의 주최로 열린 '임전생활체제 확립을 위한 중견부인간담회'에 참석했고, 12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이 되었다.
1942년 2월 재단법인 덕성학원 이사에 취임했고, 같은 달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부민관에서 시국강연회를 열자 '싱가포르 함락과 황국 부인의 각오'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같은 해 5월 일제가 조선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자 <매일신보>를 통해 환영담화로 발표했다. 1943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확대 개편되어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경성부연맹 이사에 선임되었고, 7월 경성 영등포에서 '전시생활의 마음가짐'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이끌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대일본부인회조선본부 경성지부 팔판정분회 분회장을 맡기도 했다. 9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2.4. 독립 이후
1950년에는 덕성여대의 전신인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1987년 10월 24일 도봉구 쌍문동 자택에서 향년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