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02년 6월 20일 |
경상북도 상주군 내동면 성동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성동동 187번지)[1] | |
사망 | 1970년 11월 9일 |
서울특별시 | |
본관 | 충주 석씨[2] |
학력 | 경성국어보급학관 (제적)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
가족 | 배우자 차순남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582호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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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902년 6월 20일 경상북도 상주군 내동면 성동동(현 상주시 성동동 187번지)에서 태어났다.1919년 당시 경성국어보급학관(京城國語普及學館)에 재학하던 중 강용석, 성필환, 한암회, 조월연, 성해식 등 동창생들과 함께 상주군 상주면 읍내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3월 23일 상주군 상주면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동지를 규합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이윽고 1919년 3월 23일 오후 5시경, 한암회의 선창으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장터에 모인 500명의 군중을 규합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아[3] 1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상경하였고 1921년 3월 25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본과 1학년에 입학하였으며, 1926년 3월 24일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충청북도 도립 청주의원[4]에서 의원(醫員)으로 근무하였고, 이후 강원도 인제군으로 가서 광제의원(廣濟醫院)을 개업하였다.#
1970년 11월 9일에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1996년 10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