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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6년 2월 27일 |
안동부 상주군 내남면 남성내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남성동 67번지)[1] | |
사망 | 1969년 10월 15일 (향년 73세) |
정부 직할 부산시 (현 부산광역시) | |
본관 | 창녕 성씨 |
이명 | 함심환(咸心煥)[2] |
학력 |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 |
가족 | 배우자 조용철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597호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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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96년 2월 27일 안동부 상주군 내남면 남성내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남성동 67번지)에서 태어났다.1919년 3월 23일 경북 상주군 상주면 읍내에서 강용석·한암회·조월연·석성기·성해식 등과 독립만세시위거사에 대한 밀의를 거듭하고 읍내 장터에 운집한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3] 복역하였다.
출옥 후 상주군 상주면 낙양리(현 상주시 낙양동)으로 이주하여 이곳으로 본적을 옮겼다.[4] 그러던 1920년 5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김교순(金敎舜)이 군자금을 모집하려 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상주군 상주면 복룡리(현 상주시 복룡동)에 살던 박인양(朴寅陽)에게 군자금 모집의 뜻을 밝히고 2만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 경찰에 또다시 체포되었고, 1920년 6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아[5] 복역하였다.
1969년 10월 15일에 정부 직할 부산시(현 부산광역시)에서 사망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07년 10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